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8

2011.12.26

야구 700만 관중에 ‘환호성’ 축구는 승부조작에 ‘망신살’

2011년 대한민국 스포츠 명장면·명선수 10選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 yoshike3@donga.com

    입력2011-12-26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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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스포츠사에 2011년은 그 어느 때보다 다이나믹한 해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영광과 좌절이 2011년만큼 극명하게 엇갈린 해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축구, 농구, 배구, 골프 그리고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까지 2011년 한 해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들었던 스포츠 명장면, 명선수 10선(選)을 뽑아봤다.

    #야구

    1 구장마다 만원 ‘프로야구 전성시대’

    2008년부터 2010년까지 3년 연속 500만 명 이상 관중을 동원한 한국 프로야구는 2011시즌 관중 목표 663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뒀다. 개막 전부터 4개 구장 입장권이 모두 팔려나가더니 역대 최소경기 300만(227경기), 400만(307경기), 500만(382경기) 관중 돌파 기록을 써가며 마침내 466경기 만에 꿈의 600만 관중 시대를 열었다.

    2011시즌 페넌트레이스 총 관중 수는 680만9965명(경기당 평균 1만2801명)으로 종전 최다 관중을 기록했던 2010년(592만8626명)보다 약 15%(88만1339명) 늘었다. 포스트시즌 14경기에 입장한 31만7413명 관중까지 더하면 총 관중은 712만7378명에 이른다. 페넌트레이스 600만 관중 돌파는 물론, 포스트시즌을 포함한 전 경기 700만 관중 돌파 역시 한국 프로야구 30년 역사상 처음이다.



    2 나가는 이대호, 돌아온 해외파

    2010년 타격 7관왕, 2011년 3관왕을 차지한 ‘대한민국 4번 타자’ 이대호는 2011년 12월 초 ‘2년 총액 7억6000만 엔’(계약금 2억 엔+연봉 각 2억5000만 엔+플러스 옵션 각 3000만 엔) 조건으로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에 입단했다. 이는 2003년 말과 2009년 말 각각 지바 롯데에 입단한 이승엽(2년간 총액 5억 엔, 옵션 1억 엔 포함), 김태균(3년간 총액 7억 엔, 옵션 1억5000만 엔 포함)을 넘어서는 역대 최고 조건. 전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가 제시한 4년간 총액 100억 원(보장금액 80억 원+옵션 20억 원)을 뿌리친 이대호는 “홀로 무인도에 가듯 두렵기도 한 게 사실”이라면서도 “2년 내 일본에서 최고 타자가 되겠다”고 말하며 일본을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반면 8년간 일본에서 뛴 이승엽과 올 시즌 중반 지바에서 중도 퇴단한 김태균은 각각 고향팀인 삼성과 한화로 복귀해, 국내 프로야구로 컴백했다. 이승엽은 연봉 8억 원을 보장받았고, 김태균은 역대 최고 연봉인 15억 원에 계약했다.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를 거친 박찬호 역시 ‘특별법’을 통해 한화에 입단했다.

    야구 700만 관중에 ‘환호성’ 축구는 승부조작에 ‘망신살’

    초보 감독 열풍을 불러온 양승호 롯데 감독(위)과 류중일 삼성 감독.

    3 초보 감독 선전과 사령탑 교체

    류중일 삼성 감독과 양승호 롯데 감독은 사령탑 데뷔 첫해였던 2011년 각각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과 정규시즌 2위로 끌어올리며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류 감독은 일본, 대만, 호주 대표가 참가한 ‘아시아시리즈 2011’에서 저팬시리즈 챔피언인 소트프뱅크를 꺾고 한국팀으로는 첫 우승을 일궈내는 등 탁월한 성적을 거뒀다. 초보 사령탑 두 사람의 선전은 LG 김기태, 두산 김진욱 등 또 다른 초보 사령탑 탄생으로 이어졌다.

    또한 어느 해보다 사령탑 교체가 많았다. 2011년 6월 두산 사령탑에서 자진사퇴한 김경문 감독은 제9구단 NC의 초대 사령탑에 올랐으며, 2010년 시즌 직후 삼성 지휘봉을 내놓았던 선동열 감독은 조범현 감독을 대신해 KIA 수장에 올랐다. 재계약 문제를 놓고 구단과 갈등을 빚었던 김성근 전 SK 감독은 2011년 8월 “시즌이 끝나면 옷을 벗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가 이튿날 결국 경질됐다. 그의 후임을 맡은 이만수 감독대행은 포스트시즌에서 거둔 호성적을 바탕으로 정식 감독에 취임했다.

    #농구

    4 남녀 동반 런던올림픽 간다

    임달식 감독이 이끈 여자농구 대표팀은 2011년 8월 일본 나가사키에서 열린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62대 65로 분패해 눈앞에서 런던행 직행티켓을 놓쳤다. 남자 대표팀 역시 2011년 9월 끝난 아시아선수권에서 3위에 올라 최종예선 출전권을 따는 데 만족해야 했다. 허재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남자 대표팀은 중국과의 준결승전에서 43대 56으로 석패했지만, 3·4위전에서 필리핀에 70대 68로 신승하며 3위까지 주어지는 최종예선 진출권을 획득했다.

    남자 최종예선전은 2012년 7월 열릴 예정. 그리스, 러시아,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등 총 12개 나라가 출전해 상위 3개 팀이 본선 진출권을 획득한다. 티켓 5장이 걸린 여자 최종예선전은 2012년 6월에 개최된다. 남자에 비해 여자농구가 세계 수준과 격차가 크지 않아 상대적으로 본선 진출 가능성이 높다. 남자농구는 1996년 애틀랜타 대회 이후 한 번도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지 못했지만, 여자농구는 애틀랜타 대회를 시작으로 2008년 베이징까지 4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골프

    5 태극낭자들 LPGA 통산 100승

    야구 700만 관중에 ‘환호성’ 축구는 승부조작에 ‘망신살’

    청야니를 꺾은 최나연이 우승컵에 입을 맞추고 있다.

    최나연은 2011년 10월 16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사임다비 대회 마지막 날 4라운드에서 3언더파 69타를 쳐 합계 15언더파 269타로 정상에 올랐다. 한국(계) 선수 통산 100번째 LPGA 대회 우승이란 금자탑을 쌓은 것이다. 7월 유소연의 US여자오픈 우승으로 통산 99승을 기록한 뒤 지독한 ‘아홉수’ 징크스에 시달렸던 한국 여자골프 군단은 최나연의 우승으로 마침내 100승을 채웠다. 구옥희(55)가 1988년 스탠더드 레지스터 터쿠오이스 클래식에서 정상에 오른 후 23년 만에 이룬 쾌거다.

    123년 미국 여자골프 역사상 통산 100승을 달성한 국가는 ‘전통의 강호’ 미국과 스웨덴뿐이다. 1998년 US오픈에서 ‘맨발 투혼’을 펼치며 우승을 차지했던 박세리가 홀로 25승을 올리며 한국(계) 골퍼가 이룩한 100승 중 정확히 25%를 책임진 가운데 김미현이 8승을 보탰고, 박지은과 한희원이 각각 6승을 올렸다. 그다음은 ‘세리 키즈’라 불리는 신예의 활약이 컸다. 박세리 뒤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는 신지애가 통산 8승을 올렸고, ‘100승 달성’ 주인공 최나연은 5승을 기록했다.

    #배구

    6 로미오와 줄리엣 박철우-신혜인 결혼

    야구 700만 관중에 ‘환호성’ 축구는 승부조작에 ‘망신살’

    박철우(오른쪽), 신혜인 커플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2011년 프로배구 V리그의 가장 큰 경사 중 하나는 남자배구 전통의 명가 삼성화재를 이끌어온 명장 신치용 감독의 딸이자 프로농구 선수 출신인 신혜인(27)과 삼성화재의 주포 공격수로 활약하는 박철우(27)가 2011년 9월에 백년가약을 맺은 것. 박철우와 신 감독은 사위와 장인 관계면서 선수와 감독으로도 만나는 묘한 인연의 주인공이 됐다. 사실 이들의 결혼은 스포츠계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켰다. 박철우가 본래 삼성화재가 아닌 현대캐피탈 선수였던 것. 현대캐피탈은 삼성화재의 오랜 라이벌 팀이다. 그러니 이들의 만남은 쉽지 않았을 터. 박철우의 구애는 처절했다고 한다. 신혜인은 처음엔 박철우와의 만남을 꺼려했지만 차츰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둘의 연애 사실이 세간에 알려진 뒤 TV 중계 카메라는 경기장을 찾은 신혜인에 주목했는데, 다행히 박철우가 삼성화재로 이적하면서 적어도 ‘딴 집안 사위를 들였다’는 표현에서는 자유롭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다. 장인의 한마디 한마디, 사위의 플레이, 이를 지켜보는 딸의 시선까지. V리그의 아름다운 스토리는 더욱 풍성해졌다.

    #축구

    7 아시안컵 우승, 그러나 조광래 감독 퇴진

    부임한 지 1년 5개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회한만 가득 남았다. 짜릿한 추억도 많았지만 아픔이 훨씬 깊었다. 최근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조광래 전 국가대표팀 감독 얘기다. 2011년 1월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한국 축구는 명성값을 톡톡히 했다. 승부차기 끝에 라이벌 일본에 무릎을 꿇으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3위를 차지하는 동안 높이 비상했던 대표팀이다. 조 전 감독이 진두지휘한 대표팀은 화려한 퍼포먼스로 승승장구했다. 2000년대 한국 축구를 수놓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태극마크 마지막 무대였던 아시안컵은 ‘만화 축구’로 무장한 조광래호의 정점이었다.

    이어진 건 시련. 조광래호는 2011년 8월 큰 파고를 경험했다. 일본 삿포로돔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세 골을 내줬다. 감독 경질설이 흘러나온 것도 이즈음. 11월에도 악몽이 찾아왔다. 한 수 아래로 얕잡아본 레바논과의 원정경기에서 또 졌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3차 예선인 만큼 최종예선 진출이 불안해졌다. 결국 대한축구협회(이하 협회)는 조 감독을 전격 해임했다. 그것도 한참 시기가 지난 시점이었다. 협회 기술위원회는 구성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과정도, 원칙도 없는 결정을 내렸다. 협회의 무능함과 밀실 행정은 조롱거리가 됐다. 이전에도 ‘야인’이던 조 전 감독은 그렇게 영원한 ‘야인’으로 남게 됐다.

    8 전북의 ‘닥공’ K리그를 삼키다

    2011년 K리그의 주인공은 전북 현대였다.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진짜 공격 축구를 전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항상 시즌을 앞두고 각 구단은 “공격 축구를 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를 제대로 지킨 팀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전북은 달랐다. 2005년 7월 ‘프로’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던 팀의 지휘봉을 잡은 최강희 감독이 보인 탁월한 지도법 덕택이었다. 푸근한 인상에 ‘봉동 이장’이라는 친근한 별명까지 붙은 최 감독의 지휘 아래 전북은 점차 득점이 많아졌고, 승리 횟수가 늘어났다. 2006년 아시아 정상을 밟은 전북은 2009년에 이어 올 시즌 프로축구를 평정했다.

    “전북에 원정을 온 팀이 승점을 챙겨 웃는 게 싫었다”던 최 감독은 정말로 원정 팀을 떨게 했고, 또 울면서 돌아가게 했다. 철저한 선수 관리, 탁월한 전술 식견은 국내 최고였다. 고졸이 학력의 전부지만 이제 전북을, 또 최 감독을 무시하는 팀은 없다. 2% 아쉬움이 있다면 2011년 AFC 챔피언스리그 정상 등극에 한 끝 차이로 실패했다는 것뿐. 그럼에도 전북은 K리그의 역사를 다시 썼고,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런 활약에 힘입어 최강희 감독은 A대표팀 새 감독으로 선임됐다.

    9 짜고 친 프로축구 경기 “이럴 수가”

    야구 700만 관중에 ‘환호성’ 축구는 승부조작에 ‘망신살’

    정몽규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맨 왼쪽)가 ‘K리그 승부조작 후속 대책 및 제도 개선안’ 발표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씻을 수 없는 한국 축구의 생채기로 남았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을 뿐, 실체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검찰의 조직폭력배 수사로 우연히 승부조작의 실체가 외부에 알려졌고, 수많은 선수의 검찰 소환으로 이어졌다. 한때 대표팀에 몸담았거나, 그에 준하는 화려한 경력을 지닌 김동현(전 상무), 최성국(전 수원) 등 스타급 선수도 여럿 구속 수사를 받았다. 가장 깨끗해야 하지만 반대로 항상 금전적 유혹을 받아온 상무 선수가 가장 많이 연루됐고, 시(도)민 구단에 몸담은 선수도 여럿 엮여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일부 축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윤기원, 정종관 등 전·현직 선수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고, 상무를 이끌었던 이수철 감독도 회한 많은 인생을 마무리했다. 고(故) 이 감독이 선수 협박에 대한 오명은 씻었지만 평생 씻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명예 탓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가슴 아팠다. 행정적인 파장도 컸다. K리그는 2011년까지만 해도 AFC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4장 받았으나, 승부조작이라는 도덕적 결함이 드러나 결국 3.5장으로 줄었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절반의 성공’

    202개국, 1945명. 역대 최대 규모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2011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8월 27일~9월 4일·이하 대구대회)는 ‘볼트로 시작해 볼트로 끝난’ 대회였다. 자메이카 육상 영웅 우사인 볼트는 남자 100m 결승에서 부정출발로 실격당하면서 대회 초반 엄청난 충격을 줬지만, 200m에서 우승한 뒤 47개 종목 중 가장 마지막에 열린 남자 400m 계주에서 100m 우승자 요한 블레이크와 함께 37초04로 2관왕을 차지했다. 37초04는 이 대회 유일한 세계신기록이었다. 다른 슈퍼스타가 대부분 부진했던 터라 볼트의 분전은 더욱 돋보였다.

    대구대회는 2007년 오사카대회(25만4000여 명), 2009년 베를린대회(39만7000여 명)를 훌쩍 넘는 연인원 45만여 명이 입장해 흥행 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은 역대 세 번째 ‘노메달 개최국’이란 아쉬움을 삭이며 또 한 번 세계 육상의 높은 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8개, 동메달 5개로 5회 연속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10번째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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