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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 강원의 숲을 걷다②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우리는 왜 숲길을 걷는가?…마음의 주름 펴는 걷기 예찬

  • 김화성 동아일보 편집국 전문기자 mars@donga.com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나 서른다섯 될 때까지

애기똥풀 모르고 살았지요

해마다 어김없이 봄날 돌아올 때마다

그들은 내 얼굴 쳐다보았을 텐데요

코딱지 같은 어여쁜 꽃



다닥다닥 달고 있는 애기똥풀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저기 걸어간다고

저런 것들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

-안도현의 ‘애기똥풀’ 전문

애기똥풀을 아는가? 요즘 산과 들에 지천으로 핀 게 노란 애기똥풀이다. 서울 청계천 시냇가에도 무수히 피어 있다. 봄엔 개나리, 진달래처럼 노랑, 빨강꽃이 많다. 알싸한 꽃샘추위의 봄날에 벌, 나비를 유혹하려면 그만큼 색깔이 강렬해야 한다. 여름엔 흰 꽃이 많다. 짙푸른 숲 속에서 흰색은 쉽게 눈에 띈다. 애기똥풀은 노랗다. 달맞이꽃도 그렇다. 둘 다 하늘하늘 가녀리다. 그러고도 벌, 나비가 즐겨 찾을까? 자주 찾는다.

애기똥풀은 봄부터 늦여름까지 줄기차게 피고 진다. 주로 숲 가장자리나 강둑 같은 확 터진 곳에서 자란다. 대부분 양지바른 곳이다. 그만큼 벌, 나비들의 눈에 잘 띈다. 왜 이름이 하필 애기똥풀인가? 한번 애기똥풀 줄기를 살짝 꺾어보라. 샛노란 물이 물감 짠 듯 나온다. 꼭 갓난아이의 묽은 똥 같다. 그래서 애기똥풀이다. 그 노란 즙엔 독이 들어 있다. 소는 그걸 본능적으로 안다. 풀을 뜯을 때 애기똥풀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수많은 들꽃이 있다. 바람이 살갗을 어루만진다. 푸른 하늘에선 새물내가 난다. 숲길엔 도토리를 달고 있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가 줄 서 있다. 바닥엔 소나무, 전나무의 바늘잎들이 가지런히 누워 있다.

나 자신이 스스로 열리는 시간

숲은 인간의 본적이다. 숲길도 사람의 본적이다. 산길, 골목길, 논두렁길, 밭길, 고샅길, 마실길도 모든 생명의 본적이다. 비행기 여행은 점에서 점으로의 이동일 뿐이다. 기차나 버스 여행은 선을 따라가는 이동이다. 걷기는 온몸으로 느끼는 전면 여행이다. 입체 여행이다.

나는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면 나 자신이 스르르 열린다. 풀잎 하나, 이슬 한 방울에도 감동한다. 산들바람이 살짝만 살갗에 스쳐도, 못나고 부끄러운 나 자신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 목적지를 갖고 걸으면 틀 속에 갇힌다. 아무런 목적 없이 걸어야 자유롭다.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면의 나’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길은 무한도량이다. 꼭 절집에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동안거니 하안거니 요란 떨 거 하나도 없다. 숲은 늘 열려 있다. 길은 모든 사람에게 자리를 내준다. 부처는 말한다.

“있는 그대로의 이 숲을 보아라. 숨기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숲처럼 열려 있다. 깨달은 자는 주먹을 쥐지 않는다. 깨달은 자는 주먹이 없는 법이다.”

악수를 하면 주먹이 펴진다. 길을 걸으면 마음의 주름살이 곧게 다려진다. 밤에 논두렁길을 걸으면 하늘의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진다. 농사의 ‘농(農)’자가 왜 ‘별(辰)을 노래(曲)’하는 뜻을 담고 있는지 금방 깨닫는다. 길이 사람을 보살로 만든다. 저절로 부처가 되게 한다. 길을 걸으면 사나이가 된다. 바람 맞고 눈비에 젖으며 길을 걸으면 나무가 되고 산이 된다. 바람 불어 쓰러진 산 있는가? 눈비 맞아 썩은 돌 있는가?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회사 인간들 일하다 막히면 걸어라!

머리에 쥐가 날 때면 발을 움직여야 한다. 지끈지끈 머릿속이 쑤시기 시작할 땐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기’가 으뜸이다. 한 번쯤 누렁이 앞세우고 논두렁길을 걸어보라. 해질녘 아이 손잡고 서울 동네 골목길도 어슬렁거려보라. 가슴에 강 같은 평화가 물밀듯이 밀려온다. 골목마다 구수한 된장국에 매콤한 찌개 냄새, 여기저기 개 짖는 소리, 삐~걱 대문 여닫는 소리….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고 그렇다.

아프리카 케냐에 사는 마사이족은 하루 평균 3만 보를 걷는다. 한국인은 잘해야 하루 5000보 안팎을 걷는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는 회사원은 3000~4000보, 주부는 4500보에 그친다. 하루에 1000걸음조차 안 걷는 사람도 있다.

마사이족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맨발로 걷는다. 스님들처럼 걸음걸이가 곧고 우아하다.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 리듬을 타듯 빠르게 걷는다. 무게중심이 뒤꿈치 → 발 바깥쪽 → 새끼발가락 부근 → 엄지발가락 부근 → 엄지발가락 순으로 이동한다. 달걀이 구르듯 자연스럽고 리드미컬하다. 척추와 관절에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마사이족의 척추는 일자형이다. 현대인의 S자로 굽은 것과는 다르다. 많이 걸음으로써 허리 근육이 강철 같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마사이족의 평균수명은 80~90세로 추정된다.

현대 도시인의 걸음은 대부분 발끝과 발뒤꿈치가 거의 동시에 닫는다. 발바닥 전체를 일시에 땅에 내디딘다. 그만큼 빨리 지친다. 사람 몸은 원래 부드럽고 울퉁불퉁한 땅에서 잘 걷게끔 만들어졌다. 평평하고 딱딱한 곳은 안 맞는다. 아스팔트를 걸으면 몸에 충격이 온다. 잔디밭이나 흙길이 안성맞춤이다. 걸으면 상상력의 날개가 펼쳐진다.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른다. 브르타뉴 출신의 작가 피에르 자케 엘리아스는 농부의 걸음걸이에 감탄했다.

“마을에서 농부는 자신의 속도, 즉 일상적인 리듬으로 움직인다. 여기저기가 움푹 팬 길,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진 흙길, 초원 등을 걸을 때 그의 걸음걸이는 도시의 보도를 걷는 사람과 다르다. …도시에서 농부는 방랑자이자 구경꾼이다. 일종의 관광객인 것이다. …그의 느린 움직임, 무겁지도 않고 서두르지도 않아서 경탄을 자아내는 경제적인 움직임은 그가 일을 하면서 익힌 리듬 덕분에 생긴 것이다.”

실내에 앉아서 토론을 하면 논리가 앞서게 마련이다. 조용하고 초록으로 둘러싸인 숲길에서 토론을 하면 논리보다는 인간에 대한 정이 앞선다. 서류더미와 씨름하는 회사 인간들은 일하다가 막히면 잠깐 길거리를 걷는 게 효과적이다. 보통 2시간 일하고 20분 정도 걷는 게 알맞다. 휴식시간에 커피나 음료수를 마시며 수다 떠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낫다.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글 쓰는 사람들도 글이 막히면 메모장과 볼펜을 들고 밖으로 나가 걷는 게 좋다. 다리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뇌가 펄펄 살아난다. 뇌로 가는 에너지 공급이 활발해지고, 뇌 호르몬 분비가 왕성해진다. 스트레스 쌓일 때도 마찬가지다. 약간 먼 거리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부하직원을 꾸짖을 때도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하면 꾸지람을 듣는 사람의 화가 덜 나게 마련이다. 칭찬은 안에서 하고 질책은 밖에서 해야 하는 이유다. 누구를 설득할 때도 걸으면서 하면 잘된다.

걷기는 두 발 중 한 발이 땅에 붙어 있다. 하지만 달리기는 두 발이 모두 허공에 뜨는 순간이 있다. 걷기는 체중의 1.2~1.5배 충격을 주지만, 달리기는 3~5배 충격을 준다. 그만큼 무릎이나 허리에 부담을 준다. 걷기는 시간을 일부러 낼 필요가 없다. 고층 아파트나 회사에 다닐 때 계단으로 오르내리면 된다. 버스나 지하철로 출퇴근하는 경우엔 목적지보다 한두 정거장 먼저 내려 걸으면 그만이다. 물론 걸을 땐 만보계나 심박수 측정기, 물통 같은 것이 있으면 좋다. 요즘엔 속도, 시간, 거리, 칼로리 소비량까지 표시되는 만보계도 나와 있다. 걷기를 마치면 발을 높이 들어 피를 역류해주는 게 좋다. 발바닥을 문질러주거나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주고, 발가락을 하나씩 가볍게 잡아당겨도 피로가 풀린다.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가며 5, 6회 ‘발 목욕’을 해도 효과적이다.

“인간이 직립보행을 시작한 지 600만 년이 됐다. 태초에 발이 있었다(마빈 해리스). 발은 제2의 심장이다. 모든 걸음걸이에는 걷는 사람의 에너지와 감정이 드러난다. 신발의 닳은 모습을 보면 그 주인의 직업을 알아낼 수 있다. ‘록(rock)’음악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짐꾼, 부두 노동자, 인부 등이 짐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몸을 흔들며 비틀거리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 그래서 걷기는 말하기다. 인간은 평생 12만km를 걷는다. 미국 인디언이나 케냐인들은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무려 160km를 달리는 경우도 있었다.”(조지프 A. 야마토의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중에서)

숲길은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걸어야 제맛이다. 어깨의 힘을 빼고 편안한 마음으로 어슬렁거려야 한다. 한 호흡에 한 걸음씩, 슬로모션으로 발을 떼야 한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발을 뒤꿈치부터 천천히 들어 올려 앞쪽으로 옮기고, 숨을 내쉬면서 발을 역시 뒤꿈치부터 땅에 내려놓는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쓸 것 없다. 정 마음에 걸리면 무심하게, 가는 듯 마는 듯 달팽이처럼 걷는다. 눈부신 보름밤, 구름에 달 가듯이 숲길을 왔다갔다 서성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여태 헛살았구나!” 하며 가슴을 친다.

걷기는 한순간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근육을 써서 ‘세상의 파도’와 맞서는 것이다. 도시의 새들은 랩처럼 빠른 리듬의 노래를 부르지만, 시골 새들은 민요나 컨트리 송처럼 느린 노래를 부른다. 걷기도 그렇다. 농부들의 걸음걸이는 서두르지 않는다. 느릿느릿 진양조장단으로 걷는다. 도시인들은 총총 빠르게 걷는다. 어디론가 종종걸음으로 끊임없이 오간다.

걸어서 가면 모든 게 넓고 감각적

‘어슬렁어슬렁’걷다 보니 경이로운 세상이 다가왔다

척추, 관절에 전혀 무리를 주지 않는 마사이족의 걸음.

‘살금살금 걷다’ ‘미끄러지듯 걷다’ ‘성큼성큼 걷다’ ‘발을 질질 끌며 걷다’ ‘터벅터벅 걷다’ ‘무겁게 걷다’ ‘그냥 거닐다’ ‘활보하다’ ‘산책하다’ ‘건들건들 걷다’ ‘어슬렁거리다’ ‘배회하다’ ‘천천히 걷다’ ‘느릿느릿 걷다’ ‘어기적거리며 걷다’ ‘뒤뚱뒤뚱 걷다’….

이 세상엔 사람 수만큼 걷는 방법이 있다. 신발의 어느 쪽이 어떻게 닳았는지를 보면 그 주인의 직업을 알아낼 수 있다. 걷기는 곧 말하기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엔 누구도 걷지 않으려 한다. 탈것을 좋아한다. 말, 마차, 기차,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트럭, 버스, 비행기…. 지난 200여 년 동안 앉아 있는 시간, 차를 타는 시간, 차를 운전하는 시간이 계속 늘고 있다.

주택도 이젠 동선이 짧을수록 좋은 집이다. 설계할 때부터 복도, 계단, 방 등을 하나로 통합해 계단을 없애버린다. 의자, 소파, 매트리스, 침대 등의 품질은 날로 좋아진다. 사람들은 그곳에 파묻혀 꼼짝도 하려 하지 않는다. 하기야 굳이 움직일 필요가 없기도 하다. 휴대전화, 팩스, 복사기, 전자우편 등이 가만히 앉아서도 온 세상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결국 지구는 이제 구두닦이, 급사, 짐꾼, 인부, 도어맨, 심부름꾼, 웨이터, 거리 청소원, 노숙자, 거지 등 하류층만 걷게 됐다.

사막을 건너는 대상도 사라졌다. ‘사막을 건너는 배’ 낙타도 동물원에서나 겨우 볼 수 있다. 이젠 탐험가들이나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넌다. 사막을 걷는다는 것은 단조롭다. 삶도 단조롭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막을 걷는다. 사막을 걷다 보면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금세 깨닫는다.

“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면 땅은 밖에 있거나 우리 아래에 있게 된다. 우편엽서에서처럼 땅은 작고 말이 없다.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다. 그저 그림일 뿐이다. 걸어서 가면 모든 게 넓다. 땅은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냄새를 맡게 하며,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늘 숨기고 있다.”(라인홀트 메스너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 중에서)

사람은 걷다 보면 곰삭는다. 시래기처럼 풀이 죽는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 거듭난다. 넉장거리로 땅바닥에 나동그라져보면 비로소 하늘의 별이 보인다. 걷기엔 시간이 없다. 아무도 시간을 재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그 자리에서 잠을 잔다. 이슬과 바람 맞으며 시래기가 된다. 들꽃과 하나가 된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안도현의 ‘무식한 놈’ 전문



주간동아 2010.07.12 745호 (p24~27)

김화성 동아일보 편집국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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