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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돈이 주인공인 살벌한 세상, 그래도 살 만하죠”

집행관 기원섭 씨가 만난 ‘벼랑 끝 사람들’

“돈이 주인공인 살벌한 세상, 그래도 살 만하죠”

“돈이 주인공인 살벌한 세상,  그래도 살 만하죠”
“마흔 살 아들의 카드빚 때문에 일흔을 바라보는 노모가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나고, 수십 년 우정이 단돈 몇십만원에 허물어지고, 1억원 때문에 친형제 간에 멱살을 잡는 현장…. 그 참담한 현장의 한복판에 있다 보면 언제나 주연은 돈이고, 인간은 그저 조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1998년 외환위기 이후 68만여 건에 머무르던 경매 집행 건수가 2007년 이후 114만 건을 넘어서고 있다. 그만큼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집행관 기원섭(61) 씨는 바로 그 벼랑 끝 사람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악역’을 자처해야 한다. ‘집달리’ ‘집달관’이라고도 불리던 집행관은 채무 관련 재판에서 법원이 판결을 내렸으나 채무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 채권자를 도와 판결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빨간 딱지맨’이다.

기씨는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 집행을 담당하고,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을 ‘모셔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한 검찰수사관 출신. 그런 그가 2005년 10월, 31년 9개월간의 검찰공무원 생활을 접고 집행관으로서 인생 제2막을 열었다.

“법도 통하지 않는, 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중재하는 일이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해보니 쉽지 않더군요.”

집행관 일을 하다 보면 위험천만한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서 있는 곳이 벼랑 끝 아닌가.



재산 압류 악역 맡은 ‘빨간 딱지맨’

어느 날 도박빚 때문에 아내가 집을 나가고 집에서 쫓겨나게 된 남편과 딸은 집행관이 들어서자 깨진 유리병을 들이댔다. 월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난 또 다른 채무자들은 프로판 가스통을 들고 덤벼들었고, 어른 팔뚝만한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기씨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도 절대 피하거나 움츠러들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집행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위험한 상황과 자주 맞닥뜨리는 데 질려 집행관 일을 그만두는 사람도 적지 않다.

“사정을 잘 모르는 분들은 집행관이 우락부락한 사람들을 동원해 채무자를 힘으로 밀어붙이겠지 하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궁지에 몰린 채무자가 위협적인 상황을 유발하더라도 집행관에겐 절대 물리적인 힘으로 상황을 해결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는 집행관에 대한 모욕적인 언행이나 편견이야말로 위험한 상황보다 더 감당하기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언젠가는 은행빚 3억원을 갚지 못해 아파트가 경매 신청된 채무자에게선 라면국물 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집행관이 법원 소속이긴 하지만 집행 업무에 관한 수수료는 국가가 아닌 채권자에게 받는다. 그래서인지 일부 채권자들은 집행관을 머슴 정도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면 참기 힘들다고 한다.

“우리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에요.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지만 일을 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립니다. 집달관은 ‘슬픈 밥벌이’죠.”

3년6개월여 간 집행관 일을 하면서 그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운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2년 전쯤입니다. 채무자의 집으로 압류 집행을 갔는데, 인기척도 없고 문도 잠겨 있었죠. 열쇠 수리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저쪽에서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누군가가 기어오는 거예요. 처음엔 남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아주머니더라고요. 남편이 빚을 지고는 암환자로 죽을 날만 기다리던 부인을 버리고 도망간 거예요. 재산이 될 만한 물건이 하나도 없어 집행비용도 나오지 않았죠. 그 아주머니 처지가 하도 기가 막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어요.”

집행 현장을 다니다 보면 ‘세상엔 참 나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한다. 건강식품이니 건강이불이니 하며 노인들을 꾀어낸 뒤 높은 이자를 주겠다고 속여 돈을 떼어먹는 몹쓸 장사치도 있다. 관광버스 회사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다른 사람이 차주인 지입 버스도 명의상으로는 그 회사 소유라는 점을 이용해 가압류 신청을 하는 이도 있다.

“가압류 대상이던 2대의 버스는 명의로는 회사 소유지만 사실은 자기 돈 1억원을 주고 버스를 산 지입 차주들이 따로 있었죠. 지입 차주 가운데 한 명은 얼마 전 폐암 수술을 받았더라고요. ‘병원비는 어떻게 치르고, 마누라하고 새끼는 또 뭘 먹고 사느냐’면서 ‘내가 진 빚도 아닌데 왜 내 차를 뺏느냐’며 울부짖더군요. 그렇지만 판결에 따라 가압류를 진행할 수밖에요. 그날 일 끝나고 소주를 얼마나 마셨는지 모릅니다.”

채무자가 저지른 잘못이 아니라, 믿었던 다른 누군가의 잘못에 의해(대개는 보증을 섰다가) 위기로 내몰린 사람들을 만나면 특히 마음이 무겁다고 한다. 그러나 원통한 채무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과 판사의 판결을 그대로 이행해야만 하는 것은 별개다. 이 같은 딜레마 역시 집행관에게 부여된 운명이다.

딱한 사정 집행 연기 푸근한 보람도

그렇다고 세상이 늘 차갑고 살벌한 것만은 아니다. “월세가 3년 밀린 채무자의 임대아파트를 찾아갔는데 그 집 문간방에 여중생 교복 한 벌이 걸려 있었어요. 그 교복을 입을 여학생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채권자 측인 관리소 직원을 설득해봤죠. 그랬더니 채권자는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라면서 고민 끝에 집행을 연기했어요.”

그런가 하면 채무자의 중학생 아들 방에 있던 컴퓨터는 집행 대상에서 빼준 채권자도 있고, 채무자인 30대 여성이 얼마 전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주인(채권자)이 강제 집행을 연기해준 적도 있다. 채권자를 대리해 나온 한 직원은 월세가 밀려 쫓겨날 처지에 놓인 빌딩 지하 구멍가게 아주머니의 사정을 듣자 채권자에게 매달려 설득을 하기도 했다. 기씨는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며 미소를 머금는다. 집행관 일도 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벼랑 끝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때론 그에게 슬픔을 주고, 때론 희망을 주기도 했다. 한잔 소주만으로는 달랠 수 없었던 그 사연들을 모아 얼마 전 ‘집행관 일기’(오푸스 펴냄)라는 책을 펴냈다. 올 봄이면 집행관 일도 마쳐야 한다는 그는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죠”라며 사람 좋게 웃었다.



주간동아 2009.03.24 678호 (p62~63)

  • 백경선 자유기고가 sudaque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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