지씨는 10여년을 살아온 울산이라는 도시가 여생을 보내기엔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그러나 부인 김씨(62)에겐 이미 삶의 터전이 돼 있었다. 결국 지씨 부부는 ‘주말부부’가 되기로 합의했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불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시에 대한 기호가 다를 뿐이었다.
지씨는 프리랜서로 일하는 막내아들(31)의 경기도 일산 집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러나 생활주기가 일정하지 않은 노총각 아들과 사는 것도 고역이었다. 지씨가 아들집에서 나오면서 하는 말. “같이 살 땐 미워보이던 놈이 떨어져 있게 된다니까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어.”
지씨는 1월초부터 서울 관악산 부근에 원룸을 얻어 혼자 산다. 요즘 인사동 찻집이나 영화관, 산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인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이 됐다. 지씨는 “가족간에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정을 나눌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가족분열’과 ‘융합’의 시대다. 가족이라면 으레 어머니-아버지-아들-딸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모습을 연상하던 때는 지났다. 결혼-혈연관계-공간의 공유가 더 이상 가족의 ‘필요충분조건’이 되지 않는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에선 매일 1005쌍이 결혼하고 339쌍이 이혼한다. 이같은 사회에서 복잡다단한 ‘변형 가족의 일반화’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서울의 인터넷기업 직원 김모씨(32)의 아버지(60)는 지난해 말 재혼한 뒤 고향인 청주를 떠나 경남 마산에 새 보금자리를 잡았다. 김씨는 설을 앞두고 혼란을 느낀다. 고향에는 부모가 없고, 아버지가 계시는 도시는 자신에겐 너무 낯설고 멀기 때문이다. 김씨는 설연휴 동안 서울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김씨는 의붓형(35)과는 가까워지게 됐다. 대기업 직원인 의붓형은 사업상 도움이 되면서 친하게 됐다고 한다. 김씨는 “아버지의 재혼이 내게 ‘새로운 가족애’를 경험하게 했다”고 말했다.
따로 살기, 빈번한 이혼과 재혼으로 인한 ‘법률적 가족’의 양산 이외에도 우리 사회엔 다양한 형태의 가족상이 제시되고 있다. 94년 결혼한 서울 여성신문사 총무 박해영씨(34)는 아이를 낳지 않고 살 계획이다. 육아에 드는 경제적 비용과 시간을 자신과 남편에게 쏟는 것이 더 인생을 알차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박씨는 “애를 안갖는 것은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했다. ‘육아의 보람’ 대신 박씨 부부는 주말과 휴일의 ‘로맨스’를 택한 것이다.
예비신랑-신부들의 가족관은 더욱 개성적이다. 한양대를 졸업한 웹마스터 김씨(32)는 최근 결혼정보회사인 ㈜듀오에 특별한 조건을 내걸었다. ‘마라톤을 할 수 있는 신부감을 구해줄 것’. 김씨는 “나에게서 결혼이란 조깅과 마라톤대회 출전을 함께 즐기는 취미생활의 연장”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육상선수 출신의 대학원생(27)을 소개받아 올 봄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서울여성의전화’내 ‘싱글여성모임’에선 50여명의 미혼여성들이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가족처럼 지낸다. 이 모임의 박연숙사무국장(34)은 “회원들이 개성이 강한 모습들을 서로 잘 이해하면서 가족역할을 대체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동성애자들의 모임인 ‘끼리끼리 사무실’의 관계자는 “서로 다른 이성만이 가족을 꾸릴 수 있다는 고정관념은 이제 깨지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관계는 ‘공동체 실험’ 속에서 점점 다양화되고 있다. 1월28일 저녁 서울 종로구의 ‘자율학교-물꼬’ 는 주말소풍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사설학원처럼 운영되는 이 단체에선 설립자인 옥영경 ‘터장선생’(35) 등 6명의 남녀 ‘두레일꾼’들이 일하고 있었다. 옥씨를 제외한 이들 20대의 미혼은 월급 40만원을 받고 하루종일 50여명의 학생들에게 그림이나 연극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곧 집을 구해 공동생활을 할 것이라고 한다. 물꼬의 최종목표는 두레일꾼들이 충북 영동에 정규 초-중-고등교육을 하는 ‘자유학교’를 설립해 평생 함께 학교를 가꾸며 사는 것. 두레일꾼 신상범씨(28)는 “우리에겐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다. 공통의 꿈을 갖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한다. 우리는 ‘가족공동체’” 라고 말했다.
충북 괴산에 사는 박형규(40), 양 임씨(29) 부부는 11명의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다. 저녁식사 때는 마치 흥부가족 같다. 이들 중 2명만 박씨 부부가 직접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입양했거나 양육을 위탁받은 아이들이다. 박씨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직접 가르친다. 핏줄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아이들은 서로에게 형제애를 느낀다고 한다.
경기 화성군의 야마기시 마을, 전북 부안군의 한울공동체, 전국귀농운동본부의 생태마을 등은 여러 가족이 모여 일종의 ‘대가족’을 이뤄 생활하는 곳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유니텔의 여성품앗이 등은 자신들에게만 통용되는 화폐를 사용한다. 공동으로 아이를 기르는 단체도 많다. 모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가족경제’ 단위로 통합하려는 운동들이다.
‘평등부부상’을 운영하는 여성신문사의 가족담당 이은경기자는 “가족내에서 평등권이 강조되고 있다. 구성원 각자의 다양한 욕구를 수렴하는 ‘맞춤형 가족’이 보편적인 모습으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인간관계는 언젠가 종말을 고할 것인가. 한국문화복지협의회 이중한회장은 “가족을 가지려는 욕구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가족이란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든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이며 무목적적인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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