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24

2014.02.10

순한 음료수? 다섯 가지 술 섞인 28도

영화 ‘사랑보다…’에서 여성 유혹한 ‘잔인한’ 칵테일…보드카·진·럼·테킬라 일정 비율

  • 김원곤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교수 wongon@plaza.snu.ac.kr

    입력2014-02-10 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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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한 음료수? 다섯 가지 술 섞인 28도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포스터.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은 로즈 컴블 감독이 1999년 연출한 작품이다. 원제목은 ‘잔인한 의도(Cruel Intentions)’인데 원제보다 더 그럴듯한 제목이 됐다. 이 영화는 18세기 라클로(Laclos)가 쓴 프랑스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에 기초를 두고 만들었는데, 비교적 충실하게 소설 줄거리를 따랐다. 그러나 무대를 1990년대 말 미국 뉴욕으로 바꾼 것을 포함해 몇몇 장면은 영화적 흥미를 위해 각색했다.

    뉴욕에 사는 부유한 집안 출신 젊은 남녀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질투, 음모와 배신을 다룬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뒀지만 작품성 측면에선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쨌든 흥행 성적에 힘입어 비디오 전용으로 ‘Cruel Intention 2’(2000)와 ‘Cruel Intention 3’(2004)가 출시돼 국내에도 소개됐다.

    영화 속 두 주인공 서배스천과 캐스린은 이복남매 사이로 그야말로 가진 것이라고는 돈밖에 없는 뉴욕 맨해튼 최상류층 자제다. 서배스천은 오로지 ‘여자 사냥’에만 관심 있는 천하 바람둥이고, 캐스린은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완벽한 모범 학생이지만 실제로는 남몰래 마약까지 하는 ‘타락 소녀’다.

    자존심 강한 캐스린은 자기 남자친구가 순진하고 어수룩하기까지 한 세실에게 마음을 빼앗기자 견딜 수 없는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캐스린은 자신의 모범생 이미지를 지키는 한편 자기 소행임을 숨기려고 남자친구에게 직접적으로 보복하는 대신, 서배스천에게 세실을 유혹해달라고 부탁한다. 세실을 타락시킴으로써 그녀를 선택한 남자친구에게 큰 상처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서배스천은 새로 부임하는 교장의 딸 아넷을 유혹할 생각에만 빠졌다. 캐스린은 서배스천이 아넷을 유혹하지 못할 것이라며 내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한편 세실에게 첼로 교습을 해주는 줄리어드 음대 흑인 학생 로널드도 세실에게 매료된다. 세실 역시 로널드를 좋아한다. 과연 이들 청춘 남녀의 얽히고설킨 위험한 관계의 종착역은 어디일까.



    빨대로 맛있게 마시고 취한 세실

    이 영화에서는 칵테일에 대한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서배스천이 세실을 유혹하려고 로널드 핑계를 대며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을 때다. 로널드에게 편지를 쓰려고 서배스천 침대에 엎드려 있던 그녀는 서배스천이 준 아이스티 같은 음료수를 빨대로 맛있게 마신다. 세실은 음료수 맛이 이상하다며 아이스티의 정체에 대해 물어본다. 그러자 서배스천은 “롱아일랜드에서 온 거야(From Long Island)”라고 대답한다. 음료수를 마신 세실은 술에 취한 듯 얼굴 표정이 느슨해져 간다.

    세실을 취하게 만든 이 음료수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답은 서배스천의 말 속에 숨어 있다. 바로 ‘롱아일랜드 아이스티(Long Island Iced Tea)’라는 칵테일이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기본적으로 보드카, 진, 럼(화이트), 테킬라(화이트), 트리플세크 등 5가지 술을 각각 같은 양으로 섞은 뒤 콜라로 채운 칵테일을 가리킨다. 이 칵테일은 5가지 술을 섞어 만든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다른 칵테일과 분명하게 차별된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그 인기만큼이나 레시피에도 변형이 많다. 그러나 어떤 레시피에서든 보드카, 진, 테킬라, 럼 비율은 늘 같다. 단, 오렌지 리큐어인 트리플세크는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른 술들에 비해 적은 양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레시피에 따라 레몬주스나 스위트 앤드 사우어 믹스(sweet and sour mix)를 넣기도 한다.

    이 칵테일을 만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5가지 술을 얼음과 함께 셰이커에 넣고 흔들기도 하지만, 보통은 얼음이 든 하이볼 잔에 술들을 부은 다음 콜라로 채우고 저어주기만 하면 끝이다. 장식을 할 경우에는 레몬 조각을 사용한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하이볼 중에서는 알코올 도수가 가장 높아 일반 레시피로 만든 뒤 표준 하이볼 잔에 담으면 28도 전후의 높은 알코올도수가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호사가는 칵테일 이름에서 따 술 양을 좀 더 늘린 ‘엑스트라 롱아일랜드 아이스티(Extra Long Island Iced Tea)’를 주문하기도 한다.

    순한 음료수? 다섯 가지 술 섞인 28도

    보드카, 진, 테킬라, 럼과 오렌지 리큐어인 트리플세크가 일정 비율로 조합된 칵테일 롱아일랜드 아이스티.

    아이스티와 비슷한 맛

    이 칵테일은 1972년 뉴욕 동남부 지역에서 가장 큰 섬인 롱아일랜드의 ‘오크 비치 인(Oak Beach Inn)’ 바에서 탄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곳에서 바텐더로 일하던 로버트 버트(Robert Butt)는 당시 오크 비치 인에서 열린 칵테일 경연대회에서 처음 이 칵테일을 선보였다. 당시 경연대회의 조건 가운데 하나는 트리플세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 이 독특한 칵테일은 소개되자마자 삽시간에 인기를 끌어 70년대 중반쯤에는 이 칵테일을 팔지 않는 롱아일랜드 바가 없었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에 알려졌다.

    이 칵테일에 아이스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색깔이 알코올이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일반 아이스티와 흡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롱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진 아이스티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탄생했다. 실제 맛도 아이스티와 비슷하다.

    한 칵테일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 진, 럼, 테킬라, 보드카의 절묘한 조화로 만든 이 화학적 화합물이 스리랑카 찻잎의 분자 구조와 비슷한 데가 많다고 한다. 이 주장의 진위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이 칵테일이 아이스티와 맛, 색이 비슷하고, 그 때문에 아이스티와 관련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만들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에서 세실과 서배스천의 대화도 결국 이런 에피소드 하나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사랑받는 칵테일로, 한국음료문화연구회가 인터넷 네이버 카페 ‘칵테일과꿈’과 공동으로 실시한 ‘2013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칵테일 베스트 10’에서 5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참고로 1위는 진토닉, 2위는 모히토, 3위는 마티니였다.

    뭔가 외롭고 힘든 일이 있다면 오늘 밤 작정하고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를 한번 마셔보자. 누가 또 아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 과연 무엇인지 어느 순간 깨닫게 될지. 비록 그 ‘의도가 잔인할지언정(cruel intentions)’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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