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의 우정힐스컨트리클럽 13번 홀은 그린 옆에 있는 벙커가 구르는 공을 잡아준다.
올해 브리티시오픈이 열렸던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17번 홀 그린 옆에 위치한 벙커의 별칭은 ‘나카지마’다. 1978년 브리티시오픈에서 선두를 달리던 토미 나카지마가 이 벙커에 빠져 네 번 만에 빠져나오는 바람에 우승을 놓쳤다고 해서 붙은 악명이다.
하지만 벙커라고 타수 잡아먹는 악당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골퍼를 돕는 ‘착한 벙커’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세이빙(saving) 벙커’다. 다른 말로는 ‘구제 벙커’라고도 하는데, 주로 가파른 페어웨이 가장자리나 워터해저드 근처, 내리막 언덕을 낀 그린 주변에 위치한다. 이런 벙커가 있으면 공이 언덕으로 더 굴러 내려가지 않는다. 공이 굴러 내려가거나 물에 빠지면 낭패지만 다행히 벙커에 있으니 벌타를 받지 않고, 공도 잃어버리지 않아 그 자리에서 온 그린을 시도할 수 있으니 1석3조다.
웨이스트 벙커에서는 벌타 없이 일반 페어웨이처럼 샷을 할 수 있다.
‘타깃(target) 벙커’도 골퍼에겐 아군이다. 처음 접하는 홀이라면 그린을 공략할 때 캐디의 조언이나 야디지북(코스 공략도)을 참고한다. 하지만 거리나 방향이 모호할 때가 종종 있다. 그때 정확한 공략 지점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타깃 벙커다. 골퍼에게 목표점을 설정해주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 벙커는 공이 떨어질 만한 지점에 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슷한 기능의 벙커로 ‘가이드(guide) 벙커’가 있다. 굽은 도그레그 코스에서 이 벙커를 보며 공략 지점을 명확히 정할 수 있다. 골퍼는 페어웨이에서도 가이드 벙커를 기준으로 어느 지점을 공략할지 샷 루트에 대한 가이드를 받는다.
‘웨이스트(waste) 벙커’는 클럽이 지면에 닿아도 벌타를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좋은 벙커다. 통상 벙커에서 샷 전 클럽이 모래에 닿으면 ‘지면 상태를 점검했다’는 이유로 2벌타를 받는다. 웨이스트 벙커는 골프장의 관리비 절감과 친환경적인 유지를 위해 만든 비관리지역이다. 따라서 벙커란 이름이 붙은 만큼 모래는 있지만 주변에 고무래가 없고 잡풀이 나 있거나 조개껍데기도 간혹 흩어져 있는 맨땅에 가깝다. 잔디 없는 맨땅에서 샷을 하는 건 페어웨이보다 좋은 환경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면에 닿아도 벌타가 없고, 샷을 마친 뒤 벙커 정리를 하지 않고 나와도 되는 일반적 상황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웨이스트 벙커는 골프장에서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모래 속에 공이 잠겨 있는 경우도 드물다.
‘나를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다. 벙커를 막연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성격을 가려 친구처럼 혹은 조력자처럼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어떤 프로선수는 어려운 홀이 있으면 아예 벙커를 향해 샷을 한다. 그린 에지 주변의 길게 자란 러프에서 예측 불허의 샷을 하기보다 평소 연습해놓은 벙커 샷이 더 쉽다는 이유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