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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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치기 외환 전투, 피마르는 딜러들

매일 6시간 치고 빠지는 환율 전쟁 … 0.1초에 10억원 간 큰 거래 뚝딱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8-08-11 11: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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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치기 외환 전투, 피마르는 딜러들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19층의 외환딜링룸 풍경. 6명의 딜러 앞에 무려 27개의 각종 모니터가 놓여 있다. 원-달러 외환거래를 총괄하는 김두현 선임딜러(맨 아래)는 하루 1000~1500건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초단위 전투’에 나선다.

    “자,이제 시작합시다!” 시계가 정확히 오전 9시를 가리키자 다들 전사(戰士)로 돌변했다. 매서운 눈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손가락은 행진곡을 연주하듯 빠른 속도로 키보드 자판을 휘젓는다. 매매기준율 USD(미국 달러) 1017.50. “삼십 솔드, 칠점영으로!” “십구원에 오퍼 다섯 개!” “접수!” 대화라기보다는 외마디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쉴새없이 터져나온다. 8월5일 서울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19층에 자리한 외환딜링룸의 하루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환율시장은 그야말로 요동치고 있다.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인한 글로벌 신용위기와 국제유가의 고공행진이 환율 상승을 부채질했고,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환율 인상을 유도했다. 물가 상승을 우려한 정부가 7월부터 매도 개입으로 돌변하자 환율은 또다시 출렁이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자’ 세력과 정부의 달러 물량 투하가 맞물려 환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형국이다.

    이 같은 환율전쟁의 최전선에 외환딜러들이 있다. 이들이 형성하는 매일 수천 수만 건의 외환거래가 그날의 환율을 결정한다. 기업의 운명과 가계의 희비가 이들의 분석력과 판단력에 달린 것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매일의 환율을 어떤 식으로 주무르는가. 8월5일 외환시장이 열리고 끝날 때까지 외환은행 글로벌마켓부 외환운용팀에서 ‘환율 격동기’의 외환딜러들을 관찰했다.

    이명박 정부 환율 엎치락뒤치락

    딜링룸에서는 말을 길게 해서는 안 된다. 핵심 단어만 스타카토로 내뱉는다. 지위를 막론하고 존댓말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예컨대 달러당 1017.50원에 300만 달러를 파는 주문을 낸다면 “칠점오에 3개 보트(bought)!”라고 외친다. 하루에 보통 1000건에서 1500건의 거래를 성사시켜야 하는 초단위 전투이기 때문에 예를 갖춰 말할 여유가 좀처럼 없는 것이다.



    딜러들은 외환거래 전용 프로그램의 ‘금액’란에 보통 1에서 3까지의 숫자를 입력하며 거래를 하는데 이때 금액 단위는 100만 달러다. 즉 1이란 숫자가 10억원이 넘는 돈을 뜻한다. 외환딜러들은 평범한 직장인이 월급을 평생 모아야 만질까 말까 한 거액을 짧게는 0.1초 만에 사거나 파는 것이다.

    외환은행 외환운용팀에는 15명의 딜러가 있다. 이들은 인터뱅크 딜러(Interbank Dealer·외국환 업무를 허가받은 은행 간의 외환거래를 담당하는 딜러)와 코퍼레이트 딜러(Corporate Dealer·기업체의 외환 물량을 받아 처리해주는 업무를 하는 딜러)로 나뉜다. 인터뱅크 딜러들은 다시 원-달러를 거래하는 원달러 팀과 달러 이외의 통화를 거래하는 이종(異種)통화 팀으로 나뉜다.

    어느덧 낮 12시가 넘었지만 그대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 이날은 그나마도 많은 딜러들이 밖에서 호젓한 점심을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7월9일에는 점심시간에만 환율이 30원 하락하는 바람에 허기도 잊고 장(場)에 매달렸다고 한다. 소리 소문 없이 분식집에서 김밥, 유부초밥 등이 배달돼 여전히 각종 모니터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각 딜러들의 책상 앞에 놓였다. 거래 이외의 대화는 일절 금지된 분위기라 막내직원이 인터넷 메신저로 ‘조용히’ 도시락 주문을 받는단다.

    오후에도 거래는 계속됐다. 오늘 환율은 노고재에서 출발해 천왕봉을 향해 가는 지리산 자락처럼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전체적으로 상승해나갔다. 딜러들은 수도 없이 주문을 내는 동시에 블룸버그 등 통신사 뉴스를 체크하며 ‘환율 이벤트’가 될 핫뉴스가 뜨는지 예의주시했다. 키보드 두드리느라 아픈 손가락과 긴장한 허리를 주무르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뒷목에 아예 파스를 붙인 딜러도 있었다. 개인 휴대전화는 거의 울리지 않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장중(場中)에 휴대전화를 꺼두기도 하거니와 장중에 전화를 걸어오는 ‘간 큰’ 딜러 가족이나 지인이 없는 까닭이다.

    탐욕과 공포의 포커게임과 유사

    초치기 외환 전투, 피마르는 딜러들

    사자와 팔자 주문을 내느라 바쁜 딜러들의 손.

    장이 끝날 무렵이 되자 딜링룸은 더 바빠졌다. “5개 솔드(sold)!” “던(done)!” “칠점칠로!” “(고객에게) 아직 체결 안 됐는데요, 얼마에 할까요? 칠점삼으로. 오백이십만 불인가요? (원달러 딜러에게) 오백이십 보트, 칠점삼!”

    직접 외환거래를 하는 인터뱅크 딜러들은 국내에 5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소수정예에 의해 우리 경제의 운명을 좌우하는 환율이 결정되는 셈이다. 보통은 일반 행원으로 입사해 2~3년간 영업점에서 근무한 뒤 선발절차를 거쳐 딜러가 된다. 은행 안에서 딜러는 꽤 인기가 높다. 외환은행의 경우 최근 2명의 딜러를 선발하는 데 지원자가 23명이나 몰렸을 정도다. 능력을 인정받은 딜러는 파격적인 대우에 타 은행으로 스카우트된다. 덕분에 억대 연봉을 받는 딜러도 꽤 많다고 한다.

    딜러들끼리는 외환거래를 포커게임에 즐겨 비교하곤 한다. 포커에서 상대에게 자신의 패가 파악되지 않도록 포커페이스가 가장 중요하듯, 외환거래를 할 때도 내가 얼마나 많이 달러를 사야 하는, 혹은 팔아야 하는 처지인지 노출하지 않는 것이 거래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핵심 비결이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하는 점도 포커와 공통된다. 수익을 올리는 상황에서 더 공격적으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손을 털 것인지 딜러들은 매번 어려운 결정에 맞닥뜨린다. 손해를 보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원-달러 외환거래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김두현 선임딜러는 “탐욕과 공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 딜러의 운명”이라고 표현했다.

    수많은 팔자와 사자 주문, 이미 체결된 계약 내용, 환율 동향 그래프 등 숫자로만 가득한 외환거래 전용 모니터 앞에서 이렇듯 딜러는 외롭고도 치열한 싸움을 벌여나간다. 외환은행 딜러들이 외환거래를 ‘유구무언’ ‘희로애락’으로, 외환딜러를 ‘종합병원’ ‘저격수’ 등으로 표현하는 데는 이런 고충이 녹아 있는 것이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장 마감 10분을 남겨두고 환율은 드디어 천왕봉에 도달한 듯 1090원까지 가파르게 오르다가 갑자기 1065원으로까지 추락하는 등 춤을 추었다. 거래를 내는 딜러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계약 체결을 의미하는 “던(done)!”이란 외침은 더 잦아졌다. 시곗바늘이 오후 3시 정각을 가리키자마자 한 딜러가 “종가 칠점구입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6시간 동안 치고 빠지기를 거듭하던 환율은 전날보다 달러당 0.50원 오른 1017.9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국내 외환시장이 끝났다고 딜러들이 쉴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후 5시가 되면 오전 9시의 런던에서 외환시장이 열린다. 이른바 역외선물환(NDF·Non-Deliverable Forward)시장으로 국내 외환딜러들 역시 참여한다. 또 밤 10시에는 뉴욕시각 오전 9시로 뉴욕의 외환시장이 열린다. 오전 6시부터 9시까지가 유일하게 서울 런던 뉴욕의 외환시장이 모두 닫히는 때다. 외환딜러들의 출근시각은 오전 7시50분. 회의를 마치고 8시30분부터 모니터 앞에 앉아 결전을 위해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렇게 환율전쟁은 날마다 반복된다.

    *이 기사 취재에는 대학생 인턴기자 남효주(고려대 노어노문학과 4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딜러 7人이 내린 외환거래 & 외환딜러의 정의(定義)

    이종격투기, 눈치싸움, 저격수, 종합병원 …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계기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외환딜러는 그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직업’일까? 딜러들은 각자 소속한 은행의 그리고 대한민국의 ‘환율 대표선수’로 자부심이 강한 한편, 과도한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외환은행 딜러 7명이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외환거래, 외환딜러를 직접 정의했다.

    ●외환거래는 유구무언(有口無言) 이다. 외환딜러는 저격수 다. -김두현 차장, 딜러 경력 8년

    ●외환거래는 희로애락(喜怒哀樂) 이다. 외환딜러는 종합병원 이다. -고규연 대리, 딜러 경력 5년

    ●외환거래는 도박 이다. 외환딜러는 도박사 다. -조현석 대리, 딜러 경력 4년

    ●외환거래는 이종격투기 다. 외환딜러는 효도르 다. -원정환 대리, 딜러 경력 3년

    ●외환거래는 스타크래프트 다. 외환딜러는 프로게이머 다. -방보훈 대리, 딜러 경력 2년

    ●외환거래는 포커게임 이다. 외환딜러는 타짜 다. -김진주 계장, 딜러 경력 2년

    ●외환거래는 눈치싸움 이다. 외환딜러는 저격수 다. -박주형 계장, 딜러 경력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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