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9

2014.03.17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03-17 0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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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형 쌤앤파커스 대표

    “주인으로 사는 사람은 환경이나 남 탓하지 않는다”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나는 다만 조금 느릴 뿐이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출판사 쌤앤파커스가 펴낸 베스트셀러들이다. 이 제목들에는 공교롭게도 기획자 박시형(51) 쌤앤파커스 대표의 삶이 오롯이 담겼다. 그의 청춘은 아팠다. 또래보다 늦은 출발에 괴로워했고, 때로는 좌절감에 모든 걸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긴 고난의 시간 동안 멈춰서 바라본 것들이 오늘의 박 대표를 만들었다.

    “책임져야 할 일이 끝없이 쏟아졌어요. 얼마쯤 지나면 정리되겠지, 그러고 나면 내 인생이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죠.”



    박 대표가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한 얘기다. 고난의 시작은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 사업이 몰락하면서부터였다. 맏딸인 그에게 가족 생계가 떠맡겨졌다. 카프카를 사랑하던 문학소녀는 일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동생들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편찮은 부모 병구완하며 세월을 보냈다. 건국대 야간부 독문과에 들어가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했지만 삶의 돌파구는 열리지 않았다.

    “출판기획자가 되고 싶은데 길이 없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출판사가 얼마 안 됐거든요. 좋은 대학 나온 분들끼리 선후배 인연으로 일하는 곳이 대부분이라 야간대를 졸업한 저는 들어갈 방법이 없었죠.”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이 건물 저 건물 다니며 다보탑, 거북선 따위 모조 기념품을 파는 일도 했다. 분통 터지는 순간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억울하기도 했다. 힘겨운 나날을 견디게 한 건 ‘내가 이렇게 살다 끝날 사람은 아니다’라는 자긍심이었다. 박 대표는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믿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제품을 판매하려고 다니다 우연히 시사연감을 내는 출판사 사무실에 들어서게 된 것. 사장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마침 그 회사에 하나뿐이던 직원이 막 퇴사한 참이었다.

    “일반적인 출판사는 아니었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였어요. 그 자리에서 사장을 설득해 저를 채용하라고 했죠.”

    박 대표는 당시가 떠오르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매순간 절박했고, 더 나은 삶에 대한 꿈과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한동안은 연감 만드는 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영역을 넓혀나갔다. 사장을 설득해 단행본 출판을 시작했고, 기획부터 출간까지 전 과정을 도맡았다. 그의 손끝에서 ‘아들아 머뭇거리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등의 밀리언셀러와 우리나라 경제경영 전문서 시장을 개척한 ‘경영 연구 시리즈’가 태어났다. 박 대표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일을 하니 세상이 반응해왔다”고 회고했다.

    오랜 시간 쉽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차곡차곡 쌓은 경험도 이후 ‘새로운 책’을 기획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체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다. 나는 힘든 일을 겪을 때면 속으로 ‘이 고통이 내 삶에 자산이 될 것’이라 여겼고, 정말 그랬다”고 했다. 오늘 힘겨운 삶의 고비를 지나는 사람에게 그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바로 이것이다. “지금의 아픔을 소중히 여기라”는 것, 그리고 근성과 열정, 자신감으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는 것. “자신의 삶을 환경에 맡겨두고 남 탓만 하는 건 주인으로서의 태도가 아니다”라는 게 박 대표 생각이다.

    박준영 변호사

    “사고뭉치 아이들 변호하며 비주류 콤플렉스 극복”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아이들이 억울한 옥살이에 대해 금전적으로나마 보상받아 다행입니다. 하지만 사건이 끝난 건 아니에요. 국가와 수사 검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아직 진행되고 있거든요.”

    박준영(40) 변호사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는 국가기관이 힘없는 이에게 죄를 떠넘기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이 사건’은 2007년 경기 수원에서 발생한 노숙소녀 살해사건을 말한다. 한 고등학교 화단에서 소녀 사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경찰은 곧 지적장애인 2명을 소녀 살해 혐의로 체포했고, 범행 일체를 자백받았다. 이들에게는 각각 징역 5년과 벌금 200만 원이 선고됐다. 이듬해 10대 청소년 4명이 또 이 사건 범인으로 구속됐다. 박 변호사는 이들의 변호를 맡았다. 아이들이 따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자 수원지방법원이 그에게 국선변호를 맡긴 것이다.

    알고 보니 ‘범인’이라 불리던 이들은 가출을 수차례 반복한 이른바 ‘비행청소년’이었다. 그들의 석방에 가족조차 관심이 없었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범행 사실에 대해 자백도 한 상태였다. 형식적으로 변호인 구실을 할 뿐, 딱히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을 돌보던 경기도 청소년상담지원센터 교사들이 박 변호사를 찾아왔다. “아이들이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 접견한 아이들도 그에게 “사람은 죽이지 않았다”고 호소했다. 경찰, 검찰에서 ‘절대 아니라’고 해도 믿어주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1심에서 이들에게 징역 2~4년이 선고되자 박 변호사는 즉각 항소했다. 그리고 직접 수사기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사건 현장을 탐문하고, 검찰의 영상녹화물도 열람했다. 그 과정에서 수사상 문제점이 드러났다.

    “수사기록을 보면 아이들이 혐의 내용을 강하게 부인해요. 그런데 정작 조서에는 그 내용이 하나도 적혀 있지 않더군요. 영상녹화물에는 수사검사가 ‘공범이 모두 자백했다. 너도 자백하면 집행유예를 받을 수 있다’며 회유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고요.”

    수사관이 사건 정황을 알려주고 답변을 유도하는 등 짜깁기 수사를 한 정황도 드러났다. 결국 아이들은 긴 재판 끝에 2009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최근에는 나라로부터 구금 기간에 대한 형사보상금도 받았다. 박 변호사가 “금전적으로나마 보상을 받아 다행”이라고 한 건 이 때문이다. 박 변호사가 사건을 맡기 전 이미 형이 확정됐던 지적장애인 2명은 재심을 통해 무죄가 됐다. 박 변호사는 “고문 같은 국가기관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 일반 형사사건에서 재심이 이뤄지고, 피고인의 무죄가 확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사건을 진행하는 동안 부담이 컸다. ‘일개’ 변호사가, 그것도 국선 사건을 주로 하는 개인 변호사가 검찰과 법원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천지에 믿을 곳 하나 없는 이들이 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수임료조차 받지 않고 이 일에 매달린 데는 남다른 삶의 궤적도 영향을 미쳤다.

    박 변호사의 고향은 전남 완도군 노화도. 목포에서도 배를 타고 5~6시간은 가야 닿는 작은 섬마을이다. 그는 이곳에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학생 시절 겪은 어머니의 죽음과 권위적인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다. 무시로 가출했고, 정학과 징계도 자주 받았다. 자전거 사고를 낸 뒤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해 구속된 적도 있다. 3형제 맏이인 그에게 아버지는 “제발 고등학교만 마쳐달라”고 부탁했다. 노화종합고를 졸업함으로써 아버지 뜻을 이뤄드린 뒤 그는 고향을 떠나 세상을 주유했다. 목포대를 1년 다니다 자퇴하고, 돈을 벌었다. 막노동부터 양어장 일까지 주로 몸 쓰는 일을 했다.

    그가 불쑥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된 건 군대 선임이 고시 준비생이었기 때문이다. 제대 후 선임이 고시 서적을 사러 서울 신림동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그는 “돌아보면 자존심이 상해서였던 것 같다”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저도 공부를 제법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아보니 형편없이 살고 있는 거예요. ‘친구들은 좋은 대학 다니는데 나는 뭔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월 9만 원짜리 고시원 방을 얻고, 삭발한 채 홀로 공부를 시작했다. 1997년 7월의 일이다. 논리적이고 정교한 법 세계는 꽤 흥미로웠다. 공부의 재미를 처음 알았다. 이후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그는 스스로 ‘이 이상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큼 공부에 매달렸다. 그사이 아버지가 막대한 빚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더 절박해졌던 면도 있다.

    마침내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달라지는 건 많지 않았다. 박 변호사에 따르면 ‘종합고 졸업에 지방대 중퇴 학력, 판검사 경력조차 없는 변호사’는 경쟁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시장에서도, 취업시장에서도 번번이 높은 벽에 가로막혔다.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마라톤을 완주하며 ‘열정과 체력’을 어필했지만, 여전히 그를 뽑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고도 없는 수원에 자리 잡고 국선변호를 시작했다.

    “그때 노숙소녀 사건을 만났어요. 변호사로서 살아남는 데만 정신이 팔려 정의에 대한 생각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린 시절 저 같은 아이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새로운 눈을 뜨게 됐죠.”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긴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법률가로서 자신감도 갖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학벌에도, 스펙에도 더는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여전히 영어를 잘 못하고 미적분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았고,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졌어요.”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학벌과 스펙보다 진짜 사랑하는 일 열정 쏟아”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열한 살 때 외할머니가 병아리 열 마리를 선물로 주셨어요. 잘 키워서 한 마리에 250원씩 총 2500원 받고 팔았죠. 그 돈으로 7원짜리 병아리를 100마리 샀는데, 그러고도 1800원이 남더군요.”

    김홍국(57) 하림그룹 회장 얘기다. 닭은 계속 잘 자랐고, 돈도 쑥쑥 불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돼지 18마리를 살 정도가 됐다. 일손이 달려 사람까지 썼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이제는 연매출 4조5000억 원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제조업 분야에서 선대 도움 없이 이 정도 회사를 일군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이라며 “어릴 때부터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일에만 집중한 결과”라고 했다.

    돌아보면 처음엔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축 키우는 재미에 빠지면서 공부는 점점 뒷전으로 밀렸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닭과 돼지에게 아침밥을 챙겨주고 학교에 갔고, 돌아와서도 밤늦도록 동물을 돌봤다. 중학생 무렵부터 ‘양계와 양돈을 내 길로 삼자’고 진지하게 마음먹었다. 똑똑한 아들을 교육자나 공무원으로 키우려 했던 부모가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가출까지 감행한 끝에 이리농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우리 형제가 육남매인데, 오죽하면 어머니가 나머지 다섯 키우는 것보다 너 하나 키우는 게 더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다행히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고3 때는 아예 사업자등록을 냈다. 군 전체에 서너 대 남짓 있던 250cc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다녔고, 쉬는 시간이면 40~50대 아저씨들이 결재를 받으려고 교실 문 앞까지 찾아오곤 했다. 이후 몇 차례 위기도 겪었지만, 현장에서 익힌 축산 기술과 사업 수완은 매번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사회적으로 명예도 얻었다. 1993년 신한국인, 99년 신지식인에 선정됐고 2006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대통령인사자문 위원,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민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사업이 성공한 뒤에도 어머니는 아들이 고졸인 걸 못내 아쉬워하셨어요. 한을 풀어드리려고 뒤늦게 야간대를 졸업하긴 했지만, 굳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서울대를 비롯해 우리나라 유수 명문대와 각종 정부기관에서 제게 강연 요청을 해옵니다. 이명박 정부 출범 당시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제의를 받기도 했고요. 이제는 어머니도 저를 많이 자랑스러워하시죠. 성공의 열쇠는 학벌이나 스펙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일을 발견하는 열정, 그리고 최선을 다해 그 일에 몰두하는 삶의 자세에 있는 거예요.”

    최학수 미국 하버드대 의대 부교수

    “젊은 날의 오랜 방황 목표 정립 트레이닝 과정”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2011년 우리나라 여러 언론에 한 지방대생의 ‘성공 신화’가 보도됐다. 전북대 공대를 졸업한 최학수(39) 씨가 미국 명문 하버드대 의대 조교수가 됐다는 소식이었다. ‘네이처’ 등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학술지에 수차례 논문을 게재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최 교수는 그사이 부교수로 승진했다. 하버드대 의대 연구실에서 암 치료 물질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최 교수는 “몇 년 전 한국에서 나에 대한 보도가 나갈 당시 한창 개발 중인 약품의 FDA(미국 식품의약국) 승인을 앞두고 있었다. 기자들에게 그에 대해 설명하고, 과학자로서의 목표와 앞으로 하고 싶은 연구 등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나중에 기사를 보니 그 내용은 다 빠졌더라”며 “‘하버드대 임용’만 부각된 걸 보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간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싶어 씁쓸했다”고 털어놓았다.

    학부 시절에도 ‘간판’ 때문에 씁쓸했던 때가 있었다. 고교 시절 한 번의 선택으로 영영 미래가 결정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다. 최 교수는 “한동안 인생의 목표를 찾지 못해 방황했고 삶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적도 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게 학교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내가 진짜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삶에 변화가 시작된 건 대학 4학년 때, 당시 시간강사였던 강길선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부터다. 강 교수가 소개한 ‘생체 재료(Bio Material)’라는 학문 분야가 호기심을 자극했고,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군복무를 마친 그는 그사이 전북대 교수로 임용된 강 교수 연구실에 대학원생으로 합류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에 ‘2막’이 열렸다.

    “그 무렵 한국화학연구원에 계신 이해방 교수님도 알게 됐어요. 30년 넘게 오직 연구에만 매진한, 정말 참 과학자시죠. 그분을 보면서 삶의 방향을 좀 더 분명히 정하게 됐어요.”

    하지만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남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실험하고 연구했을 뿐이다. 최 교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아니까 잠시도 쉴 수 없었다”고 했다. 석사과정을 마칠 무렵 비로소 ‘공부를 계속해도 되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JAIST(일본과학기술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시절, 더욱 공부에 몰두하게 하는 일이 생겼다. 할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최 교수는 “친가와 외가 할머니, 할아버지 네 분이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다. 꼭 암 치료제를 개발해 더는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고 했다. 이후 하버드대 의대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을 때도, 그리고 교수가 된 지금도 그는 이 목표를 잊은 적이 없다. 그래서 늘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다”고 한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방황한 시기가 있어 지금 더 열심히 달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비록 시작이 늦더라도, 언제든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사람에겐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마련된 사회에서는 오랜 방황도 더 좋은 목표를 찾기 위한 트레이닝 과정이 될 수 있겠죠.”

    그가 바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머지않아 이런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직 답답한 현실 때문에 젊은 날의 자신처럼 방황하는 사람이 있다면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더 충분히 꿈을 찾아보라 말하고 싶다고 했다. “젊은 시절의 과감한 투자와 용기 있는 선택,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한 노력만이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최 교수의 조언이다.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

    “야간대…대만 유학…공부 즐거움이 나를 키웠다”


    ‘열정’으로 두드리니 희망의 길 열리더라
    전광진(59) 성균관대 문과대 학장(중문과 교수)은 ‘LBH(Learning By Hint)’라는 학습법을 창안하고 이를 바탕으로 초등학생용 한자사전을 개발, 편찬한 인물로 유명하다. 한자 각각의 뜻을 풀이해 단어를 쉽게 이해하게 해주는 LBH 원리의 힘은 그가 펴낸 ‘초중교과 속뜻학습 국어사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반 국어사전에 ‘늘고 주는 탄력이 있는 나선형으로 된 쇠줄’ 정도로 풀이된 ‘용수철(龍鬚鐵)’을 이 사전에서는 ‘용(龍)의 수염(鬚)처럼 생긴 쇠(鐵)줄’이라고 풀이해놓았다. 부담(負擔)은 ‘등에 짊어지고(負) 어깨에 멤(擔), 어떠한 의무나 책임을 짐’으로, 갈등(葛藤)은 ‘칡(葛)덩굴과 등나무(藤)덩굴처럼 서로 뒤얽힘. 견해, 주장, 이해 등이 뒤엉킨 반목, 불화, 대립, 충돌을 비유해 이르는 말’로 설명했다.

    전 교수는 사전 편찬 배경을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단어 뜻을 물어봐서 같이 국어사전을 찾아봤더니 이해하기 어렵게 돼 있더라.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고 연구를 시작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이유(理)를 풀어(解) 알게 해야 진정한 이해(理解)가 가능하거든요. 1995년 구상을 시작해 2007년 첫 사전을 펴낸 거죠.”

    별일 아닌 듯 말하지만, 대학에서 학생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10여 년간 또 다른 프로젝트에 매달려 마침내 결과물을 완성한 뚝심이 예사롭지 않다.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즐거움과 보람이 더 컸다. 공부는 원래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정말 ‘좋아서’ 공부를 한 사람이다. 경북 김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일찌감치 대학 진학 꿈을 접어야 했던 그는 성의상고를 졸업하고, 1974년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할수록 공부에 대한 미련이 커졌다. 그것도 고문을 해석하고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진짜 공부’가 하고 싶었다.

    “우리 집이 몰락한 양반가였거든요. 어린 시절 집 벽지가 전부 고서 책장이었어요. 막연하지만 언젠가는 한자를 익혀 저 내용을 다 읽어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은행 업무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화교학교를 찾아다니며 중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다 1980년 성균관대 야간부에 중어중문과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이듬해 학교 문을 두드렸다. 상고 졸업 후 함께 입사한 동기들이 고시공부를 하거나, 야간대에 진학해도 법학이나 경영학 같은 실용적인 분야를 선택한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빠져 85년 안정적인 은행을 그만두고 대만으로 유학을 떠난 것도 평범한 결정은 아니었다.

    “그때 성균관대에 재학생을 대만으로 유학 보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거든요. 매년 1~2명만 선발해 경쟁률이 20대 1 정도 됐는데, 야간부 학생인 제가 거기에 합격한 거죠. 공부를 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어요. 은행에서 퇴직금 받은 걸로 어떻게든 생계를 꾸릴 수 있겠지 하고 생각했죠.”

    미국 작가 맬컴 글래드웰은 저서 ‘다윗과 골리앗’에서 “다윗은 잃을 게 없었다. 그리고 잃을 게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설정한 규칙을 비웃을 자유가 있었다”고 했다. 전 교수가 그랬다. 야간대 출신이라는 한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뒤늦게 알게 된 공부 즐거움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는 1991년 마침내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 8월 경희대에 조교수로 임용됐다. 그때까지 1000만 원 남짓한 퇴직금과 시간강사 월급으로 네 식구 생계를 꾸렸지만 행복했다고 한다.

    “정말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열리는 것 같아요.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꼭 기회가 옵니다. 지금 인생이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를 보고 이 말을 믿으면 좋겠어요. 꿈을 향해 끝까지 달려갈 의지만 있다면 꿈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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