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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FORMANCE|연극 ‘죠반니’

집단의 트라우마 그리고 모호한 진실

집단의 트라우마 그리고 모호한 진실

집단의 트라우마 그리고 모호한 진실

죠반니 역의 배우 이상직(앞줄 가운데)과 출연 배우들.

‘죠반니’(베쓰야쿠 미노르 작·김광보 연출)는 미로를 걷다가 실마리를 하나씩 줍는 것 같은 재미를 느끼게 하는 연극이다. 이 작품은 모호함과 부조리함으로 점철돼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작품의 흥미 요소이며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조명이 켜지면 한 남자가 기차역에 앉아 있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고향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어릴 때의 친구들이라며 나타난 마을 사람들이 ‘죠반니’라는 이름을 알려주고, 어머니와 누이가 등장해서 그가 고향에 돌아온 이유를 가르쳐준다. 마을 사람들에 따르면 죠반니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다. 남자는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곧 그들의 말에 따라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을 사람들은 23년 전 따돌림을 심하게 당하던 죠반니가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힌 자네리를 물가에서 떠밀자 캄파넬라가 자네리를 구하려다 사망했는데, 이를 본 죠반니의 아버지가 누명을 썼다고 믿고 있다.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죠반니뿐.

죠반니가 고향에 돌아온 날, 그때와 똑같은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진다. 마을의 ‘별축제’가 한창이던 밤, 소년 하나가 물에 빠져 죽는다. 이번에는 죠반니의 아버지가 아닌 ‘어른 자네리’가 마을 소년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거짓으로 죄를 시인한다. 이유인즉 아들이 마을 소년을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죠반니는 자네리의 무죄를 밝히면 결국 23년 전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고, 죠반니는 자네리의 사형집행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살해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결과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아무리 힘을 줘도 꼼짝 안 하던 선로 변환기를 움직여서 캄파넬라를 비롯한 죽은 사람들을 운반할 수 있는 은하철도를 불러들이게 된다.



이상한 점은 23년 전 별축제 날에 죠반니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죠반니의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사내가 하지도 않은 살인을 시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죠반니가 ‘있지도 않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는 미션도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초시간적 공간에서 전개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죠반니의 의식 속인지, 무엇이 진실이고 ‘강요된 사실’인지 당최 알 수 없다. 또한 죽었다는 캄파넬라도 버젓이 살아 있다. 이 작품이 이처럼 모호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죠반니가 기억을 회피하는 것과 사건을 되짚어보는 것은 전형적인 트라우마의 증상과 치유 과정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부조리하게도 그 과정이 개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의 요구에 따르는 합리화이며, 명제에 따라 이뤄지는 ‘결의’라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와 상관없이 모든 것은 ‘정상화’될 것이다. 그렇게 집단의 역사는 개인의 무덤에 비석을 박아 넣으며 유유히 흐른다.

한편 마을 사람들은 죠반니에게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처럼 보이는 묘지기는 “이 마을의 모든 사람들에게 죽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이 연극의 키워드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죠반니라는 소년이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고 아버지로 성장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집단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정리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연극의 원작인 ‘은하철도의 꿈’의 아련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은 이 무대는 의자 네 개와 프레임, 배경의 조명만을 통해 시간이 멈춘 듯한 비일상적 분위기를 잘 드러낸다. 연출의 경우 복합적인 메시지 전달에서 강조점을 적절히 찍어줄 필요도 있어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비일상성을 강조하다 보니 연기가 경직된 감은 있지만, 얼떨떨해하면서도 이야기에 섞여드는 죠반니의 모습은 인물의 캐릭터에 잘 어우러졌고, 묘지기의 비밀을 간직한 듯한 연기가 돋보이는 공연이다.



주간동아 2008.10.28 658호 (p81~81)

  • 현수정 공연 칼럼니스트 eliz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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