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2

2014.08.25

한국 경제 ‘등 터진 새우’되나

러시아와 서방, 경제 제재로 갈등 심화…사태 장기화 땐 수출에 직격탄

  • 황나영 우리금융경영연구소 책임연구원 nyhwang@woorifg.com

    입력2014-08-25 11: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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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와 서방의 갈등이 심상치 않다. 3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편입 이후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에 다양한 제재를 가했지만, 이때만 해도 주로 고위직 비자 발급 제한과 여행 금지, 관련 기업의 자산 동결 등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이 범위가 급속도로 확산일로를 걷고 있다.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이나 에너지 기술 수출을 제한하는 등 실물경제에 직접 타격을 미칠 수 있는 부문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7월 16일 러시아의 주요 금융, 에너지, 군수 산업 관련 기업에 대해 자국 내 금융시장에서 90일 이상의 채권 발행과 중·장기 자본 조달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같은 달 29일 유럽연합(EU)도 정부 지분 50% 이상 은행의 유럽 금융시장 내 주식 및 채권 발행 금지, 무기와 군수품 거래 금지, 에너지 기술 수출 제한, 군수물자로 전용될 수 있는 품목의 수출 금지 등을 포함한 강도 높은 제재안에 합의했다. 말레이시아 여객기 격추로 많은 유럽인 사망자가 발생한 게 결정적인 촉매 구실을 했다.

    내수 위축 러시아, 경기 하강 불가피

    가만히 있을 러시아가 아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과 EU산(産) 농산물 수입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우크라이나 여객기가 러시아 영공을 통과하는 것을 금지해 시베리아 영공을 폐쇄할 수 있다는 경고도 이어졌다.

    이렇듯 양측 갈등이 심해질수록 불리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아무래도 러시아 쪽이다. 금융 불안이 심화하는 가운데 자본 유출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재 강화 이후 한 달 동안 러시아 주가지수는 3.1%, 루블화 가치는 4.8% 하락했다. 7월 28일 러시아 중앙은행이 물가 안정과 환율 방어를 위해 기준금리를 7.5%에서 8.0%로 인상했지만 루블화 가치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따라 상반기에만 총 750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자본이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지난 한 해 전체 유출 금액(627억 달러)보다 많은 규모였다.



    실물경기 측면에서는 기업의 조달 비용이 상승하고 투자와 소비 등 내수 부문이 위축하면서 러시아 전체의 경기 하강이 불가피해졌다. 먼저 국채금리가 9%대 중반으로 상승하고 해외로부터의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러시아 기업과 은행들이 자금 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 높은 금리에도 인플레이션 압력이 지속되고 있으며, 통화 약세에 따라 구매력이 줄어들고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소비도 단기간에 회복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러시아의 7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5%. 특히 식료품의 40%를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특성상 푸틴 정부의 이번 농산물 수입 금지 조치는 오히려 인플레이션 압력을 심화해 소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경제 ‘등 터진 새우’되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자동차 공장을 견학 중인 현지 어린이들.

    서방국가들은 어떨까. 미국 경제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러시아와 지리적, 경제적으로 근접한 EU는 이야기가 다르다. 제재 강화 이후 유럽 주가와 통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도 후폭풍에 대한 염려가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부문은 수출과 에너지. 4월과 5월 EU의 대(對)러시아 수출이 전년 대비 각각 13.4%p, 15.8%p 감소하는 등 부정적인 영향도 이미 가시화한 상태다. 석유의 24.5%, 가스의 29.4%를 러시아에 의존하는 EU 특성상 대러 제재가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 조달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특히 러시아가 EU의 추가 제재에 대응해 에너지 수출 가격 인상을 추진하고 있어, 향후 유럽 국가의 에너지 관련 지출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

    개별 기업 차원에서는 러시아와 사업 연관성이 높은 에너지 기업이나 러시아 매출 비중이 높은 기업이 우선적으로 피해를 입을 개연성이 있다. 러시아 국영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의 지분 20%를 보유한 영국 BP, 역시 로스네프트와 북극사업 관련 협정을 맺은 이탈리아 ENI와 노르웨이 스타토일(Statoil), 러시아 최대 자동차기업 아브토바즈(AvtoVaz)와 아브토프라모스(AvtoFramos)를 자회사로 둔 프랑스 르노 등 많은 회사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 진출 기업들 영업 환경 악화 우려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대목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미칠 영향은 생각보다 크지 않을 개연성이 높다. 먼저 한국은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므로 농산물 수입 금지 등 러시아 측 보복 조치와 관련해 해당 사항이 없다. 대러 수출과 투자 의존도도 높지 않은 편이라 러시아의 내수 부진이 한국의 수출이나 투자에 타격을 입힐 공산도 크지 않다. 2013년 현재 대러 수출이 우리의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 투자 금액은 전체의 0.8%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태가 장기화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먼저 러시아와 연관성 높은 산업을 중심으로 피해가 나타날 수 있다. 자동차 및 부품, 선박 관련 산업이 대표적이다. 한국의 대러 수출은 연간 110억 달러에 불과하지만 이 중 자동차 및 부품이 40% 이상, 선박이 14%를 차지하는 등 품목 집중도가 높은 편이다. 전체 자동차 수출액에서 러시아의 비중이 6.8%, 자동차 및 부품은 5.8%, 선박은 4.3%에 이른다. 러시아 내수 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한국 전체 수출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특히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경우 영업 환경이 악화하리라는 점은 명약관화하다. 현재 포스코와 금호타이어, 현대·기아자동차, LG전자 등의 판매 법인이 러시아에 진출해 있고, 이 밖에도 우리은행과 롯데호텔 등 다양한 업종이 러시아에서 활동 중이다. 러시아 국민의 소비심리 냉각과 구매력 저하가 이어져 소비시장 전체가 위축한다면 이들 기업의 매출 저하는 불가피해진다.

    또 하나 불길한 시나리오는 양측의 경제 제재가 유럽 전체의 경기 침체로 이어지는 경우다. 유로존과 러시아를 합할 경우 한국 전체 수출에서의 비중은 10% 내외까지 높아진다. 유럽이 흔들리면 우리의 수출 경제 역시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다. 서방 측 제재로 러시아의 건설 분야나 에너지 산업 관련 대형 프로젝트가 추진에 어려움을 겪으면 한국의 철강 및 조선 업체도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다.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 끝머리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우리 안방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글로벌 경제’의 우울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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