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95

2013.07.08

가난과 질병 고통받는 이에 ‘생명의 약’ 건네주다

제약 연구원 빅토리아 헤일

  • 고영 소셜컨설팅그룹 대표 purist0@empas.com

    입력2013-07-08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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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과 질병 고통받는 이에 ‘생명의 약’ 건네주다
    날이 더워지면서 어린아이들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손, 발, 입에서 돌기가 나는 수족구병이 그것이다. 다행히 이 병을 유발하는 바이러스는 몸을 차갑게 하면 일주일 이내에 사라진다. 하지만 내장리슈만편모충증, 주혈흡충증, 사상충증, 아프리카 수면병, 림프사상충증, 샤가스병 같은 악성질병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곤 한다. 사람은 이런 질병에 어떻게 노출되는 걸까. 이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안타깝게도 대기업은 이들을 구할 의지가 없는 듯하다. 채산성이 맞지 않아 악성질병들을 치료할 약품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한 여성 연구원은 이 문제와 싸우며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빅토리아 헤일. 어느 날 그녀는 제3세계의 의료실태를 조사하면서 “25년 동안 승인된 신약 1500여 개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치료제는 20개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한 예로 설사병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발병하며, 특히 저개발국가의 피해가 심각한 상황. 매년 5세 이하 아이 200만 명이 이 병으로 숨진다. 문제는 제약회사 대부분이 이 질병을 치료할 약의 제조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당 약품을 생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을 생산하지 않는 대기업

    이에 헤일은 ‘제약 본연의 의무’에 대해 성찰한다. “경제성이 없으면 생명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질문은 식사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집 안 청소를 할 때도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당시 헤일이 주목하던 질병은 내장리슈만편모충증. 인도, 네팔, 방글라데시, 브라질 등에서 연간 20만 명이 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1960년대에 이미 이 질병에 효과적인 치료제를 개발했는데도 경제성 때문에 시판하지 않았다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마침내 헤일은 심장병 전문의인 남편과 함께 집 1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약품을 전달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헤일은 먼저 주변의 유능하고 헌신적인 연구원을 모았다. 이들과 함께 좋은 치료제를 개발하면 생산비와 보급 및 판매비를 주변으로부터 후원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는 여기서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 보통 신약을 개발하려면 임상실험 5단계를 거쳐야 한다. 특히 단계가 높아질수록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해야 하는데 이를 진행하려면 1000억 원이 넘는 막대한 연구개발비가 들어간다. 헤일은 이 점을 고려해 저개발국가의 기업, 비영리 병원 및 기관과 협력했다. 임상실험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는 조사 시스템을 확보한 것이다.

    헤일이 처음 집중한 약품은 흑열병 치료제였다. 그는 주변 권유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세운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게이츠 재단)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2000년부터 2년 동안 진행한 흑열병 치료제 개발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게이츠는 설립한 지 2년도 안 된 제약회사의 여성 최고경영자(CEO)를 돕기로 결정한다. 더 나아가 헤일은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도 이끌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역대 최대 규모로 3상(3번째) 임상실험을 시행한 뒤 흑열병 치료제를 개발한다.

    가난과 질병 고통받는 이에 ‘생명의 약’ 건네주다

    원월드헬스 재단을 설립한 제약 연구원 빅토리아 헤일.

    “이 치료제는 기적이다. 21일 동안만 이 치료제를 투약하면 환자의 95%가 완치된다. 기존 약품의 값은 175달러(약 20만 원)가량이지만, 우리 약품은 10달러(약 1만1000원)면 충분하다.”

    인도 정부는 2006년 말 이 약품의 판매권과 개발권을 승인했다. 헤일이 세운 원월드헬스(One World Health)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을 했다. 빠른 생산과 보급을 위해 인도 제약업체에 특허권을 넘긴 것이다. 매년 아이들 200만 명을 살리려고 판매수익을 포기한 셈이다. 그 결과 인도 제약업체는 특허권을 바탕으로 약품을 원가에 공급할 수 있었다.

    “건강한 몸으로 내일을 맞이해야”

    그 이후에도 헤일은 엄청난 열정을 보였다. 2006년 이후 말라리아 연구팀을 꾸렸고, 설사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품도 개발해 인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에 보급했다. 그럼에도 원월드헬스가 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겪는 어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들에게 신약을 올바로 전달하는 일이 어렵다. 동네에서 약품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데다, 약품을 구한다고 해도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아 약품을 오·남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약품이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관리도 중요한데, 쉽지 않다.”

    실제로 외딴곳에 사는 가난한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경미한 병으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다. 이를 해결하려면 약품 유통망부터 새로 구축해야 한다. 헤일은 기존 판매망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약품을 전달하려면 현지 기업가 및 농촌 보건소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야 했다. 그는 직접 발로 뛰었고,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유통망과 현지 개발도상국 내의 취약한 의료시스템을 구축해나갔다. 약품을 보급한 이후에는 사후관리를 위해 세계적인 제약회사에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제안하기도 했다. 원가를 절감하면서 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또한 지역의 대학들과 제휴해 약품이 전달된 뒤 현지 수혜자들의 몸 상태를 대학 의료진들과 의학도들이 확인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헤일은 지금도 밤잠을 설친다. 약에 대한 수요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실험이 많기 때문이다. 비록 설사병 같은 기초적인 질병은 해결되고 있지만 정작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는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는 모든 것이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둔다. 그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세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편하게 살 때 누군가는 그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최소한의 행복도 누리지 못하고 오늘 숨을 거둔다. 그저 그들이 좀 더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내일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

    42세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제약회사를 시작한 제약 연구원. 14년이 지난 지금도 헤일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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