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이 10월 2일 영풍-MBK파트너스 연합과 벌이는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최대주주 지위 이용, 석포제련소 폐기물 짐 지워
영풍-MBK 연합이 9월 13일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에 나서면서 촉발된 이번 경영권 분쟁에 대해 고려아연은 “최대주주 영풍의 일방적 공격”이라고 정의한다. 75년 동업자 관계인 고려아연과 영풍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경영 기조 차이로 크고 작은 불화를 겪어왔는데, 어렵게 관계를 유지하던 중 먼저 ‘적대적 인수합병(M&A)’으로 전쟁 서막을 연 쪽은 영풍이라는 게 고려아연 측 입장이다.
고려아연은 이번 사태의 시발점을 최근이 아닌 2010년대로 보고 있다(표 참조). 고려아연은 “소유는 장 씨 일가(영풍 측)가, 경영은 최 씨 일가가 맡는다”는 특이한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이다. 1949년 영풍 설립 때부터 시작된 장 씨, 최 씨 일가의 동업자 관계가 계열사 고려아연에 이 같은 경영체제를 만들었다. 문제는 십여 년 전부터 이들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고려아연은 “2010년대부터 영풍의 환경오염 리스크 떠넘기기와 부당한 경영 간섭이 있었고, 2020년대 신사업 추진 과정에서 시각차를 확인하며 본격적으로 갈등이 고조됐다”고 말한다.
영풍 측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영풍 관계자는 “고려아연이 폐기물이라고 지목한 것은 아연 제련 과정에서 발생한 잔재물 케이크로, 여기에는 아연을 비롯한 각종 금속 성분이 남아있어 재처리를 통해 금속을 추가로 추출할 수 있다”면서 “무엇보다 이 같은 처리 방안을 논의한 것은 맞으나 최종적으로 무산됐으니 고려아연에 떠넘겼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불편한 기류는 2020년대로 넘어가면서 점점 표면화하기 시작한다. 최윤범 회장 취임으로 ‘3세 경영’ 시대를 연 고려아연은 신사업 탐색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정체기에 들어선 제련업 대신 이차전지 소재, 신재생에너지, 자원순환 등으로 사업 분야를 다각화하고 나선 것이다. 일명 ‘트로이카 드라이브’다. 신재생에너지 분야에서는 한화, 이차전지와 자원순환 분야에서는 LG·현대차 등과 안정적으로 협력하고자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나서기도 했다. 이때 제련업에만 집중하며 ‘무차입 경영’을 강조해온 영풍은 고려아연의 행보에 계속적으로 반대 뜻을 내비쳤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따른 영풍 지분 희석으로 영풍 쪽에 돌아가는 배당금이 줄어든 점 역시 반대에 나선 주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아연은 “성장보다 생존에 방점을 둔 경영방식을 동업자 집안에 부당하게 요구한 것”이라며 “무엇보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로 장 씨 일가와 영풍 계열사 지분 희석률은 1%대에 그쳤고, 이후에도 영풍 측 지분율은 여전히 30%가 넘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영풍 관계자는 “트로이카 드라이브나 차입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외에 추진된 석연찮은 투자들에 대해 우려한 것”이라면서 “당시 고려아연이 투자한 사모펀드 운용사 원아시아파트너스는 고려아연 신사업과 전혀 무관하고, 결과적으로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에 연루되는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기업과 협력도 제3자 유상증자를 통해서만 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겉으로는 신사업을 위한 협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우호세력 확보가 목적이라고 보는 이유”라고 말했다.
영풍家 장남 ‘경영 참여’ 목적 고려아연 지분 매입
2022년에는 장형진 영풍 고문의 장남인 장세준 씨가 이끄는 코리아써키트가 고려아연 주식 3702주를 사들이며 그 목적을 ‘경영 참여’로 못 박는 일이 발생했다. 장 고문이 지분 100%를 보유한 에이치씨, 장 고문의 차남과 장녀, 영풍 계열사인 테라닉스와 시그네틱스 등도 차례로 고려아연 주식을 매수했다. “경영은 최 씨 일가가”라는 독립 경영 원칙에 균열이 생긴 순간이다.
영풍 측은 이에 대해서도 “제3자 배정 유상증자와 최대주주 지분율 희석에 따른 당연한 수순”이라고 설명했다. 영풍 관계자는 “희석된 지분을 회복하려는 영풍 측 지분 매입을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사건 발생의 순서를 왜곡하는 것”이라면서 “2022년 한화에 대한 제3자 유상증자와 지분 희석을 갈등의 시작으로 보는 게 자본시장의 일반적 관점”이라고 밝혔다.
양사의 갈등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올해 3월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영풍의 ‘배당 증액 요구’와 고려아연의 ‘제3자 유상증자 허용 여부’를 두고 표 대결이 벌어졌다. 양측 안건이 모두 부결되면서 상황이 일단락된 듯했으나, 이후 영풍이 고려아연과 현대차 해외 합작법인인 HMG글로벌이 진행한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신주 발행 무효 소송을 제기하며 둘 사이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된다. 고려아연은 자사 사업을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영풍과 더는 동업자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해 서린상사 경영권 확보 및 황산취급대행 계약 종료를 결정한다. 이를 계기로 영풍은 MBK와 고려아연 주식 공개매수를 위한 절차에 돌입한다.
이후 상황은 전쟁을 방불케 하는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고려아연이 영풍-MBK 연합의 공개매수 가격(75만 원)보다 높은 가격(83만 원)을 제시하며 맞불을 놓자, 영풍은 “주당 80만 원 이상으로 공개매수 하는 것은 배임”이라며 법원에 고려아연의 자기주식 취득 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1차 가처분신청이 기각되자 영풍은 공개매수가를 고려아연과 같은 83만 원으로 올리고, 2차 가처분신청을 냈다. 2차 가처분신청 결과는 이르면 10월 18일 나올 전망이다. 전체 동원 자금 규모가 초기 3조 원에서
7조 원으로 배 이상 늘어났기에 현재는 양사 모두 공개매수 가격을 치킨게임 하듯이 계속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고려아연 지분 1.85%를 보유한 영풍정밀 지분을 확보하는 쪽으로 전장을 넓혀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영권 뺏기면 국내 황산·아연 공급망 흔들릴 것”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은 10월 2일 기자회견을 열고 자사 주식 공개매수에 나선 데 대해 “경영권을 내어주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지만, 그것은 고려아연이나 협력사, 주주, 국가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고려아연은 영풍-MBK 연합이 고려아연 경영권을 가져갈 경우 국내 황산·아연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반도체, 철강, 건설, 자동차 등 주요 산업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고려아연 온산제련소 노조가 영풍-MBK 공개매수에 극렬히 반대하고 있으며, 최고기술책임자(CTO) 등 핵심 기술 인력은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전원 퇴사를 예고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온산제련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웨이퍼 표면의 이물질이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고순도 황산을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곳이다. 반도체용 황산을 포함해 연간 140만t(2023년 기준)의 황산을 생산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공급하고 있다.
아연의 경우 현재 고려아연이 연간 국내 수요의 56%를, 영풍이 30%를 담당하고 있는데, 영풍이 중대재해처벌법, 환경오염 제재에 따른 영업정지로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고려아연 경영권까지 넘어가면 국내 아연 시장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아연은 철강 생산 과정에서 철의 부식 방지를 위한 도금에 쓰이는 핵심 물질이다. 또 MBK는 부인하지만, MBK 측 동원 자금에 중국 연기금 중국투자공사 자금 일부가 포함돼 있어 MBK가 고려아연을 인수할 경우 고려아연의 핵심 기술이 유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문제로 거론된다.
고려아연은 10월 9일 ‘공개매수 가격 경쟁 중단’을 선언한 영풍-MBK 연합을 향해 “적대적 M&A를 14일까지 유지할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적법하게 철회하라”는 입장문을 냈다. “고려아연의 공개매수가 14일 이후 만료된다는 점과 2차 가처분신청에 대한 법원 결정 또한 14일 이후에 이뤄진다는 점을 악용해 고려아연이 아닌 MBK 공개매수에 응하라는 투자자 유인책에 불과하다”면서 “이는 또 다른 시장질서 교란 행위이며 고려아연의 적법하고 유효한 주식 공개매수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최 회장은 10월 11일 영풍정밀 공개매수 가격을 3만5000원으로 한 차례 더 상향했다.
이슬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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