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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 선 ‘특허괴물’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ETRI 특허 소송으로 본 특허강국 한국은 ‘속 빈 강정’

발톱 선 ‘특허괴물’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발톱 선 ‘특허괴물’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산업화 시대에 토지·자본·자원이 주요 생산요소였다면, 지식경제 시대에는 지식·정보·기술이 주요 생산요소가 됐다. 사람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기술력과 브랜드, 디자인 같은 무형자산이 경쟁력의 핵심요소가 된 것이다.

“언론보도 후 로열티 협상은 교착상태다. 잠잠해질 때까지 (상대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몇 달 기다려달라. 할 말이 없다.”

정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 말이 많아도 지금은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최근 ‘1조원대 특허 소송’으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관계자의 말이다.

ETRI는 1월 중순 노키아와 모토로라를 비롯한 세계 22개 휴대전화 업체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한 사실이 알려지자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ETRI는 지난해 8월 소송대리인인 SPH아메리카를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법원에 19개 휴대전화 업체를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냈다. 2008년에는 소니에릭슨, 대만 HTC 등 3개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내 현재 진행 중이다. 일부 업체는 이미 특허 기술료 일부를 지급했다.

‘열공’했지만 참담한 성적

“이 과정에서 기술료를 지급한 업체명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해외 업체들이 (협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업체 이미지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값으로 기술료를 받는 게 목표여서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 목표 달성을 위해 ETRI 전 직원에게 함구령이 내려졌다.”



ETRI의 또 다른 관계자는 상대가 있는 게임인 만큼 특허 소송이 민감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ETRI는 광대역부호분할다중접속(WCDMA) 등 3세대(3G) 이동통신 관련 7개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동영상 등으로 전력 소모가 많은 3G 휴대전화의 전력 소모량을 20% 정도 줄여 배터리를 오래 쓸 수 있게 해주는 기술은 대부분의 휴대전화 제조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최근 특허 소송이 알려진 뒤 ‘잘못된 소송 권한 위임으로 국부를 유출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어쨌든 ETRI의 ‘기술 제값 받기 특허 소송’은 그동안 ‘특허 분쟁에서 한국은 수세적’이라는 이미지를 바꿔놓고 있다(상자기사 참조). 소송과 협상을 진행해봐야겠지만 적어도 우리도 제대로 된 로열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수치로만 보면 한국은 특허 강국이다. 특허청이 최근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김정훈 의원(한나라당)에게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한국의 특허 출원건수는 17만632건(2008년)으로 미국 일본 중국에 이어 세계 4위를 기록했다. 2007년 ‘연구개발(R·D) 지출 대비 특허 산출건수’도 한국은 4.13건(연구개발비 417억 달러)으로 일본(2.68건), 중국(2.40건), 미국(1.24건), 독일(0.85건)보다 월등히 높다. 한국이 특허 1건에 약 25만 달러가 투자됐다면, 미국은 약 81만 달러가 쓰였다는 얘기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빛 좋은 개살구’다. 2007년 총 유효특허건수(56만6965건) 대비 GDP(국내총생산) 비율은 한국 2.12, 중국 25.31, 미국 7.42, 독일 5.74, 일본 3.95였다. 한국이 특허 1건으로 212만 달러를 벌었다면 중국은 2531만 달러, 미국은 742만 달러를 번 것이다.

애는 썼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은 셈. 이 때문에 특허로 돈을 벌어들이는 기술무역수지는 2008년 31억4000만 달러 적자를 냈다. 기술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로열티로 주는 돈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당연한 결과다. 아직까지 중소기업들은 특허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인식해 특허등록번호만 받으려고 한다. 입찰에 참여할 때나 홈쇼핑에 광고할 때 사용하기 위해서다. 권리범위를 구체화하고 로열티를 받을 수 있는 ‘강한 특허’에 대해선 관심이 적다.”

LEEIP 특허법률사무소 이종혁 대표변리사의 설명이다. 그는 의자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다리가 3개인 특이한 모양의 의자로 특허를 받았다고 치자. 이 경우 일반적으로 다리 3개에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대해서만 보호를 받는다. 예를 들어, 등받이를 뗀 다리 3개의 특이한 모양의 의자는 특허로 보호받지 못한다. 제대로 된 특허라면 등받이를 뗀 경우도 상정해서 구체적인 권리범위를 정해 치밀하게 설정해야 한다.”

발톱 선 ‘특허괴물’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미국 시애틀 교외 벨뷰 시에 있는 대표적인 ‘특허괴물(Patent Troll)’ 인텔렉추얼벤처스(IV) 연구소에서 한 별명가가 연구용 실험기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2000년 1월 설립된 이 회사는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노키아, 애플 등이 6조원 이상의 펀드를 조성해 아이디어를 선점함 뒤 이를 사용하는 기업들에게 사용료를 요구해 수익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자산 중 무형자산이 80% 이상

대기업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지난해 연말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은 미국 복스패스RS사로부터 광데이터 기록저장 시스템에 대한 특허침해 금지처분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현대자동차 미국지사(HMA)는 마케팅 시스템과 재고·판매 시스템 특허를 침해했다며 미국 클리어위드컴퓨터스(CWC)라는 회사로부터 소송을 당했다. 이처럼 한국 기업이 미국 연방법원에 특허침해 소송이 걸린 경우만 2007, 2008년 2년 동안 106건에 이른다.

특허 소송이 급증한 이유는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부동산 등 유형자산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던 무형자산의 재산 가치가 급속히 커졌다. 산업화 시대에 토지·자본·자원이 주요 생산요소였다면, 지식경제 시대에는 지식·정보·기술로 바뀌고 기술력과 브랜드, 디자인 같은 무형자산이 경쟁력의 핵심요소가 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S·P500 기업 자산 중 무형자산이 80% 이상’이라는 브루킹스 연구소의 발표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대변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발명을 대상으로 투자해 수익을 얻는 사업모델, 즉 ‘특허괴물(Patent Troll·특허관리전문기업)’을 만들어냈다. 국내 대기업의 특허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도 특허괴물 등장의 영향이 컸다. 2004~08년 삼성은 특허괴물로부터 모두 38건의 소송을 당해 세계 1위에 올랐고, LG는 이 기간 29건으로 소니와 공동 6위를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특허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경쟁 기업에 대한 견제 △후발주자에 대한 진입 장벽 높이기 △순수한 특허 관련 수입 확보 등이지만 특허괴물은 경쟁 차원보다 수입이 목적이다. 특허괴물은 직접 제조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특허를 생산하거나 매입한 뒤 이를 무기로 실시료를 챙기는데, 인터디지털과 인텔렉추얼벤처스(IV) 등 세계 220여 개 업체가 활동하고 있다.

실제 2005년 인터디지털은 삼성전자가 휴대전화에 사용되는 2세대(2G) 터미널 장비에 대해 특허권을 침해했다며 소송을 제기해 1억3400만 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고, LG전자는 인터디지털과 2억8500만 달러의 로열티 지급계약을 체결했다. 최근에는 IV가 국내에서 삼성전자, LG전자를 상대로 수천억원대의 연간 특허 사용료를 요구하기도 했다.

국내 대기업들 특허분쟁에 시달려

그렇다고 특허괴물을 ‘무시무시한 존재’로 인식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보통 특허괴물(Patent Troll)로 번역하는데 어원을 따져보면 ‘트롤(troll)’은 무시무시한 괴물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신화에 등장하는 우리의 도깨비 같은 괴물이다. 물론 일부 비도덕적인 경우도 있지만, 기업이 제품을 만들기 전 단계에서부터 어떤 특허를 확보할 수 있는지 등을 미리 따져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 경우 기업에도 이익이다.”

특허청 개방혁신팀 윤국석 팀장의 설명처럼 특허괴물은 부정적 인식과 함께 아이디어에 대한 적법한 권리를 주장하고 발명자를 보호한다는 긍정적 인식이 엇갈리고 있다.

문제는 국내 기업과 대학이 특허괴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 없이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한 특허괴물과 아이디어 판매 협상에 참가한 A교수(이동통신공학 전공)의 말이다.

“대학에서 지원해주는 특허출원 비용은 학기당 400만원이다. 특허비용이 충분히 지원되는 큰 연구과제를 맡기도 쉽지 않다. 그러던 중 학교 산학협력단과 계약을 맺은 특허관리회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아이디어를 사 자신들의 비용으로 사업화하고 이익이 생기면 나눠 갖자는 제안이었다. 아이디어를 매장하는 것보다 낫겠다 싶어 아이디어 하나를 900만원 받고 특허관리회사에 넘겼다. 당시에는 권리화와 사업화까지 해주겠다는 업체가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특허괴물이 발명자의 머릿속에 있는 ‘날것’ 그대로의 아이디어를 팔라고 요구하면, 교수와 학교 측에선 특허출원도 되지 않는 아이디어를 사주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IV가 국내 대학들로부터 특허 가능성이 있는 아이디어를 유료로 구입한 건수만 268건에 이른다는 집계도 있다.

“권리화(특허) 이전의 아이디어를 사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값싸게 아이디어를 구입해 숙련된 내부 전문인력을 활용해 ‘쿠킹(cooking)’한다. 특허 소송에 적합한 날카로운 무기로 재가공하는 것이다. 결국 이 무기는 국내 기업에 되돌아온다. 특허 소송으로 큰돈을 벌어도 계약을 체결한 교수에게는 돌아오는 게 거의 없다.”

이 변리사는 싼값에 특허가 나오기만 하면 환영하는 분위기인 국내 대학이나 기업이 허물어져가는 오두막 주위에 박아놓은 나무기둥에 불과하다면, 이들 특허괴물에 의해 처음부터 특허 소송을 목적으로 설계되는 특허는 폐쇄회로(CC) TV가 달린 4~ 5m 높이의 대저택 담장으로 비유했다.

발톱 선 ‘특허괴물’에 언제까지 당할 것인가

삼성전자가 직원들에게 특허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 이 포스터는 서울 본사와 지방 공장 곳곳에 게시됐다.



지식재산권 인식 제고 시급

그렇다면 ‘특허전쟁’ 시대를 헤쳐나갈 방법은 뭘까. 많은 특허 관련 전문가는 이번 기회에 지식재산권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인식을 제고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은 R·D 역량을 강화해 우수한 특허권을 확보하는 특허를 재점검하고, 특허방어 펀드에 가입하는 등 특허괴물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동안 기업이 활용한 ‘홍보용 특허’ ‘입찰용 특허’ ‘주가 띄우기용 특허’보다 특허로 권리행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특허’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국가적으로 육성하는 LED와 태양광, 원자력, 바이오산업 등은 당장의 결과물보다 이들 산업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인 원천기술이나 표준 획득을 지원하고 그 결과물의 정확한 평가를 병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 변리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권리화하는 특허 업무의 특성상 담당 인력의 능력이 어느 분야보다 중요하다”면서 “전문인력 양성 및 활용에 주력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김 의원은 “특허에 대한 인식 전환 없이는 미래 지식산업을 선도할 수 없다. 경제적 파급 효과가 큰 특허가 많이 출원되고, 특허소송 관련 분쟁을 조기에 해결하는 제도 보완책도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기에 따라 다르지만, ‘스마트폰’에 활용되는 애플리케이션(application)을 개발해 큰돈을 버는 것처럼 특허에 대한 관심은 일반인에게도 대박을 터뜨릴 기회가 될 수 있다.

‘주간동아’ 단독 확인

ETRI “삼성·LG도 휴대전화 로열티 내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국내 휴대전화 업체에게서도 ‘특허 사용료’를 받을 계획인 것으로 처음 확인됐다. 해외 휴대전화 업체를 상대로 ‘1조원대 특허 소송’을 벌이는 ETRI는 지금까지 정부 출연 연구기관으로서 국익을 감안해 국내 업체들과의 소송은 조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인 삼성전자와 LG전자도 특허 기술을 무단 사용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있었다.

ETRI 관계자는 1월26일 ‘주간동아’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해외 22개 휴대전화 업체와의 특허침해 소송은 소송의 우선순위를 정해 계획대로 추진한 것이다. 국내 기업이든 해외 기업이든 ‘페어’(공정)하고 ‘리즈너블’(합리적으로)하게 할 것이다. 해외 기업에게는 ‘리즈너블’하게 특허 사용료를 받고, 국내 기업은 ‘프리’하게 주면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국내 기업에 대해선 소송 결과와 기술료 협상 추이를 지켜보면서 로열티 방식이든 R&D 투자유치 방식이든 받아낼 예정”이라며 “국내 기업들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외 업체에게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얘기하면서 국내 기업에게는 보호무역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최근 한 일간지의 ‘기술 특허를 통째로 외국 업체에 넘겼다’는 보도에 대해선 “6, 7년 일 잘해놓고 (언론보도를)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며 “다음 날 해당 언론사가 (소송을 대행하는) SPH아메리카 대표의 반박 인터뷰를 싣고 사과하면서 오해를 풀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언론보도로 다른 해외 업체들이 협상에 나오지 않아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면서 “회사명이 공개된 특정 업체로부터는 비밀유지 계약을 위반했다며 항의를 받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조원대 특허 규모’와 관련해서는 “낙관적으로 추산했을 때 그렇다는 거다. 더 높아질 수도 있고 보수적으로 따지면 낮아질 수도 있다”며 “소송은 보통 대법원까지 가는 경우가 많지 않아 1심 판결이 나오는 2, 3년 안에 소송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주간동아 2010.02.09 723호 (p18~21)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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