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8

2012.05.21

“세상 향한 희망 목소리 장애를 넘어 미래로 간다”

시각장애인 성우 1호 안제영 군·신진희 양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2-05-21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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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향한 희망 목소리 장애를 넘어 미래로 간다”

    안제영 군(왼쪽)과 신진희 양.

    “태양, 바람, 안개, 추위…. 대자연 앞에 그대는 준비돼 있는가.”

    3월부터 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아웃도어 브랜드 ‘투스카로라’ 광고의 일부분이다. 웅장한 음악에 어울리는 강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울맹학교 2학년 안제영(17) 군이다. 선천적으로 시각장애를 가진 안군은 이번 광고를 통해 ‘국내 시각장애인 성우 1호’가 됐다.

    “처음 광고를 듣고는 ‘이게 내 목소리야?’라며 안 믿겼어요. 녹음할 때보다 방송을 들을 때 더 떨렸다니까요.”

    5월 초 경기 남양주시에서 만난 안군은 참 건강하다는 느낌이 드는 청년이었다. 훌쩍 큰 키, 건강한 체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늘 밝게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이런 걸 물으면 실례가 아닐까’ 싶은 질문에도 유머를 잃지 않고 답했다.

    권희덕 성우가 멘토 구실



    안군에게 성우의 길을 열어준 사람은 베테랑 성우 권희덕(56) 씨다. 그 유명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속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권씨는 2009년부터 ‘장애인 목욕버스’를 운영하고 매년 ‘장애인 후원 디너쇼’를 여는 등 다방면으로 봉사를 해왔다.

    “지난해 5월 우연히 국악방송에서 맹아들과 함께 라디오 낭독극을 하게 됐어요. 심청이 헬렌 켈러를 만나 장애와 편견을 극복하는 내용이었죠. 처음에는 ‘어떻게 맹아들이 성우를 하겠어’ 했는데 실제 해보니까 생각보다 정말 잘하는 거예요. 제가 한 번 읽어주면 그걸 녹음해 밤새 연습하고 다음 날 딱 숙지해오더라고요. 그때 ‘아, 이 아이들을 성우로 키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서울맹학교 교장이 “이 아이들은 학교를 나가면 안마사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아이들이 방송에 입문한다면 이 사회에 큰 획을 긋는 것”이라며 권씨의 성우교육을 적극 권했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 정기 강습과 수시 개인교습을 시작했다.

    여기서 질문. 시각장애인은 대본이나 화면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목소리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컴퓨터 파일을 점자로 바꿔주는 시각장애인 전용 노트북 ‘한손에’를 이용하면 된다. 화면을 볼 수 없으니 동시녹음이나 더빙은 못 하지만, 목소리를 먼저 녹음하고 그 속도에 화면을 맞추면 된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이들에게 장애는 ‘조금 번거로운 것’ 그 이상이 아니었다.

    아이 10명은 열정적으로 권씨를 따랐다. 처음에는 서툴던 아이도 이내 실력을 발휘했다. 권씨는 “학습 속도가 느리고 순발력이 떨어져도 그만큼 반복하면 된다”며 “10명 중 2~3명은 일반 성우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실력”이라고 말했다.

    여자 중 ‘에이스’로 꼽히는 서울맹학교 1학년 신진희(17) 양도 조만간 만화를 더빙하고 고용노동부 라디오 CM을 녹음할 계획이다. 권씨는 “진희 목소리는 깜찍하고 맑은 게 장점”이라면서 “진희가 녹음한 파일을 동료 성우들에게 들려줬더니 ‘꼭 권희덕 씨 젊었을 때 목소리 같다’고 했다”며 웃었다.

    권씨는 아이들에게 성우교육을 하면서도 내심 ‘이 아이들이 실제로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혹여 시각장애인이라는 편견 탓에 일을 주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했던 것. 그때 손을 내민 사람이 안태국(47) 투스카로라 대표다. 지난해 9월 권씨의 고민을 듣던 안 대표는 “권씨가 매년 연말 개최하는 디너쇼에서 아이들이 광고 시연을 하고, 실력이 출중하다면 우리 브랜드 전속 성우로 쓰겠다”고 제안했다. 안 대표는 “평소 지역사회에서 봉사나 물품 기부 활동을 하지만 이 아이들에게 새로운 직업의 기회를 열어주고 지속적으로 돕는 것이 훨씬 값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목표가 생긴 아이들은 더 열심히 연습했다. 그리고 안군은 지난해 12월 23일 열린 디너쇼에서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뽐냈다. 안군의 무대를 본 안 대표는 활짝 웃으며 “충분히 만족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세 달 후 첫 번째 광고를 녹음했다. 안군은 “녹음실에서 한 문장 녹음하는 데 서른 번도 넘게 반복했다”며 웃었다. 안 대표는 “시각장애인 1호 성우가 출연한 광고가 우리 브랜드라는 것이 영광”이라고 말했다.

    “저는 20년간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산 아웃도어 시장에 맨몸으로 투신하면서 늘 ‘장인정신을 갖춘 브랜드를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 희덕이 누님도 장인정신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불모지인 시각장애인 성우 시장을 개척했잖아요. 도전하고 개척하는 사람들이니 서로 도와야죠.”

    안마사 말고 다른 직업 가능

    “세상 향한 희망 목소리 장애를 넘어 미래로 간다”

    안태국 투스카로라 대표(가운데)는 “시각장애인 성우와 일할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1호 판사 최영 씨를 비롯해 사회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장애인이 늘고 있다지만, 사회 문턱은 여전히 높다. 안군은 국어 교사, 신양은 심리상담가를 꿈꾸지만 여전히 상당수 시각장애인이 맹학교 졸업 후 안마사가 된다. 안군은 “정규수업에서 안마를 배우고 맹학교를 졸업만 하면 자격증이 나오기 때문에 나 역시 안마사를 할 생각도 있다”면서도 “그 일을 평생 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한의사들과 갈등이 많고 이 직업을 언제까지 맹인이 독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우교육을 받으며 더 큰 미래를 봤다. ‘미래의 직업’에 ‘성우’라는 선택지 하나가 늘었을 뿐 아니라 ‘뭐든 꾸준히 노력하면 못 할 게 없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권씨가 장애인방송문화센터를 만들어 장애인 성우를 체계적으로 교육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정부 공익광고나 정부 소유 방송사, 장애인 전용 채널인 KBS 제3라디오 등에서 장애인 성우를 적극 수용한다면 충분히 ‘윈윈’할 수 있다. 또 교육받은 장애인이 전문 성우가 되지 않더라도 남들 앞에 당당히 서는 것만 배워도 그들 인생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권씨는 장애인방송문화센터 설립 기금을 마련하려고 연말마다 디너쇼를 연다. 그는 “시각장애인 전용 노트북 ‘한손에’가 한 대에 600만 원이니 100대만 사도 6억 원”이라면서 “사회 각층의 후원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장애인방송문화센터 건립에 별도로 1000만 원을 기부하고 지속적인 후원을 약속한 안 대표는 “장애인의 미래를 돕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큰 기회가 된다”고 덧붙였다.

    “저도 원래는 관심 없었는데, 안군 등 여러 시각장애인의 사연을 알게 되니 사회를 보는 시각이 달라지더군요. 그들도 꿈을 갖고 있고 사회에서 제 몫을 하고 싶어 합니다. 요즘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등산용 스틱을 장애인용으로 개발해 지원하는 방안을 고민 중인데, 이 역시 안군을 만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먼 길을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가는 것’이라는 말처럼, 장애를 가졌지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에게 더 넓은 길을 열어주는 게 우리 사회의 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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