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3

2012.02.06

비열하게 떵떵거리며 살았던 아버지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 이화정 씨네21 기자

    입력2012-02-06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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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열하게 떵떵거리며 살았던 아버지
    한국 영화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직업군을 꼽으라면? 2001년 ‘친구’ 개봉 이후 ‘조폭’을 빼고 한국 영화를 얘기하기 어렵다. 부산 지역 유명 조직폭력단체 ‘칠성파’를 다룬 영화 ‘친구’의 흥행은 대한민국 조폭영화의 신호탄이었다. 한번 관객의 호응을 얻은 조폭영화는 액션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다채로운 장르로 퍼져 나갔다. 조폭이 학교에 간 ‘두사부일체’, 조폭이 스님과 맞짱을 뜨는 ‘달마야 놀자’같은 코믹영화로까지 변주됐다. 할리우드에 갱스터물이, 홍콩 영화에 누아르물이 존재한다면 한국 영화에는 조폭영화가 있었다. 조폭은 한국 영화에서 남성의 판타지를 담당할 최적의 직업군이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도 조폭을 다룬 영화다. 영화는 조폭이 등장하면 빠지지 않는 비리 공무원 얘기에서 시작한다. 동료와 함께 비리를 저질렀지만 상대적으로 딸린 식구가 적어 모든 걸 떠안고 잘릴 위기에 처한 세관 공무원 최익현(최민식 분). 마침 대량의 필로폰을 적발한 그는 꾀를 내어 조폭 최형배(하정우 분)를 만나고, 적당한 가격에 물건을 거래하는 데 성공한다. 우습게도 협상 과정에서 형배가 자신의 먼 친척임을 안 익현은 그에게 동업을 제안한다. 대한민국을 촘촘하게 엮고 있는 인맥, 혈연은 범죄와 폭력의 세계라고 다르지 않다. 익현은 마당발 인맥을 발판으로 형배의 사업 확장을 돕고, 형배는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익현의 방패막이 돼주는 이른바 ‘윈윈 전략’이 시작된다. 그러나 조폭이 아닌 익현이 조폭인 형배의 권력을 넘보면서 종친으로 연결된 둘의 관계가 위태로워진다. 때마침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익현과 형배가 숨겨온 감정의 골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만다.

    조폭도 아니고 건달도 아닌 ‘반달’

    어느 모로 보나 틀림없는 조폭영화임에도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사뭇 다르다. 어디에서 오는 차이일까. 조폭 세계에 뛰어든 세관 공무원 익현의 존재 때문이다. 그는 일반인도 아니고, 조폭도 아니다. 일반인도, 건달도 아닌 그를 영화에서는 ‘반달’이라고 표현한다. 범죄 혐의를 추궁당할 때마다 “저 깡패 아입니다. 저도 공무원 출신입니다. 공무원”이라며 특유의 넉살로 위기를 모면하는 기회주의자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는 방식 또한 기발하기 그지없다. 검사나 경찰을 돈으로 매수하는 건 초보자나 하는 짓이고, 익현은 아예 그들을 뒤에서 움직일 수 있는 실세인 종친회를 장악해버린다.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아닌 부장판사의 아버지를 매수하는 식이다. 이게 부산 지역 검은 조직을 좌지우지하는 힘이라니 실소가 나올 만도 하다.

    다소 희화화한 인맥 및 혈연 고리는 영화 ‘대부’와 일정 부분 닮았다. 특히 익현의 범죄가 오로지 가족을 위해 돈을 마련하고 성공하기 위함이라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익현은 세관공무원 시절 뒤로 챙긴 물건을 여동생에게 떼어주는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다. 자기 일을 도와줄 사람으로 여동생의 남편을 기용하기까지 한다. 익현이 부를 축적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다름 아닌 트럭에 짐을 바리바리 실은 가족이 좀 더 나은 집으로 이사 가는 모습이다. 자신은 비록 범죄자지만, 대를 이을 아들에게만은 밥상머리에서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1980년대 독재정권 아래서 번듯하게 집안을 꾸리고 떵떵거리며 살 정도의 부를 축적한 익현과 그 가족의 삶은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치부다.



    앞서 말한 ‘대부’를 비롯해 이 영화가 연상시키는 할리우드 고전 영화가 여러 편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워드 호크스의 ‘스카 페이스’와 마틴 스코세이지의 ‘좋은 친구들’이 떠오른다. 영화는 가부장 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적 갱스터를 만들고자 했던 감독의 욕심을 감추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건 역시 2시간 13분의 러닝타임을 쥐락펴락하는 배우들의 연기다. 특히 협잡과 배신으로 점철된 익현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소화해낸 최민식의 연기가 압권이다. 영화에서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대사 “살아 있네!”는 한동안 스크린에서 모습을 볼 수 없던 자신을 두고 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1980년 한국 그 씁쓸한 전경

    최민식의 독주에 이따금 제동을 거는 건 상대역 하정우다. 하정우가 연기한 속을 알 수 없는 형배의 태도는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조연들의 캐릭터도 각양각색이다. 조폭 두목 조진웅, 검사 곽도원, 나이트 여사장 김혜은은 영화가 끝나면 머릿속에 남을 이름이다. 이 밖에도 충무로에서 사투리 연기 좀 되고, 외모가 1980년대 스타일인 사람은 모두 참여했다고 할 만큼 단역 한 사람 한 사람까지도 시선을 잡아 끈다.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는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에서 각각 군대 문화와 호스트의 비애 등 남성 세계를 탐구해온 윤종빈 감독의 작품이다. 마치 그 세계를 경험한 듯한 생생한 묘사는, 잘 알려진 대로 감독의 철저한 취재가 바탕을 이룬 시나리오 덕분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실화가 아님’을 밝혀두고 시작한다. 영화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씁쓸한 전경을 사실적으로 담고 있으며, 익현의 삶은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비열하게 떵떵거리며 살았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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