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2일 경기 과천시 법무부 청사에 출근한 박범계 법무부 장관. [김재명 동아일보 기자]
간첩 김동식 ‘아무도 나를 신고하지 않았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2008년 출간한 ‘박범계 내 인생의 선택’ 표지. [사진 제공 · 출판시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대학 운동권 주류는 주사파였다. 주사파 대부 격인 ‘강철’ 김영환 씨는 공작원과 접선해 반(半)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김동식 씨는 주사파와 연계망을 만들기 위해 두 차례 한국에 침투해 장기간 암약했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역용(逆用)공작’(적 정보 요원을 포섭해 이중간첩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이런 움직임을 포착했다. 북한과 연결된 주사파를 추적하려고 김씨를 미행하다 부여에서 덮친 것이다.
김씨와 접촉하려고 한 10명과 실제 접촉한 7명의 이름이 나오자 수사가 확대됐다. 김씨 주장에 따르면 이 7명에 이인영, 우상호, 함운경, 허인회 씨 등이 있었다. 김씨 주장대로라면 7인을 만나 자신이 북한에서 왔다고 밝혔다. 다만 김씨를 접촉한 사람들은 그를 안기부 프락치로 의심해 믿지 않았다. 이 중 3명은 공안기관에 김씨를 신고했지만 나머지 4명은 신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기에 훗날 김씨는 ‘(간첩이라고 밝힌 나를)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라는 책을 낸 것이다.
모해위증 증거는 어디에?
안기부와 검찰은 대한항공 KAL858기 폭파범 김현희 씨처럼 중요 자백을 해 ‘북한 도발의 증인’이 된 이는 기소를 보류하고 보호한다. 김씨도 그렇게 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와 접촉했음에도 신고하지 않은 이들 가운데 허인회, 함운경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했다. 이 중 함운경 사건이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항소부에 배당됐는데, 박범계 장관이 당시 배석 판사였다.박 장관은 저서 ‘박범계 내 인생의 선택’에서 “김동식은 당시 안기부에서 공소 보류 상태였지, 유죄 확정 판결이 나지 않았다. 김씨가 간첩임을 전제로 그와 만난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주장에) 반대한 재판장과 갈등했다”고도 언급했다. 당시 박 장관은 자기주장을 관철하고자 30쪽에 이르는 판결문을 작성해 부장판사에게 전했다고 한다. 결국 부장판사는 그의 주장대로 선고하지 않았지만 후임 재판장이 무죄 판결을 내렸다는 것.
박 장관이 내세운 합동 감찰이 설득력을 지니려면 모해위증이 사실이어야 한다. 모해위증이 사실이려면 한 전 총리가 건설업자에게 돈을 받지 않았어야 한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한 전 총리 동생이 건설업자 계좌에서 나온 수표를 사용했음이 드러났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전원 합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한 전 총리 측에 돈을 전달한 건설업자의 동료 재소자가 위증하도록 검찰이 교사했다는 주장에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
박 장관은 김동식 씨가 간첩으로 판결받지 않았으니 그와 접촉한 후 신고하지 않은 사람도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한 전 총리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위증을 강요했다고 한 재소자의 주장도 법원에서 사실로 확인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모해위증이 있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박 장관은 수사지휘권을 행사하고 감찰까지 지시했으니 자기모순에 빠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