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77

2009.03.17

돌아온 미키 루크에게 뜨거운 박수를!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

  •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입력2009-03-12 12: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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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온 미키 루크에게 뜨거운 박수를!

    레슬러 역을 맡아 노장 투혼을 발휘한 미키 루크(왼쪽).

    다 늙은 프로레슬러 랜디는 이제 막 링 위에 나설 참이다. 링에서의 이름은 ‘램’이다. 누가 자신의 성을 물으면 그는 꼭 “그냥 랜디라고 불러요”라며 친절하게 대한다. 오늘 그의 파트너가 될 한참 어린 친구가 링에서 벌일 ‘격투 쇼’에 대해 설명을 해대기 시작한다.

    “그러니까요 선배, 이런 거예요. 스테이플러 어택을 할 거란 말이에요.”

    랜디가 묻는다. “뭐? 무슨 공격이라고? 근데 그거 아픈가?”

    “뭐, 들어갈 때만 아픈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리 센 게 아녜요. 너무 걱정마시라고요, 선배.”

    하지만 영화가 점프 컷된 상태에서 다음 장면으로 바로 이어진 링 위의 모습은 그야말로 피범벅 난장판이다. 랜디의 파트너는 먼저 자기의 이마에 스테이플러를 대못처럼 꽝꽝 박더니 곧이어 랜디의 가슴과 등에 스테이플러를 똑같이 박아댄다. 의자가 날아다니고 어디선가 가져온 유리문이 두 사람의 머리에서 차례로 박살이 난다. 만신창이가 돼 로커룸으로 돌아온 랜디는 갑자기 구토를 하며 실신을 하고 만다. 쉰 살이 넘은 프로레슬러에겐 최악의 경기였던 것이다.



    대런 애로노프스키 감독의 새 영화 ‘더 레슬러(The Wrestler)’는 마치 영화 속 랜디처럼 실제의 삶을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미키 루크가 주연을 맡았다고 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영화 속 랜디와 영화 밖 미키 루크가 닮아 있다는 게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이자 의미다.

    영화 속 레슬러 랜디는 1980년대 레슬링계의 전설이었다. 미키 루크 역시 그랬다. 그는 80년대를 풍미한 섹스 심벌이었다. 그의 영화 ‘나인 하프 위크’를 보면서 달아오르지 않았던 청춘남녀들이 있었을까. ‘이어 오브 드래곤’ ‘자니 핸섬’ ‘에인절 하트’ 등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한 배우였다. 그런 그가 권투에 미쳐 날뛰고 술과 마약과 섹스에 탐닉하더니 얼굴까지 성형 후유증으로 망가져 거리로 내몰렸다. 재산과 사랑, 명예와 이름 모든 것을 잃은 미키 루크에 대해 사람들은 이제 그는 완전히 끝났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영화 ‘더 레슬러’는 그가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게 레슬러 랜디의 마음인지 영화배우 미키 루크의 속내인지, 그래서 어느 게 영화이고 어느 게 현실인지 헷갈린다. 이상하게 마음이 짠해진다. 울컥 눈물이 난다.

    경기가 열리는 날 외에는 변두리 동네의,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중형 마트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랜디는 어느 날 사장에게 풀타임제로 전환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의 방을 노크한다. 그런데 웬걸, 한참 포르노를 보고 있던 사장은 창피함과 분풀이로 그에게 카운터 서빙을 맡긴다. 그래도 전설의 레슬러인데 서빙이라니.

    한때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그리고 한때 최고였지만 이제는 비루할 대로 비루해진 처지. 하지만 랜디는 그것을 가슴 한구석에 주저앉히려 애쓴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한물간 늙은 남자의 모습이 애처롭다. 가슴속에 용암이 흐르지만 그것을 밖으로 넘치게 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눈물이 난다.

    영화 속에서 랜디는 웬만해서 화를 내지 않는다. 자신의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스트립 걸을 위해 못된 남자를 내쫓을 때 살짝 그런 척할 뿐이다. 화를 내지 않는 건 이유가 있어서다. 젊은 시절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인간적 존엄과 품격을 지키게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랜디는 링 위에서 마지막 투혼을 불사를 수 있을까. 랜디는 자신의 스트립 걸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을까. 랜디는 자신이 보살피지 않았던 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까. 미키 루크는 영화배우로 재기할 수 있을까. 미키 루크는 자신을 사랑했던 팬들에게 다시 용서받을 수 있을까.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링 밖 관중처럼 한마음이 된다. 관중은 랜디에게, 미키 루크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더 레슬러’는 쓸쓸한 인생 퇴장기를 그린 영화가 아니다.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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