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2

2011.06.20

한국 미라, 조선의 타임캡슐

회곽묘 덕에 조선 전기 사대부 가문서 주로 발견 탄력 있는 피부 등 보존 상태 양호 마법 같은 정보 제공

  • 전승민 동아사이언스 기자 enhanced@donga.com

    입력2011-06-20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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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미라, 조선의 타임캡슐

    2010년 5월 경기도 오산의 미라 발굴 현장. 한국 미라는 회곽으로 둘러싼 무덤에서 발견된다. 이날 발굴한 미라 역시 조선 전기 회곽묘에 보존돼 있었다.

    ‘미라’라고 하면 흔히 아마포로 칭칭 감싼 이집트 미라를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국내에서도 여러 구의 미라가 발견되면서 한국 미라가 부쩍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 미라는 이집트 미라와 몇 가지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무덤 속에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미라의 보존 상태가 대부분 양호하다는 점이 대표적. 또 피부는 탄력 있고, 내장기관도 온전하다. 부검하면 대략적인 사망 원인도 밝혀낼 수 있다.

    한국 미라는 예외 없이 조선시대에 매장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특히 전기에 매장된 미라가 많다. 그리고 사대부 가문의 무덤에서만 발견된다. 왜 고려시대나 삼국시대 무덤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을까. 중인, 천민계층의 무덤에는 미라가 없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 실마리는 무덤에 있을 뿐이다. 한국 미라는 무덤에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동아사이언스’의 한국 미라 취재는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했다.

    부장품 벗기니 마치 살아 있는 듯

    쇠 끌로 소나무관 천판(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악취가 진동하리라 예상했지만 진한 소나무 향만 물씬 올라왔다. 2010년 5월 9일 고려대 구로병원 부검실. 기자는 새로운 미라가 나올 것 같다는 소식을 듣고 미라를 관에서 꺼내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나무관은 전날 경기 오산시의 한 산업단지 개발 현장에서 발견됐다. 발굴단은 전날 횟가루가 돌처럼 굳은 틀을 포클레인 등으로 부수고 안에 있던 나무관 그대로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옮겨왔다.

    오전 10시. 발굴단은 관 뚜껑을 열고 눈에 보이는 부장품을 하나 둘씩 꺼내 확인하기 시작했다. 시신의 옷과 부장품을 벗겨내는 작업을 ‘해포’라고 한다. 부장품을 한 겹씩 벗겨낼 때마다 소나무 향은 점차 사라졌다. 그 대신 2구의 사체에서 올라오는 단백질 냄새가 점점 진해졌다.



    오전에는 비교적 밝은 분위기 속에서 작업하던 발굴단도 오후가 되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취재에 열중하던 기자의 손놀림도 점점 느려졌다. 모습을 드러낸 미라는 살아 있는 듯했다. 의료진의 허락을 받아 수술용 장갑을 끼고 미라의 피부를 눌러봤다. 피부색은 비록 검게 변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인 양 탄력이 느껴졌다.

    한국 미라, 조선의 타임캡슐

    중국 후난성 창사에서 발굴한 마왕두이 미라(왼쪽)와 미라의 골격을 토대로 만든 모형(위).

    1년이 지나 다시 고려대 구로병원을 찾았다. 고려대 의과대학 김한겸 교수팀이 첨단기기를 동원해 오산에서 발견된 미라를 조사할 계획이라고 알려 왔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사망 원인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작업은 일반 환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밤에 이뤄졌다. 5월 6일 밤 10시경. 병원에 도착해 1층 영상의학과에 들어서자, 1년이 지났건만 미라는 발굴 당시 모습 그대로 나란히 누워 검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는 6일 밤 10시 30분부터 7일 새벽 2시 30분까지 4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연구팀은 먼저 64채널 초정밀컴퓨터단층촬영기(MD-CT)를 이용해 미라 전신을 촬영했다. MD-CT로 촬영한 데이터를 처리하면 내장기관을 포함해 몸 전체를 3차원(3D) 영상으로 만들 수 있다. 몸 곳곳을 X선으로 찍어 골격 상태도 확인했다. 이런 정밀검사가 가능한 이유는 한국 미라의 보존 상태가 우수하기 때문이다. 2009년 나주에서 발견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나주 미라’를 비롯해, 출산 중 태아와 함께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파평 윤씨 모자 미라’, 대전에서 발견돼 현재 계룡산 자연사박물관에 전시 중인 ‘학봉장군 미라’ 등 한국 미라는 대부분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한국 미라는 회곽으로 둘러싼 무덤에서 발견된다. 회곽이란 나무관 주위에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회반죽 덩어리를 뜻한다. 온전한 ‘회곽묘(灰槨墓)’가 발견됐다면 십중팔구 미라가 들어 있다. 회곽이 나무관을 둘러쌌으니 공기가 완벽하게 차단돼 미라가 만들어지는 것.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다른 종류의 미라가 출토된 적은 없다. 결국 한국 미라는 회곽묘라는 묘제문화의 산물인 셈이다.

    회곽묘 있는 곳엔 미라가 있다

    조선시대 묘제 전문가로 꼽히는 김우림 울산시립박물관장은 “한반도에서는 왕족, 사대부 집안에서 전통적으로 벽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 ‘석실묘’를 사용했다”며 “인력과 자원의 낭비가 크다고 판단한 조선 왕실은 태종 6년부터 석실 대신 회(灰)를 써서 무덤을 만들도록 권장했다”고 설명했다.

    회곽묘를 만드는 방법은 고려 말 한국에 주자학과 함께 전해진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전기의 회곽묘는 주자가례에 나오는 것과 형태가 다르다. 주자가례에 나오는 방법을 조선 왕실이 응용해 새로운 무덤 형태를 만들고, 그것을 권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방식을 ‘회격묘(灰隔墓)’라고 해서 주자가례에 실린 회곽묘와 구분하기도 한다.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회곽묘는 어디에서 시작했고, 어떻게 발전해온 것일까. 한국 미라처럼 무덤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미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5월 12일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세상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미라’라는 중국 박물관 직원의 자랑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피부에서 시반(시체에 생기는 검은 반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피부 색감이나 보존 상태는 흠잡을 데가 전혀 없었다. 미라가 아닌, 죽은 지 며칠 안 된 시신을 보는 듯했다. 상태가 지나치게 깨끗해 오히려 혐오감이 밀려왔다.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 있는 후난성박물관의 최대 자랑거리인 마왕두이(馬王堆) 미라는 1972년 발굴된 이후 40년 동안 세계 고고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기원전 150년경에 사망했으니, 2100년 이상을 땅속에 묻혀 있던 셈이다. 마왕두이는 창사 근처 유적지 이름으로, 서한 초기 ‘창사국’ 재상이던 리창(利倉)의 가족무덤이다.

    이곳에선 3개의 무덤이 발굴됐는데 발굴 순서에 따라 1, 2, 3호 무덤이라고 부른다. 1호는 부인, 2호는 리창 자신, 3호는 아들 무덤으로 밝혀졌다. 그중 미라가 출토된 것은 1호 무덤이다. 유명한 마왕두이 미라는 결국 재상 리창의 부인인 셈이다.

    마왕두이 유적은 한국 사대부 묘와 비슷하게 목관과 목곽을 사용했다. 회곽은 아니지만 숯과 백색 점토로 무덤 주변을 감쌌다. 놀라운 것은 규모인데, 한국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깊이 16m, 가로 17.8m, 세로 19.5m의 계단식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목곽을 감싼 숯의 두께가 40~50cm로 무게만 총 5t에 달한다.

    점토묘서 발굴한 마왕두이 미라

    한국 미라, 조선의 타임캡슐

    중국 후베이성 장저우에서 발굴된 168호 미라(위). 중국 미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춘추전국시대 미라다. 60세 무렵 사망했으며 폐질환을 앓은 것으로 밝혀졌다.

    마왕두이 미라가 완전히 밀봉되기 위한 조건은 역시 무덤을 감싼 1.3m 두께의 백색 점토다. 현지인은 이 백색 점토를 ‘백고니’라고 부르며, 미정고령토(微晶高嶺土)라고도 한다. 도자기 원료가 되는 카올린이 주성분이다. 시신을 4중 나무관에 눕힌 뒤 다시 목곽에 넣었는데, 규모에 큰 차이가 있지만 나무관→나무틀→충진재 순서로 시신을 감싸 땅에 묻는 매장문화는 비슷한 셈이다.

    한 가지 의문점을 지우기 어려웠다. 마왕두이 미라는 단순히 밀봉만 돼 있던 것일까. 2000년 이상의 세월을 견디려면 뭔가 다른 조건이 필요했다. 최근 연구결과 한국 미라는 회곽의 화학반응에서 발생하는 ‘열’로 살균작용을 거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중국의 거대한 묘는 어떤 살균과정을 거친 것일까. 그 실마리는 후난성박물관 가오즈시(高至喜) 연구관(전 관장)과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마왕두이 미라 발굴단의 일원이던 그는 “처음 관을 열었을 때 안에 물이 차 있었는데, 성분을 분석하니 적잖은 양의 수은이 검출됐다”고 말했다.

    “부장품으로 넣은 칠기 또는 실크에서 녹아 나왔거나, 당시 불로장생약으로 알려졌던 ‘신선단’을 장기 복용한 시신에서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경위야 어떻든 수은 성분이 세균 감염을 막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가오즈시 연구관과 함께 마왕두이 미라 발굴에 참여했던 후난성박물관 유전췬(游振群) 당서기관 역시 같은 말을 했다. 즉, “수은은 지금도 많은 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며 “시신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일부러 방부 처리를 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기자가 마왕두이 미라와 유적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국 미라와 생성 원인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마왕두이 유적지 같은 중국의 장묘문화가 자체적으로 발전하다가 주자사상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마왕두이 미라가 발견된 것과 똑같은 구조의 무덤에서 형성된 또 다른 미라가 없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덜컹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려간 곳은 후베이성(湖北省) 징저우(荊州). 이곳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168호 미라’가 전시돼 있다.

    이 미라는 1975년 6월 8일 징저우 인근의 장링(江陵)현에서 발견됐다. 동주(東周)시대, 즉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 도성이었던 곳으로, 한나라 때 고급 관리의 묘지로 쓰였다. 180여 개의 무덤 가운데 168번째 무덤에서 발견됐으므로 168호분 미라라고 부른다. 이 미라는 살아생전 우다이푸(五大夫)라는 관직을 지냈다. 미라는 곳곳에 검붉게 그을린 자국이 있지만 보존 상태는 비교적 우수했다. 미라 발견 후 부검을 하면서 내장기관과 뇌를 꺼내 함께 전시해뒀다.

    무덤은 규모가 작을 뿐 기본 구조는 마왕두이 미라 것과 똑같았다. 목관이 이중으로 돼 있었고, 적잖은 크기의 목곽도 보였다. 무덤 구조 역시 비슷한데, 백고니 대신 청고니(청색 점토)를 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살균작용은 어떤 원리로 이뤄졌을까. 박물관 안내를 담당한 학예사는 “관 속에서 물이 발견됐는데, 주사(朱砂)라는 광물질 가루가 녹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주사는 붉은 빛이 나며, 살균력이 강한 물질이다. 공기가 차단된 미라는 살균과정을 거쳐야 미라로 보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닐까.

    한국 미라, 조선의 타임캡슐

    2011년 5월 6일, 발굴한 지 1년 후 실시한 경기도 오산시 미라 해포 및 정밀조사 현장(왼쪽)과 해포를 마치고 부검대에 안치된 미라.

    한국 장묘문화 더 많은 연구 필요

    회곽묘 권장 정책을 펴던 조선 왕조는 왕족 무덤도 회곽묘로 만들기 시작했다. 세조가 묻힌 광릉은 처음으로 회곽묘로 만든 왕의 무덤이다. 이어 모든 조선 왕조의 무덤을 회곽묘로 조성했다. 조선 왕릉을 발굴해본다면 세조 이후 대부분의 왕을 미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조선 사대부와 왕족의 묘제문화였던 회곽묘는 주자가례를 참고한 만큼 중국 문화를 흡수했다고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주자가례에서 왜 그런 회곽묘 문화가 등장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회곽묘를 찾기 어렵다.

    한국 회곽묘는 삼물(三物·석회와 황토, 가는 모래를 2:1:1로 섞은 것)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석관 같은 느낌을 주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무로 만든 목곽묘다. 주변의 흙이 돌처럼 굳었을 뿐이다. 나무관에 시신을 염해 묻는 문화는 양국이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중국에 회곽묘가 없었다면 그곳에서도 무덤 속 미라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한국 미라 같은 형태의 ‘젖은 시체’가 발견된다. 마왕두이 미라, 168호분 미라가 모두 같은 사례다. 중국 창장(長江) 이남에서는 재상, 고위관료 등이 이 같은 점토 무덤을 자주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과연 회곽묘는 1500년의 시간을 넘어 해안가 문화를 따라 한국으로 넘어온 중국 점토묘의 변형일까. 회곽묘 문화가 정착하기 전, 한국의 귀족 계층은 고조선 이후부터 전해 내려온 석실 매장문화를 따랐다. 고조선 땅을 한나라에 빼앗긴 후 한나라가 직접 관리하던 낙랑 지역에서 천축분이라는 벽돌무덤 방식이 처음 등장했다. 이 무덤 양식은 계속 발전해 삼국을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공주대 문화재보존과학과 서정석 교수는 “석실무덤은 중국 문화가 대륙을 따라 한국으로 전해지는 기본적인 문화 전파 경로를 따른 것”이라며 “그러나 회곽묘 문화는 기존 경로로는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라는 조상의 육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고방식, 다양한 묘제문화와 기후환경이 하나로 합쳐져 만들어진다. 문화와 역사, 자연이 후세에 남긴 마법 같은 선물이다. 이런 미라를 연구하고, 조상이 전해준 정보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미라에서 얻은 고대 관련 정보를 통해 의학과 문화를 한층 더 풍요롭게 가다듬는 일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한국 미라, 왜 안 썩었을까

    “석회 끓어 고열로 살균, 관 내부 무균 상태 유지”


    미라가 썩지 않으려면 무균 상태는 필수다. 하지만 공기를 차단했다고 꼭 무균 상태가 유지된다고 보긴 어렵다. 산소 없이도 살아가는 ‘혐기성 세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세균이 계속 시신과 의복의 단백질을 분해하면서 많은 유기산을 만들고, 관 내부가 산성으로 바뀌면서 결국 혐기성 세균도 살아남지 못했으리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이런 가설은 기자가 발굴에 참여한 오산 미라 해포 과정에서 깨졌다. 오산 미라는 처음 관을 열었을 때 산성도를 나타내는 수치인 ‘pH’ 값이 중성인 7로 나왔다. 이 수치가 옷을 벗겨낼수록 8, 9로 증가했다. 미라는 염기성에서 보관된다는 의미다.

    그럼 한국 미라는 도대체 언제, 어떻게 살균과정을 거쳤을까. 새로운 실마리를 제시한 것은 서울대 신동훈 교수팀이다. 신 교수팀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원으로 2010년 8월부터 5개월에 걸쳐 ‘미라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를 그해 말 동아일보에 공개했다. 실제 회곽묘 비율에 맞춰 정밀하게 축소한 가로 19.8cm, 세로 10.6cm 크기의 작은 나무관을 만들고, 36mm 두께의 삼물로 관 주위를 감쌌다.

    10번에 걸쳐 실험한 결과, 관 주위에 설치한 삼물의 온도는 최고 200℃까지 올라갔다. 관 내부도 열이 전달돼 최고 149℃까지 상승했다. 관 내부 온도가 100℃ 이상 유지된 최대 시간은 210분이 넘었다. 실제로 관 내부에 실험용 흰쥐를 이산화탄소로 안락사한 뒤 넣었는데, 13주가 지나도 썩지 않았다.

    신 교수는 “연구결과를 놓고 보면 한국 미라는 부패하다가 도중에 중단된 것은 아닌 듯하다”며 “고열로 살균돼 관 내부가 무균 상태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 상식과는 전혀 다른 기전을 따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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