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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할아버지 의사? 내 인생도 소설 몇 권은 넘어”

의사면허 444번 경기의원 황훈 원장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평범한 할아버지 의사? 내 인생도 소설 몇 권은 넘어”

“평범한 할아버지 의사? 내 인생도 소설 몇 권은 넘어”
“아니 이게 몇 번인가요? 444번? 이 의사분이 아직도 현역인가요?”

처방전을 받아 든 약사가 깜짝 놀란 이유는 의사면허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444번째로 발급된 것이기 때문이었다(현재 대한민국 의사번호는 10만 번을 돌파했다). 그제야 기자는 9년 이상 다닌 병원이 범상치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950년 5월 경북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의사가 됐어요. 그러고 보니 60년이 넘었네요.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역 의사일 수도 있겠군요.”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1-7에는 황훈(87) 원장과 부인 황종옥(83) 씨가 57년째 운영하는 ‘경기의원’이 있다. 6·25전쟁 직후인 1954년 바로 그 뒷건물에서 개업해 오늘에 이르렀다. 인근에 위치한 ‘경기대학’과 ‘경기초등학교’는 따지고 보면 ‘경기의원’에서 영감을 얻은 셈이다. 현재의 빌딩은 1967년 적산가옥을 매입해 직접 건축한 것이다. 올해 초 뉴타운 계획을 확정하면 이 빌딩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황 원장도 곧 의사 가운을 벗을 계획이란다.

올해 87세 한국 근현대사 온몸으로 체험



“당시 이 빌딩을 건축했을 때 반응이 대단했어요. 서울시내가 다 내려다보였거든. 영화감독들이 촬영무대로 삼자고 몰려왔어요. 실제로 옛날 영화에 자주 등장했어요. 여배우 윤정희와 문희도 시집가기 전에 자주 와 진찰을 받았죠.”

그가 슬쩍 들려준 옛날얘기가 매우 흥미로워 사흘간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을 붙들고 그의 스토리를 들었다. 언뜻 평범할 것 같았던 그의 인생은 놀랍게도 한국 현대사 전체를 관통했다.

“내가 1926년생, 마산중학교 5회예요. 내선일체(內鮮一體) 1세대죠. 국민학교 2학년 때 한글 배운 게 마지막이에요. 일제가 처음으로 일한공동학교로 만든 게 이 학교였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교장 선생을 선발해 보냈어요. 그렇게 중고등학교 5년을 일본 친구들과 뒤엉켜 공부했어요. 수학여행은 후쿠오카로 갔을 정도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지적 호기심을 충족했죠. 몇 년 전까지 일본 교토에서 한일 공동 동창회를 하기도 했어요.

근데 내가 왜 의사가 되려 했을까. 글쎄. 아마도 그때는 전시였으니까. 당시 만주인과 한국인은 경성에 집결해 일본대학입학시험을 봤어요. 1944년 말 도쿄에 있는 지케이카이(慈惠會) 의과대에 합격했죠. 그런데 워낙 폭격이 심하다 보니 마산의 군수공장에 가 있으라고 하더군요. 내가 학병 3기니 전쟁이 1년만 더 계속됐어도 끌려가 죽었을 거예요. 그렇게 해방을 맞이했죠. 서울에서 다시 시험을 쳐서 법학전문학원(서울법대 전신)과 해양대에 합격했어요. 국어를 잘 모를 때였는데도 용케 합격했죠. 새 시대의 기운에 이끌려 해양대를 택했어요(웃음).

김구 선생 앞에서 학생 대표로 입학선서를 했죠. 얼마 뒤 경북의과대학으로 옮겼어요. 솔직히 말하면 소설가가 되고 싶었어요. 작품도 몇 개 썼고. 그런데 언어가 바뀌니까 어휘가 생각이 안 나서 꿈을 접었죠. 난 지금도 일본에 가서 말하면 사람들이 일본사람인 줄 알아요.

우리 인생은 소설책 몇 권으로도 정리가 힘들어요. 의대에 가자마자 대구 10·1 폭동이 있었어요. 그렇게 힘겹게 졸업하고 혜화동에 있던 서울여자의과대에 취업했어요. 하지만 한 달 만에 전쟁이 터지더군요. 북한군에 이끌려 10월 20일 평양에 도착했죠. 쫓기듯 평양을 벗어나는 찰나 미군 폭격이 시작돼 천우신조로 간신히 탈출했어요. 어휴, 남하 과정은 말도 못해요. 사방이 적이라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냥 죽었거든요. 그게 바로 진짜 전쟁이더군요. 겨우 스물네 살 때 얘기예요. 극적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정식으로 의사면허 받고 미군이 운영하던 서울대병원에 취직했죠.”

그의 인생 전반기는 거대한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생존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아니, 오히려 일본이 실시한 근대교육을 비교적 충실히 소화했던 당시 엘리트가 겪어야 하는 필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의 인생 후반전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부산으로 이주한 다음 서울대에서 석사를, 다시 환도해 박사를 땄어요. 충정로에서 개업도 성공적으로 했고. 1960년 혁명이 나서 경북 시골로 2년간 강제로 내려가 있었던 적을 빼곤 줄곧 이곳에 있었어요. 당시 지방도시로 내려간 동료의사들은 지방공립병원에서 계속 근무하고 은퇴했어요. 나는 이 병원을 오래할 운명이었나 봐요. 그렇게 나는 일반외과의로, 아내는 산부인과의로 일했어요. 이 빌딩 2층은 임산부 차지였죠. 엄청나게 바빴어요. 당시 이 동네는 북아현동 고급주택가와 피난민 주거지로 양분됐는데, 왕진도 잦아 돈을 많이 벌었죠. 일찍 빌딩을 지었을 정도로.

“평범한 할아버지 의사? 내 인생도 소설 몇 권은 넘어”

황훈 원장 부부가 57년을 지켜온 경기 가정의학과 의원.

에피소드라, 일찍 개업해 재벌이나 고관대작 집에 왕진을 많이 다녔어요. 대표적으로 말하면 백상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 집이죠. 바로 이웃이라 집안 전체가 가깝게 지냈어요. 그분은 1964년부터 경제부총리를 지내 위세가 대단했어요. 나에게까지 인사 청탁이 들어왔을 정도니까. 강영훈 전 총리가 6군단장이던 시절 포천까지 왕진을 가서 봐주었죠. 가야금 명인 황병기 교수 내외는 지금도 자주 찾아요. 강남으로 이사 간 분 중에는 마음이 편하다며 일부러 찾는 분도 있어요.

1970년대 후반이 되니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느끼겠더군요. 저는 그때 의학협회 이사를 하면서 ‘가정의 제도’를 준비해 1981년 통과시켰죠. 그렇게 가정의 전문의가 됐고 학회 회장도 지내고 그랬어요. 이후로는 평범해요. 아이들을 모두 충정로에서 교육시켰고, 1990년대에는 고대와 연대에서 외래교수로 5~6년 근무했고, 2000년대 이후에는 조용히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어요.”

“한곳서 57년 이 병원이 내 운명”

그는 옆에 있는 의약품이 담긴 철제 대를 가리키며 “이게 역사가 얼마나 됐을 것 같은가?”라고 물었다. 경성의대 시절 줄곧 사용했던 물건인데, 미군 지원으로 물품이 풍족해진 서울대가 버린 것을 당시 개업을 준비하던 그가 거둬온 것이라 했다. 이곳 충정로에서만 57년 이상 끈질기게 활용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물건과 그의 인생은 유사점이 있었다.

“평범한 할아버지 의사? 내 인생도 소설 몇 권은 넘어”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에요. 그냥 주어진 소임에 충실했어요. 내 막냇동생도 의사(황승용 서울대 교수)고 딸 둘과 사위 모두 의대교수인데 이 병원을 이어갈 후계자를 못 찾은 것이 아쉬워요.”

철제 대는 곧 주인을 잃고 사라질 것이다. 그의 병실 앞에는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고 민족일보 사건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당대 언론인 송지영(1989년 작고) 씨가 개원을 축하하는 의미로 건넨 서예작품이 걸려 있다. ‘묘수회춘(妙手回春·신묘한 손으로 병을 고친다).’ 그는 전문인의 손으로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를 묵묵히 통과한 것이다.



주간동아 818호 (p50~51)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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