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1일 중국 베이징 옌치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단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김규현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은 10월 28일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발표하면서 양국 정상 간 오찬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앞서 27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한국 측이 아베 신조 총리가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했으나 일본 측이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한국 측이 오찬 없이 약 30분간 한일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일정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는데 그대로 된 것이다. 일본 정부 고위 관계자는 요미우리신문에 “이번 회담은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유일한 성과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법적 책임’과 ‘도의적 책임’의 중간선?
요미우리신문 보도대로 일본 측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외면한다면 앞으로 한일관계에도 한파가 이어질 것은 분명하다. 이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부담이다. 한국과 중국의 역사 공조를 자초하는 결과로 이어질뿐더러 한일관계 개선을 바라는 미국 눈초리도 따갑다. 일본의 국제적인 명예에도 도움 될 게 없다. 일본이 이를 모를 리 없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 본심은 뭘까. 일본 산케이 신문사가 발행하는 극우 시사월간지 ‘세이론(正論)’ 11월호에 주목할 만한 글이 실렸다. 8월 발표된 이른바 아베 담화 자문그룹에 참여했던 나카니시 데루마사 교토대 명예교수가 이토 다카시 도쿄대 교수와 가진 대담에서, 아베 담화 작성을 위한 보고서 초안에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이 거듭 사죄하고 보상을 위한 새로운 기금을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다”고 밝힌 것이다. 보고서 초안을 만든 인물은 자문그룹을 이끈 기타오카 신이치 국제대 총장으로,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한 아베 총리의 브레인이다. 이를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 수정주의자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 초대 이사를 지낸 나카니시 교수 자신이 저지했다는 무용담이었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평생을 바친 일본의 대표적 양심세력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기자와 통화에서 “기타오카 교수가 아베 총리 동의 없이 담화 초안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안을 넣을 수는 없다”며 “적어도 아베 총리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아베 담화에 여성 인권 문제를 두 차례 언급한 것도 한국에 대한 메시지였다”고 평가했다. 아베 총리 주변에 극우 인사들이 진을 치고 있지만 한편으로 냉철하게 국제 정세를 보고 있는 브레인도 적잖다는 의미다.
와다 교수와 통화하기 일주일 전 서울에서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발언이 있었다. 일한친선협회 회장으로 한일 50주년 기념 친선우호모임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가와무라 다케오 전 내각관방 장관이 10월 21일 기자들과 만나 아베 총리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 후속 사업 확충을 위안부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한 것이다. 아베 총리와 같은 야마구치(山口)가 지역구인 가와무라 의원은 9선 중진의원으로 그의 발언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무게가 있다. 그는 “9월 하순 아베 총리와 만났을 때 총리가 먼저 아시아여성기금 후속 사업의 존재를 최근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에 자신이 후속 사업 확충안을 거론하자 아베 총리가 귀를 기울였다는 것이다.
발언이 알려진 뒤인 10월 23일자 ‘동아일보’는 한일 외교 고위관계자를 인용해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예산을 투입해 정부 주도의 기금을 만드는 해결 방안을 내부적으로 마련했다’고 단독 보도했다. 기금은 1995년 출범했다 해산한 아시아여성기금의 남은 돈에 일본 정부 예산을 추가해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또 ‘일본 정부는 ‘책임’ 문제와 관련해 이중적인 해석이 가능한 표현을 사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등 한국 측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과 기존에 일본 정부가 주장해온 ‘도의적 책임’의 중간선이라고 할 수 있는 ‘정부가 책임을 느끼고’ 등의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방안을 고심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 장관은 이튿날 정례 기자회견에서 일단 이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일본 ‘교도통신’은 아시아여성기금에 남은 돈이 없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기사에서 인용한 외교 고위관계자 말을 아시아여성기금 전무이사를 지낸 와다 교수에게 재차 확인하자 “당시 기금에서 남은 돈 2억5000만 엔(약 23억6000만 원)을 외무성에 반납했다”고 증언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국민으로부터 모금한 5억6500만 엔을 한국뿐 아니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군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에 썼고 일본 정부가 내놓은 7억5000만 엔을 의료복지비와 사무비로 썼다. 기금에서 남은 돈은 일본 정부가 내놓았던 돈으로 이 중 의료복지비가 1억8000만 엔, 사무비가 7000만 엔이었다.
10월 2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율곡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0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에 참석한 학생들이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이상 정황을 종합해보면 아베 정권 내부에 위안부 문제 해결의 움직임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주목되는 것은 한국 정부 대응이다. 일본 정부가 해결안을 내놓는 대신 이번으로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점을 한국 정부가 보증해주고, 주한 일본대사관 앞의 위안부 소녀상(평화의 소녀상)을 철거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모두 우리 정부로선 정치적으로 상당히 부담되는 내용이다. 양국이 이번 정상회담을 앞두고 막판까지 줄다리기를 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일본을 방문한 야당의 지도자급 국회의원에게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물었다. 그는 “서로가 자신의 요구만 100% 관철할 수 없다. 결국 일정 부분 양보해가며 현실적인 접점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국내 정치적으로 적잖은 리스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리스크를 끌어안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게 정치 리더십”이라고 말했다. 교과서적이지만 맞는 말이다. 결국 위안부 문제 해결과 양국 관계 개선 여부는 두 나라 정치 지도자의 리더십에 달려 있는 셈이다. 양국 모두 정권 리스크보다 긴 안목에서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이번 한일정상회담은 그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