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시대적 배경인 1990년대는 ‘라이엇 걸’의 시대

영화 ‘캡틴 마블’의 사운드트랙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3-28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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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사진 제공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마블 스튜디오의 ‘캡틴 마블’은 1990년대가 배경이다. 주인공 캐럴 댄버스 역을 맡은 브리 라슨은 개봉 전부터 이 영화가 페미니즘 무비라고 주장하곤 했는데, 마블의 강력한 팬으로서 걱정이 됐다. 정치적 목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이상, 어떤 이데올로기든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 설득력을 갖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나. 과거 애국 영화들을 통해서 말이다. 막상 ‘캡틴 마블’을 보고 나니, 걱정은 기우였다. 1990년대라는 시대 배경에서 그럴 수 있었던 일들, 그리고 벌어졌던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축을 이루고 있었다. 

    1990년대는 ‘라이엇 걸(Riot Girl)’의 시대였다. 남성 중심의 질서에 반기를 들었던 일련의 여성을 일컫는다. 그들이 전면에 나선 분야가 록이었다. 그 전까지 록에서, 특히 미국 주류 음악계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한정적이었다. 금발에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전형적인 섹스 심벌, 또는 남성성을 동경하는 듯한 중성적 이미지 말이다. 재니스 조플린, 패티 스미스로 이어지는 1970년대 뮤지션들이 후자를 대표했다. 

    이런 흐름에 균열이 생긴 건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였다. 소닉 유스의 베이시스트였던 킴 고든, 어쿠스틱 기타로 래디컬 페미니즘을 노래했던 아니 디프랑코 같은 뮤지션이 등장하면서 ‘여성성’에 대한 담론이 음악계로 이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이런 물결은 수면 위로 올랐다.

    캡틴 마블이 지구로 돌아와 입는 첫 의상

    ‘캡틴 마블’에서 댄버스가 지구로 돌아와 처음 입는 의상은 청재킷과 나인 인치 네일스의 티셔츠다. 1990년대 록 콘서트장의 여성 관객 모습 그대로다. 그 전의 여성 록 팬은 대부분 그루피의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캐머런 크로 감독의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에도 등장하는, 록 밴드를 쫓아다니며 성적 유혹을 일삼는 여성 팬들 말이다. LA 메탈이 주도하던 1980년대에는 그런 이미지가 절정이어서 심지어 뮤직비디오에서조차 여성은 죄다 그루피처럼 그려지곤 했다. 

    하지만 너바나를 비롯한 일련의 얼터너티브 밴드가 등장하면서 록의 판도는 바뀌었고 장발과 가죽 부츠는 시대의 뒤편으로 밀려났다. 그들의 마초성도 덩달아 과거 유물이 됐다. 너바나의 보컬이자 리더였던 커트 코베인은 심지어 여성 란제리를 입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적도 있다. 



    펄잼, 그린데이 등 1990년대 중반을 달군 여러 밴드 역시 1980년대까지의 우악스러운 남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의 라이브 영상과 뮤직비디오에서 여성은 남성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여전히 객석에서 웃옷을 훌렁 벗는 여성 관객이 가장 주목받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치 댄버스처럼 밴드 티셔츠에 청바지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록 콘서트장의 표준 복장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댄버스는 지구에 돌아올 때 외계종족인 크리족의 슈트 차림이지만 지구인의 의상을 어느 마초적 남자로부터 빼앗아 입는다. 의미심장한 연출이다.

    ‘Come As You Are’가 흐르는 순간

    1990년대 ‘라이엇 걸’을 대표하는 코트니 러브(왼쪽)와 저스틴 프리시먼. [AP=뉴시스, 위키피디아]

    1990년대 ‘라이엇 걸’을 대표하는 코트니 러브(왼쪽)와 저스틴 프리시먼. [AP=뉴시스, 위키피디아]

    ‘캡틴 아메리카’가 기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이끌었다면, ‘캡틴 마블’은 이후 마블 시리즈를 이끌 주인공이다. ‘캡틴 마블’ 또한 다른 히어로와 마찬가지로 성장 과정을 거친다. 우연한 기회로 초인적인 힘을 얻었지만 영화 스토리를 통해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즉 힘의 객체에서 주체로 거듭나며 진정한 슈퍼히어로로 각성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댄버스가 ‘여자아이’로 자라며 겪어야 했던 과거 기억과 맞닿으면서 그의 각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 과정에서 흐르는 음악은 대부분 1990년대 여성 뮤지션의 노래다. 홀, 엘라스티카, 솔트앤페파, 엔 보그, TLC, 노 다웃…. 누구 하나 만만한 음악가가 아니다. 

    코트니 러브가 이끌었던 홀은 1990년대 음악계에 나타난 대표적인 ‘나쁜 여자(bitch)’ 캐릭터였다. 러브는 커트 코베인의 아내이자 빌리 코건(스매싱 펌킨스의 리더)의 전 애인이기도 하지만, 당대 두 록스타와의 관계에서 늘 주도적인 이미지였다. 오노 요코를 제외한 그전까지 록스타의 ‘뮤즈’가 어떤 캐릭터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코트니 러브는 확실히 파격이었다. 인물이나 ‘Celebrity Skin’ 같은 노래에서나. 

    영국 밴드 엘라스티카를 이끌었던 저스틴 프리시먼 역시 1990년대 브릿팝을 상징하던 여성이다. 그 시대를 다루는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핵심적인 발언자이자 역시 그전까지 여성 뮤지션, 특히 록 뮤지션이 성적 대상화돼 소비되는 것을 당연시하던 시절에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줬다. 가장 큰 히트작인 셀프 타이틀 앨범에서 들려준 음악은 확실히 당시 영국 여성 음악가들과는 다른, 중성적인 모습이었다. 힙합 뮤지션이던 TLC, 솔트앤페파는 좀 더 구체적이다. 요즘으로 치면 ‘걸 크러시’의 원조였다. 

    록에 비해 훨씬 마초적이고 여성 혐오적이던 당시 힙합에서 그들의 등장은 여성이 충분히 멋진 힙합을 들려줄 수 있음을 만방에 알렸다. 윤미래를 비롯한 한국 1세대 여성 힙합 뮤지션에게, 심지어 디바 같은 1990년대 걸그룹에게도 그들의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이런 1990년대 여성 뮤지션의 음악은 구질구질한 설명 없이, 캐럴 댄버스라는 캐릭터를 설명해주는 효과적 매개다. 

    너바나의 ‘Come As You Are’가 수록된 앨범.

    너바나의 ‘Come As You Are’가 수록된 앨범.

    ‘캡틴 마블’의 중요한 전환 포인트는 그가 ‘주체’로서 각성하는 순간이다. 그때 그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턴테이블에서 흐르는 노래는 너바나의 ‘Come As You Are’다. 이 영화에 너바나의 곡이 쓰인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려진 사실이다. 도대체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했다. ‘Smells Like Teen Sprit’도 아니고 ‘Come As You Are’라니! 이 노래야말로 이 영화의 그 순간에 최적화된 노래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1990년대 서구 대중문화란 집단이 아닌 개인의 각성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고 바라보는 시기였다. X세대의 탄생과 그들이 지지했던 대중문화, 1995년을 배경으로 하는 ‘캡틴 마블’이 흡수하기에 최적화된 시대 흐름이었다. 그 흐름이 오늘날 젠더 혁명에 씨앗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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