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은 거의 매년 영화 한 편씩을 만드는 다작 감독이다. 주로 코미디이고, 간혹 심리적 멜로드라마도 만든다. 코미디 영화에는 여전히 직접 출연하며, 식지 않은 유머감각까지 발휘한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의 경우 자신의 코믹한 이미지를 의식해 ‘블루 재스민’(2013)에서 그랬듯 출연은 않는다. 심리적 집중이 필요한 드라마가 산만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신작 ‘원더 휠’은 한때 배우를 꿈꾸던 어느 웨이트리스의 좌절된 로맨스를 다루는 멜로드라마다.
지니(케이트 윈즐릿 분)는 놀이공원으로 유명한 뉴욕 코니아일랜드의 스낵바에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다. 애정 없이 함께 사는 배불뚝이 두 번째 남편은 이곳의 회전목마 관리인이다(제목 ‘원더 휠’은 이곳의 회전관람차를 뜻한다). 파죽음이 될 정도로 일하지만 살림은 빠듯하고, 첫 남편 사이에 둔 아들은 걸핏하면 방화를 일삼는 ‘문제소년’으로 변해간다. 속이 너무 상해 비 오는 날 하염없이 바닷가를 걷다(아마 자살을 상상한 듯), 청년 구조대원 믹키(저스틴 팀버레이크 분)에 의해 말 그대로 ‘구조’된다. 알고 보니 믹키는 유진 오닐을 존경하는 희곡작가 지망생이다. 지니는 정말 오랜만에 연극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연하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우디 앨런의 팬이라면 짐작할 수 있듯, 이때부터 ‘원더 휠’은 육욕과 탈선이 뒤섞이는 추락의 드라마로 발전한다.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가족 멜로드라마가 그러하듯, 믹키의 대본으로 지니가 주연하는 연극을 꿈꾸고 있을 때 남편의 배다른 딸로 마피아와 결혼한 캐롤리나(주노 템플 분)가 목숨을 건지고자 이곳으로 도망 오고 드라마는 전환점을 맞는다. 캐롤리나와 믹키, 젊은 두 남녀의 관계는 지니가 걱정한 대로 진전된다. 바야흐로 지니의 달콤한 꿈은 졸지에 불안한 악몽으로 변한다.
‘블루 재스민’이 케이트 블란쳇(201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의 모노드라마였다면, ‘원더 휠’은 케이트 윈즐릿의 모노드라마에 가깝다. 거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이야기 대부분을 끌어간다. 특히 악몽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부정하려는 후반부의 신경증적 연기에선 윈즐릿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지니는 웨이트리스도 연극에서 맡은 하나의 역할이라고 상상한다. 피곤하고 불행한 현실을 전부 허구의 한 부분이라 여기면서 자신은 다시 화려한 배우로 거듭날 것이라고 꿈꾼다. 그리고 또 다른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속 주인공 블랑시 드부아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달콤한 꿈에 젖는다. 지니에겐 부정하고 싶은 현실 모두가 허구가 되는 것이다.
우디 앨런은 ‘원더 휠’에서 현실과 허구가 모호하게 뒤섞인 멜로드라마의 매력을 다시 이용한다. 그가 종종 참조하는 멜로드라마의 고전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이고, 이는 ‘블루 재스민’에서도 인용됐다. 블랑시를 닮은 지니의 헛된 몸부림은 현실이 차라리 꿈이길 바라는, 한 번쯤 좌절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을 향한 공감의 몸짓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