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83

2017.04.12

연예

‘천의 얼굴’ 천우희 “여배우 캐릭터 한계 벗어나고 싶어요”

영화 ‘어느날’ 시각장애인 역으로 또 변신

  • 임수연 아이즈 기자 vagabond@ize.co.kr

    입력2017-04-12 11:2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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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우희의 작품 선택에는 드문 신뢰감이 있다. 작품 완성도에서는 이견이 갈릴지라도 그가 고른 캐릭터만큼은 닮은꼴을 떠올리기 힘든 신선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우희에게는 ‘쉽지 않은 연기에 도전해왔다’는 수식이 붙곤 했다.

    ‘본드 걸’이라는 별칭을 자연스럽게 얻은 영화 ‘써니’, 집단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를 연기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한공주’, 미스터리한 영적 존재를 연기한 ‘곡성’까지 만만찮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왔고, 캐릭터도 겹치지 않는다.



    청순가련 캐릭터 낯설어

    4월 5일 개봉한 영화 ‘어느날’ 역시 봄에 어울리는 멜로영화와 그 여주인공을 연기했을 것이란 추측을 기분 좋게 꺾어버린다. 천우희가 연기한 시각장애인 미소는 비슷한 설정의 다른 영화가 그리는 여성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장애인의 특징을 기술적으로 정확하게 연기하면서도 강수(김남길 분) 눈에만 보이는 영혼으로서의 모습은 밝은 에너지가 넘친다.

    이제 비로소 눈으로 보는 세상을 하나씩 알아가는 설렘 가득한 표정은 우리가 전에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의 캐릭터이자, 또 다른 천우희의 얼굴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청순가련한 캐릭터에 낯간지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마이 엔젤’이라는 제목(영화 ‘어느날’의 처음 제목이 ‘마이 엔젤’이었다)에 ‘아저씨’라는 호칭, 문어체의 대사까지 합쳐지니 이 여자의 캐릭터가 어떤 이미지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더라고요. ‘이런 영화를 2017년 개봉하면 사람들이 흥미로워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죠. 그래서 이번 작품은 원래 제가 가지고 있는 발랄한 모습을 많이 녹여내자고 생각했어요.”

    천우희의 해석은 영리했다. 영화 중반까지 지나치게 무겁지 않으면서 관객의 긴장을 풀어준 데는 미소 캐릭터가 가진 긍정적인 힘이 크다. 디테일하게 지시하기보다 배우 본인의 해석을 열어두는 이윤기 감독의 작업 스타일 역시 배우와 궁합이 잘 맞았다.
     
    하지만 영화 ‘어느날’은 천우희가 가진 역량을 좀 더 감상하고 싶은 순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후반으로 갈수록 치밀하게 묘사되는 강수의 에피소드에 비해 미소는 그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조력자에 머문다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배우로서도 아쉬움이 있다.

    “강수는 감정을 하나하나 쌓아갈 수 있는 시간이 많지만, 미소에게는 할당된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관객 처지에서 상대적으로 가깝게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눈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할 때 오감의 반응을 디테일하게 넣었으면 했는데, 아무리 시나리오를 읽어도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없어 아쉬웠어요. 하지만 배우 개인의 욕심보다 영화 전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나리오상 주어진 한계에도 천우희는 상투적으로 흘러갈 수 있는 캐릭터에 신선함을 부여하고 영화가 나아갈 길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미소가 과거에 겪은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모습, 그리고 극 후반부 강수에게 어떤 부탁을 할 때 천우희가 보여주는 깊은 표정 연기는 ‘어느날’이 던지는 화두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이다.

    이는 원톱 주연을 맡은 ‘한공주’는 물론 ‘곡성’, 멀게는 ‘써니’에서도 천우희가 해냈던 것이다. 비중이 어떠하든, 캐릭터의 한계가 있든 없든 결국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하고 작품의 전체 그림을 완벽하게 받쳐주는 그의 연기론이 궁금하다.

    “혹자는 배우는 좀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해요. 제 연기와 캐릭터만 생각하기보다 작품 전체를 보려고 해요. 영화 ‘카트’ 때도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비치길 바랐어요.”



    퀴어영화도 OK!

    어떤 작품에서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천우희의 저력은 그만의 오랜 고민에서 나온다. 영화계에서 여배우는 남자배우에 비해 선택의 폭이 좁은 것이 현실이다.

    ‘아가씨’ ‘비밀은 없다’ ‘미씽 : 사라진 여자’ 등 지난해 여배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이들 작품 외에는 여배우가 중심인 시나리오를 찾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2014년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천우희 역시 이 부분에서 고민이 많다.

    “예전에는 일을 많이 할수록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오고, 결국 배우로서 선택 폭이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더라고요. ‘여배우에게 원하는 모습이 과연 이런 것들뿐일까’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많았어요.”

    한편 이 같은 고민은 작품을 선택할 때 좀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천우희는 “연기활동을 할수록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저런 작품을 왜 선택했을까’ 의아하게 보이는 인물도 배우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한창 열심히 뛰어야 하는 어린 여배우로서 가능한 한 많은 걸 보여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반짝이는 눈빛만큼 생각도 야무진 천우희는 시나리오를 대부분 직접 선택한다. 타협할 수 없는 지점도 명확하다. 그는 “이 영화가 왜 지금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미든, 감동이든 명확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한국 영화니까, 여배우가 주인공인 영화니까 봐줘야 한다는 식은 변명처럼 느껴져 내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팬들이 자주 요청하는 퀴어영화(성적소수자 관련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소재에 대한 거리낌은 없어요. 성별의 차이일 뿐 사랑은 모두 같다고 생각해요. 만약 ‘캐롤’처럼 섬세한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면 아이고, ‘땡큐’죠(웃음).”

    2017년이 여배우에게, 그리고 천우희에게 어떤 한 해가 될지 아직 알 수 없다. ‘캐롤’처럼 여배우의 연기 역량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천우희는 2009년 봉준호 감독의 ‘마더’로 신고식을 치른 이래 언제나 자신의 존재감을 관객에게 각인해왔다. 그러니 이것만은 확신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그랬듯, 그가 선택한 작품은 천우희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남길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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