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고기 목살과 아르헨티나산 말벡(Malbec) 와인은 내가 경험한 최상의 마리아주(mariage · 음식과 와인의 조화) 가운데 하나다. 그때 마신 말벡 와인은 트라피체(Trapiche) 와이너리의 라스 피에드라스(Las Piedras)였다. 연탄불에 구운 목살의 고소함과 라스 피에드라스의 풍부한 과일향은 환상적 궁합을 보여줬다.
말벡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양조용 포도다. 프랑스 보르도(Bordeaux) 지방이 원산지인 말벡은 한때 보르도의 주류였지만, 18세기 말 병충해로 타격을 입은 뒤 소수 품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8세기 중반 아르헨티나에 도입된 말벡은 이때부터 대표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아르헨티나 말벡은 보르도의 그것과 사뭇 다른 맛을 낸다. 보르도 말벡이 검붉은 색상에 강한 타닌을 자랑하는 남성적 와인이라면, 아르헨티나 말벡은 부드럽고 묵직하며 과일향이 진하다. 정열적으로 탱고를 추는 풍만한 여인 같은 느낌이다.
말벡이 다른 맛을 내는 것은 기후와 토양이 달라서다. 아르헨티나에서 말벡을 가장 많이 재배하는 멘도자(Mendoza)는 아르헨티나 최고 와인산지다. 안데스 산맥 기슭에 자리한 이곳은 고도가 높아 일교차가 심하고 연강우량이 200mm가 채 안 된다. 사막 같은 기후에서 어떻게 포도가 자랄까 싶지만 큰 일교차는 당도와 산도의 균형이 좋은 포도를 생산해내고, 안데스 산맥의 눈이 녹아 생긴 물이 갈증을 해소한다. 날씨가 건조해 병충해가 적으니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기도 쉽다.
트라피체는 멘도자에서도 가장 우수한 지역으로 꼽히는 우코 밸리(Uco Valley)에서 최고급 와인을 생산한다. 우코 밸리는 해발 고도가 900~1300m에 이르는 고지대로 햇살이 강한 반면 기온은 낮아 포도의 당도가 뛰어나고 향 집중도도 좋다.
트라피체가 우코 밸리에서 생산하는 말벡은 모두 싱글 빈야드(single vineyard · 한 군데 밭에서 나는 포도로 생산) 와인이라 개성이 뚜렷하다. 라스 피에드라스는 스페인어로 돌 또는 바위라는 뜻이다. 돌투성이 밭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이 와인은 자두와 체리 같은 과일향이 풍부하고 은은한 미네랄향이 복합미를 더한다. 타닌이 매끈하고 구조감도 좋아 와인이 탄탄하다.
암브로시아(Ambrosia)는 석회질이 많은 밭에서 자란 말벡으로 만든 와인이다. 과일향의 응축미가 뛰어나고 타임 같은 허브향이 매력적이다. 콜레토(Coletto)는 1945년에 심은 늙은 말벡이 섞여 있는 밭에서 생산한 것이다. 이 와인은 맛과 향이 붉은 체리와 산딸기처럼 신선하고 상큼하다. 엘 밀라그로(El Milagro)는 최근 출시한 싱글 빈야드 말벡이다. 과일향과 꽃향의 조화가 아름답고 향신료의 매콤함이 입맛을 자극해 다양한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린다.
트라피체의 싱글 빈야드 말벡은 가격 대비 품질이 좋아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높다. 라스 피에드라스는 원래 한국에서만 판매하던 한정판 와인인데, 대성공을 거둔 이후 다른 나라에서도 공급 요청이 쇄도한다고 한다. 7월 트라피체는 엘 밀라그로를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서늘하니 레드 와인 생각이 절로 난다. 엘 밀라그로 한 병 챙겨 오랜만에 단골 목살구이 집을 찾아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