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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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자본의 ‘바이 저팬’ 열풍

지난해 부동산 구매액 전년 대비 3배…교토 전통가옥까지 ‘사냥감’

  •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입력2015-01-19 10: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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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일본 미쓰비시(三菱)그룹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미국의 상징 ‘록펠러센터’를 8억5000만 달러에 구매했다. 현지 언론은 ‘미국의 자존심이 팔렸다’고 보도했다. 그만큼 미국인의 충격은 컸다. 당시는 일본 거품경제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여서 일본에 엔화가 넘쳐흘렀다. 일본 자금은 미국 부동산뿐 아니라 골프장, 영화 스튜디오 등을 마구 사들였다. ‘제2의 진주만 공습’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같은 단어가 미국 신문 지상에 심심찮게 등장했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2012년 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엔화 가치는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는 해외 자금이 일본 부동산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바야흐로 ‘바이 저팬(buy Japan)’ 시대가 온 것이다.

    엔화 약세에 도쿄올림픽 특수까지

    1월 1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법인이 사들인 일본 부동산은 9777억 엔(약 8조9400억 원)에 달해 2013년에 비해 약 3배로 늘었다. 미즈호(みずほ)신탁은행 계열의 도시미래종합연구소가 관련 통계를 내기 시작한 2005년 이후 최대 액수다. 현재 해외 자본의 일본 부동산 구매액은 전체 부동산 거래액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다.

    특히 눈길을 끄는 매수자는 중국, 싱가포르 등을 포함한 아시아계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는 지난해 10월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퍼시픽센추리플레이스(PCP) 마루노우치(丸の內)’ 빌딩의 사무공간을 약 1700억 엔에 사들였다. 이 건물은 도쿄 관문인 도쿄역의 야에스(八重洲)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지상 32층, 지하 4층짜리 거대한 건물로 2011년 11월 완공됐다.



    지난해 12월에는 중국 투자회사 푸싱그룹(復星集團)과 미국계 투자펀드가 일본 담배제조업체 JT의 복합시설 ‘시나가와(品川) 시사이드 포레스트’(도쿄 소재)의 오피스빌딩을 약 700억 엔에 구매했다. 이 밖에도 프랑스 악사그룹, 독일 유니온인베스트먼트 등이 지난해 도쿄의 복합건물을 수백억 엔대에 사들였다.

    해외 자본의 ‘바이 저팬’ 열풍

    2014년 10월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가 매입한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퍼시픽센추리플레이스(PCP) 마루노우치 빌딩.

    해외 자금이 일본 부동산으로 향하는 결정적 이유는 엔화 약세로 일본 부동산의 상대가격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정부투자공사가 사들인 마루노우치 빌딩 사무공간의 가격을 달러로 환산하면 2012년 말 기준 21억2500만 달러. 당시 1달러는 80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엔-달러 환율이 110엔 내외로 오르면서(엔화 가치 하락) 15억4545만 달러만 내면 살 수 있게 됐다.

    환율 효과뿐 아니다. 현재 주요국들이 양적완화를 실시하고 있어 부동산 구매 자금을 마련하기가 한층 쉬워졌다. 게다가 2020년으로 예정된 도쿄올림픽이 땅값과 오피스빌딩 임대료를 끌어 올릴 것이라는 기대감도 부동산 구매를 부추기고 있다.

    일본부동산연구소가 지난해 10월 내놓은 부동산가격에 대한 국제 비교 자료에 따르면 도쿄 중심의 최고가 수준의 오피스 임대료를 100으로 놓았을 때 홍콩은 165.6, 런던은 146.0이었다. 서울은 56.5, 베이징은 64.0. 해외 자본은 올림픽 이후 도쿄의 오피스 임대료가 오를 여지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도쿄 ‘시바우라(芝浦) 아일랜드’는 도쿄타워에서 도보로 약 15분 떨어져 있다. 중심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주위가 운하로 둘러싸여 있어 거주 환경이 매우 쾌적하다. 시바우라 아일랜드엔 49층짜리 타워형 맨션 4개 동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곳에선 중국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을 쉽게 볼 수 있다. 파견 나온 해외 기업 주재원이 맨션을 임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아예 투자 목적으로 구매한 사례도 하나 둘 생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홋카이도까지 번진 부동산 열풍

    해외 자본의 ‘바이 저팬’ 열풍

    최근 외국인 사이에서 인기 구매 대상으로 떠오른 일본 도쿄 ‘시바우라 아일랜드’의 타워형 맨션.

    시바우라 아일랜드 내 3LDK(방 3개와 거실, 부엌이 딸린 집으로 한국의 35평형 아파트에 해당) 맨션의 경우 층이나 방향에 따라 매매 가격은 8000만~1억 엔이다. 현재 환율로 환산하면 66만~83만 달러에 구매할 수 있는 셈이다. 3LDK의 월임대료는 35만 엔 내외. 1억 엔을 주고 집을 샀다고 해도 연간 4.2%의 임대료 수입을 올릴 수 있다. 도쿄 도심이어서 부동산가격이 잘 떨어지지 않는 데다, 향후 엔화 가치가 올랐을 때 되팔면 환율 차익도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은 ‘집주인’ 우위의 시장이 형성돼 있다. 임대하고자 할 때는 임대인의 신상 자료도 함께 제출해야 한다. 집주인이 임대를 줄지 말지 심사하기 때문이다. 집주인이 임대를 허락하면 임차인은 1개월 혹은 2개월치 월세를 사례금으로 줘야 한다. 이 돈은 향후에 돌려받지 못한다. 또 보증금용으로 2개월치 월세를 미리 건네야 한다. 임대계약이 끝나 퇴거할 때 집주인은 집을 청소하거나 수리를 하는데, 그 비용을 보증금에서 차감한다. 여유 자금이 있는 외국인이 도쿄에 주거용 부동산을 구매하면 여러모로 이득인 셈이다.

    외국 자본의 ‘바이 저팬’은 도쿄에서 불붙기 시작해 점차 지방으로 확대되고 있다. 과거 일본 수도였던 교토(京都)에선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외국 부유층이 부동산을 사들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교토시내 부동산 회사인 하치세(八淸)는 지난해 14채의 전통가옥을 외국인에게 판매했다. 스키리조트로 알려진 홋카이도(北海道) 니세코(ニセコ) 지역에도 외국 자본이 속속 들어오고 있다.

    일본 부동산가격이 세계 최고 수준일 때 해외 자본이 일본 부동산을 구매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해외 자본이 일본 부동산에 몰리자 일본 정부는 반색하고 있다. 해외 자금 유입이 경기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본 국토교통성은 지난해 8월 일본의 부동산 거래에 관한 법령을 영어로 번역, 제공해 해외 ‘큰손’들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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