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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설계자들 17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천재 사학자에서 언론계 기린아로…‘자유언론’ 전통 세운 지성사의 거목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1974년 천관우 전 ‘동아일보’ 주필. 동아DB

해방 후 한국 지성사에서 천관우의 존재는 매우 이례적이다.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은 천관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언론계를 본무대로 하면서 한국사학을 하신 점부터 전례를 찾기 힘들다. 광복 후에는 오로지 천 선생 한 분뿐인 듯하다.” 천관우는 스스로를 ‘기자 반, 사학도 반’이라 규정한 적 있다. 기본적으로 천관우는 언론과 역사를 동일한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다. “신문은 오늘의 역사요 역사는 어제의 신문이다.”(천관우의 ‘언관 사관’)
1925년 충북 제천 출생인 천관우는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여섯 살부터 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조부로부터 한문 교육을 받았고, 이것이 후일 역사학자로서 큰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일제의 학병 징집 직후인 44년 4월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해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진학, 졸업 후 6·25전쟁 발발 전까지 약 1년간 사학과 조수로 있었다. 전쟁이 난 이듬해인 51년 1월, 생계 문제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인 후 40대 중반까지 언론인으로 살았다.
천관우는 외모나 성격, 습관도 특이했다. 그가 운명했을 때 ‘조선일보’ 1991년 1월 17일자 ‘이규태 코너’는 다음과 같이 인물평을 했다. “고인은 무척 고집이 세었다. 은밀한 별칭이 천(千)고집이었고 경우에 따라 만(萬)고집 (중략) 신동이 났다 하여 신문에까지 났을 정도의 수재인데 수재답지 않게 거구였다. 식량도 비범하여 우족탕이면 3인분, 초밥이면 5인분을 먹었다. 주량도 대단하여 네 홉들이 막소주 1병이 반주였다.”
‘서울신문’ 주필과 노동부 장관을 지냈던 남재희의 증언도 있다. “낮에는 설렁탕에 소주 2병쯤, 저녁에는 소주 4~5병”이었다. ‘대식가이자 호주가’인 천관우는 거물다운 외모로 180cm 키에 100kg이 훌쩍 넘는 몸무게를 지녔고, 그에 걸맞게 호방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1971년 4월 19일 열린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결성대회. 천관우는 김재준, 이병린과 함께 3인 공동대표위원으로 선출됐다(왼쪽). 1972년 4월 14일 ‘전(前)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공판에서 천관우(왼쪽)와 함석헌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동아DB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우다

언론인으로서 천관우는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4년 ‘한국일보’ 창간과 함께 그는 30세에 단번에 논설위원이 됐고 2년 후에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갔다, 58년 34세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고, 60년 ‘민국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63년 마흔이 못 돼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됐다. 손세일은 63년 동아일보의 천관우 영입을 이렇게 평했다. “동아일보가 ‘언론계의 기린아’ 천관우 선생을 편집국장으로 맞아들인 것은 김성한, 박권상, 송건호 등 당대를 주름잡던 논객 영입 작업의 화룡점정이었다.”
동아일보가 1964년 9월 ‘신동아’를 복간할 때, 천관우는 그 주간을 겸해 초기 신동아가 자리잡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기도 했다. 65년 말 동아일보 주필이 됐는데, 동아일보 편집국장 3년, 주필 3년의 시기는 언론인으로서 천관우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천관우가 해방 후 한국 언론사에 기여한 바는 조선, 동아 양대 일간지의 편집국장이라는 화려한 직함과 무관하다. 언론인으로서 그가 한국 사회에 기여한 가장 커다란 점은 자유언론의 전통을 세웠다는 데 있다. ‘언론의 자유’라는 현대 언론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지점을 고집스럽게 지켜내고자 했다는 점이다.
언론의 ‘윤리’는 언론 스스로 확립하는 것인가, 외부 권력에 의해 규제돼야 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서 천관우는 언론의 자율과 자유 수호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봤다. 1957년 4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창립 당시 천관우는 발기인으로 참여해 협회가 채택한 한국신문윤리강령을 기초했다. 그 내용은 언론의 자율기능을 존중하고 수호한다는 것이었다.
1964년 공화당 정권 수립 후 정권은 먼저 언론에 ‘손을 대고’ 싶어 했다. 이로 인해 그해 8월 소위 ‘언론파동’이 있었다. 국회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천관우는 이 사태가 언론과 권력의 관계라는, 언론 자유의 매우 핵심적인 문제임을 직감했던 듯하다. 9월 1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 ‘매일신문’ 4개 신문사 편집국장 명의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고(이때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휘도 함께했다), 법안이 폐기되는 방식으로 끝내 저지시켰다.
그러나 천관우는 끝내 동아일보에서 나와야 했다. 1968년 11월 발생한 신동아 필화 사건 때문이었다. 12월호에 김진배 정치부 기자와 박창래 경제부 기자가 공동집필한, 250매 분량의 기사 ‘차관’으로 필화가 생겼다. 이 사건으로 주필 천관우와 신동아 주간 홍승면, 부장 손세일 3인이 동아일보사에서 퇴사했다. 물론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컸다. 동아일보마저 무너졌다는 말이 나왔다. 언론 침묵 시대의 시작이었다.   
1968년 말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의 퇴사 직후 최석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은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는 말을 했다. 신문사 내부의 위계화가 진행돼 지면이 경영주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 것을 빗댄 말이었다. 언론사학자 정진석에 의하면, 60년대 중반은 언론기업의 대형화와 함께 경영이 편집의 우위에 서는 제작 관행이 성립되기 시작한 때였다. 50년대만 하더라도 광고시장은 열악한 조건에 있었고 신문산업의 자본력도 낮은 상태여서 신문사 운영이 영리 지향적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50년대 신문기업들은 신문을 정치 참여 도구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60년대 중반 이후 사정은 완전히 변했다. 특히 65년 삼성을 배경으로 ‘중앙일보’가 창간된 후부터는 언론계 전체의 경영풍토가 크게 달라지게 됐다. 엄청난 신문자본의 증가가 이루어진 것이다.(정진석의 ‘한국현대언론사론’)
중앙일간지의 자본 증가는 정부의 통제방식 변화와 맞물려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언론통제는 일선 기자들보다 경영진을 통하는 구조적 통제 방식으로 변하는데, 이는 신문사의 ‘기업활동’을 지원, 규제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는 현상이었다. 천관우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천관우는 기질적으로 ‘당당한’ 사람이었다. 언론인으로서 삶은 끝났지만 ‘무릎 꿇고’ 물러나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감시’라는 언론 기능에 대한 정통 입장을 확고히 갖고 있던 천관우는, 언론인으로서 활동이 힘들어지자 민주화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1971년 4월 19일 천관우는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창립될 때 3인 공동대표위원으로 김재준, 이병린과 함께 선출됐다. 이 단체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재야단체의 효시이자 재야운동의 시발이었다. 74년 천관우는 유신체제하 최대 재야기구라 할 수 있는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대표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1974년 11월 27일 ‘민주회복국민회의’가 주최한 ‘국민선언대회’에 모인 각계 인사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영삼, 맨 오른쪽부터 김대중·이휘호 부부, 세 번째 줄 맨 왼쪽이 천관우다. 동아DB

사학에 대한 열정과 천재성

한국사학의 태두 이병도는 평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들은 모두 언론계에 빼앗겼다”며 애석해했다고 한다. 한 사람은 천관우, 다른 한 사람은 김인호(후일 한솔제지 사장)였다. 역사학자 이기백은 천관우 별세 직후 한국일보 1991년 1월 17일자에 실은 조사를 통해 다음처럼 이야기했다. “은사이신 이병도 선생께서는 군계일학이란 말로 천 형을 칭찬하셨다. 나이는 한 살 아래이지만 오히려 형님과 같이 존경해온 터였다.”
천관우는 스스로를 역사학자보다 기자로 자처했지만, 분망한 신문사 생활 속에서도 역사 연구와 논문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천관우의 역사학 연구는 딜레탕트나 재야사학으로 낮춰 평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관우의 “본업이 언론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연구 업적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지 못했을 것으로 예단한다면 이는 매우 잘못된 판단이다. 조선시대 연구자로서, 고대사 연구자로서 그분의 위상은 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거목”이었다.(한영우의 ‘사학에 대한 열정과 천재성’)
천관우의 1949년 학부 졸업논문은 지금까지도 역사학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반계 유형원 연구-실학 발생에서 본 이조사회의 일단면’으로, 이 논문은 52년 창립된 역사학회의 학회지 ‘역사학보’ 제2집과 제3집에 전체 128쪽에 걸쳐 분재됐다. 이 논문이 국학계에 끼친 영향은 유명하다. 실학의 개념과 발전 과정을 최초로 이론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종석의 다음과 같은 평이 있다. “일개 대학 졸업논문이 학계의 주목을 끌기는 아마도 선생이 전무후무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중략) 이 논문은 1952년 ‘역사학보’에 게재되어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 붐을 이루게 된 실학 연구에 결정적인 단초가 되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이종석의 ‘한국 언론 100년사의 마지막 거목’)
1930년대 조선학의 실학 연구를 이어받아 새로운 단계로 진전시킨 이 논문은, 우리 역사에서 세계사적 근대의 맹아가 조선 말 외래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시작된다는 기존 학계 통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조선의 근세를 형성하는 내재적 계기는, 실로 멀리 임진왜란에서 시작되는 사회 자체의 자기 붕괴 및 그것을 반영하는 일련의 시대정신에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근대 지향적 사상으로서 실학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역사학보’ 제2집)
요컨대 실학은 봉건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 사상이며 따라서 조선 내부에서 근대의 맹아가 시작됐다는, 훗날 아주 오랫동안 국학의 주류가 되는 역사 해석이 이 논문에서 비롯된 것이다. 천관우의 실학이론은 오랫동안 정설로 있었으나 오늘날은 실학을 성리학 내부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가 대세인 듯하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학계와 지성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차후 다시 살피겠지만, 이 문제는 역사학의 식민 잔재 청산과 관련한 것으로 한국 사회 전체의 민족주의와도 깊이 결부돼 있다.
1970년대 천관우는 언론인으로서나 학자로서나 후배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다. 자유언론운동에서 기자들의 롤모델이 천관우였다. 73년 천관우의 주례로 손수향(장준하의 비서)과 결혼식을 올렸던 당시 동아일보 기자 이부영은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언론계 후배와 후학들은 천관우 선생이 결혼식 주례를 서주시기를 바랐다.”
마지막 지사형 언론인 천관우

1975년 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기자회견장. 왼쪽부터 이태영, 천관우, 윤형중이고 서 있는 사람은 함세웅 대변인(왼쪽). 1975년 2월 12일 단식농성 중인 함석헌의 방에 민주회복국민회의 인사들과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격려하는 모습으로 맨 오른쪽이 천관우다. 동아DB

쓸쓸한 말년의 삶

이랬던 천관우에게 후일 언론계 후배들이 일거에 등을 돌렸다. ‘민주화운동의 변절자, 배반자’라는 비난과 함께였다.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천관우는 갑자기 관변단체의 주요 직책을 맡기 시작했다. 81년 4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초대 의장이 됐고, 85년에는 국정자문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천관우 자신은 “구설이 잦은 것을 나도 짐작은 하고 있다”고 할 뿐이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말년이었다.
천관우의 말년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 구구한 해석이 있다. 분명한 것은 1970년대 내내 천관우에게 변변한 수입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신동아 필화 사건 후 퇴직했다 70년 동아일보 상근이사로 복귀하는 듯했으나, 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대표위원 건으로 이 해 12월 국가비상사태 선포와 함께 다시 퇴사해야 했다. 저술활동에 전념했다고는 하나 연구가 수입이 될 수는 없었다. 70년대 내내 빈곤에 시달렸으며 학회 회비를 내기도 힘들 정도였다는 증언이 있다. 김정남은 80년대 천관우의 변화 이유를 한마디로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분은 그 무렵(1980년) 너무 지쳐 있었고, 그리고 자신을 지켜나가기 힘들 만큼 가난에 쪼들리고 있었다.”(김정남의 ‘되새기는 잊혀진 거목’)
개인의 판단과 선택이 낳은 결과가 무엇이 됐든,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한국 지성사의 맥락에서 볼 때 천관우는 ‘거목’임에 분명하다. 신채호, 박은식 등 구한말 위인들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이자 지사(志士)였다. 천관우는 해방 후 그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정진석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그대로 천관우의 것이다. “천관우는 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지사풍 언론인의 맥과 전통을 이은 마지막 세대 언론인이었다.” 


주간동아 2015.12.30 1019호 (p64~67)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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