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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OMY

‘억대 돈보따리’ 은행원들, 행복한 퇴직?

보상금 언감생심 타 직종 근로자들 “오히려 부럽다”

‘억대 돈보따리’ 은행원들, 행복한 퇴직?

‘억대 돈보따리’ 은행원들, 행복한 퇴직?
맞벌이 주부였던 박미옥(가명·36) 한국씨티은행 과장은 12월29일자로 16년간의 은행원 생활을 마감했다.

12월 초 회사가 희망퇴직 신청 공고를 띄우자 그는 ‘지금이 좋은 기회’란 생각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희망퇴직 보상금과 퇴직금을 합쳐 그의 손에 쥐어진 목돈은 3억원가량. 새해부터 그는 그동안 소홀했던 초등학생 딸아이의 공부와 집안 살림을 살뜰하게 챙기는 전업주부로 지낼 참이다.

요즘 시중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는 박 과장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조기퇴직이 상시적으로 시행되고 있지만 이번만큼 금융계 종사자들이 대규모로, 발걸음도 ‘가볍게’ 회사를 떠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씨티은행 298명, 신한카드 488명, 농협중앙회 330명, SC제일은행 193명, 하나대투증권 171명 등이 근무연수와 직급에 따라 적게는 1억원, 많게는 4억원의 목돈을 받아들고 직장을 떠났거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2007년 133명에서 2배 이상, 농협중앙회는 219명보다 100명 이상 증가한 수치다.



목돈 챙기고 육아 전념 … 기혼여성 신청 많아

12월26일까지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 국민은행도 2007년(65명)보다 많은 직원들이 퇴직을 원할 것으로 내다본다. 희망퇴직 보상금을 15~24개월치 급여에서 24~34개월치 급여로 높였고, 대상자를 근속연수 15년 이상에서 8년 이상으로 확대했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관계자는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하는 여직원들의 요청을 수용해 희망퇴직 기준을 완화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김모 대리는 “회사가 퇴출 리스트를 작성해 퇴사를 종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며 “희망퇴직에 대해 여직원들의 관심이 비교적 높고, 큰 동요는 없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희망퇴직 규모가 커지고 ‘자발성’이 높아지는 데는 글로벌 경기침체의 영향이 크다. 과거보다 보상금을 많이 주더라도 인력 축소로 경영 부담을 덜고자 하는 은행 처지와, 대출금 상환 걱정에 목돈이 필요한 직원 처지가 서로 맞아떨어진 것. 여기에 ‘펀드 스트레스’도 한몫했다. 모 시중은행 신모(47) 지점장은 “은행원들이 대규모 펀드 손실 사태 여파로 고객이 영업점에 찾아와 언성을 높이는 등의 곤혹스런 경험을 처음 해보고 있다”며 “내년 은행 영업이 더 팍팍해질 것이 불 보듯 뻔해, 이참에 그만두자고 마음먹은 여직원들이 많다”고 전했다.

실제로 한국씨티은행의 경우 300명에 가까운 희망퇴직자 가운데 3분의 2가 기혼여성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 은행 관계자는 “사내 부부 가운데 아내가 퇴사하는 경우가 40여 명”이라고 밝혔다.

외환위기 이후 거의 강제적으로 은행을 떠난 1세대 희망퇴직자들과 달리, 구체적인 계획 없이 희망퇴직하는 남성 은행원들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은행업계의 중론이다. 희망퇴직 남성은 정년을 3~4년 앞둔 55세 안팎의 장기근속자가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유학을 가거나 전직하려는 ‘특수한’ 경우라는 것. 시중은행에서 프라이빗뱅커(PB)로 일하는 윤모(35) 씨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기 전에 증권사나 자산운용사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번에 희망퇴직 위로금을 챙겨 나가는 PB들이 몇몇 있는 것으로 알려져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자녀 셋 가운데 막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아이들 대학 공부를 시키려면 60대 중반까지는 일해야 하죠. 58세에 정년퇴직하면 새로운 일을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차라리 지금 나가자 하는 겁니다.”

21년 경력의 지점장급 행원 김모(49) 씨는 자산관리사로의 변신을 다짐하며 희망퇴직을 결심했다. 일찌감치 은행을 떠났다 낭패 본 선배들을 자주 접한 그는 퇴직금으로 프랜차이즈 운영이나 하자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김씨는 “퇴직한 뒤 부동산 경매 컨설턴트나 공인중개사, 합법적인 대부업체 창업 등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여럿 있다”며 “요즘은 자영업보다는 은행에서의 경력을 살리는 직종으로 나가려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또 “퇴직금과 보상금을 5년 이상 주식에 묻어두면 큰 수익을 올리지 않겠나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억대 돈보따리’ 은행원들, 행복한 퇴직?

서울 중구 다동의 한국씨티은행 본사. 이 은행에서는 지난 12월29일자로 희망퇴직한 298명의 직원 중 3분의 2가 여성인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모든 희망퇴직자들이 목돈을 손에 쥔 들뜬 마음으로 연말연시를 맞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은행과 증권사는 사실상의 구조조정 대상자 명단을 작성해 퇴직을 권유함으로써 노사 간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10월에 193명이 퇴직한 SC제일은행 노동조합 장장환 위원장은 “회사가 근무연수가 높거나 실적이 좋지 않은 직원에게 퇴직할 것을 종용했다”며 “열 번도 넘게 회사 측으로부터 종용 전화를 받았거나 ‘회사가 자선단체냐’는 막말까지 들은 직원도 있다”고 밝혔다.

자발적 의사에 따르든, 강요에 의하든 퇴직금에 2~3년치 월급과 1000만~2500만원의 자녀 학자금까지 보태 받는 일반은행 직원과 달리, 국책은행 직원들은 마땅히 목돈도 챙기지 못한 채 퇴직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산업은행, 기업은행, 한국자산관리공사(이하 공사) 등이 그렇다. 최근 정부가 공기업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이들 기관은 앞으로 4년간 정원의 10%를 줄여야 한다.

국책은행원들은 상대적 빈곤

그러나 정부 산하 기관인 만큼 직원들은 일반은행처럼 넉넉한 보상금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다. 기업은행 노조 관계자는 “정원의 10%면 700명 정도”라며 “정부가 가시적 성과를 위해 한꺼번에 인력을 줄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직원들의 동요가 크다”고 말했다. 공사는 12월 중순 이철휘 사장이 “2008년 안에 정원의 7~8%를 줄이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함에 따라 1월 안으로 공고가 날 예정이다. 이에 공사 노조는 “관건은 희망퇴직 보상금이 얼마나 되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보상금이 적다면 아무도 희망퇴직에 자발적으로 응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이 공사의 한 직원은 “보상금이 30개월치 급여 이상이라는 소문이 돌면 ‘이참에 나가볼까’라는 사람들이 나오다가도, ‘정부가 허락하겠느냐’는 말이 돌면 희망퇴직에 대한 관심이 수그러들곤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은행맨’들의 엑소더스는 이번 연말연시 풍경으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산업노조 고광규 정책실장은 “아직 계획이 없다고 하는 은행들도 조만간 희망퇴직 접수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외환은행 노조의 한 관계자도 “2009년에는 금융권 상황이 심하게 변동될 것으로 예상돼 이미 인력을 많이 줄인 외환은행도 희망퇴직 실시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내다봤다.

숙련된 여성 은행원들의 대규모 이탈은 외환위기 당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으로 그랬던 것처럼 ‘업무 공백’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모 시중은행 정모 지점장은 “외환, 대출, 상품 판매 등을 해왔던 여직원들이 희망퇴직에 몰리고 있어 그 빈자리를 경험이 거의 없는 신입사원이나 비정규직으로 채워야 할 판”이라고 걱정했다.

은행권의 희망퇴직을 통한 인력 구조조정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노조 측은 “경영난의 본질적인 해결책이라 할 경영능력 개선 없이 가장 손쉬운 인력 감축만 한다”는 비판적 입장이다. 그러나 한국노동연구원 김정한 연구위원은 “은행들의 인력 구조는 차장급이 가장 많은 항아리형이기 때문에 조기퇴직을 시킬 필요가 있다”며 “단기적으로는 희망퇴직 보상금 때문에 비용 부담이 따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은행에 이득”이라고 지적했다.

글로벌 경기침체가 본격화할 새해를 앞둔 연말연시. 아직까지 ‘생존’하고 있는 은행원들은 앞으로 닥칠 인력 감축의 강도에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상금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처지는 나쁘기만 한 것일까. 분명한 점은 월급이 끊기고 회사가 부도 직전에 몰려 호주머니가 빈 채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를 ‘은행 밖’ 근로자들보다는 낫다는 사실이다.



주간동아 2009.01.06 668호 (p40~41)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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