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64

2016.11.23

특집 | 미리 가본 ‘트럼프 월드’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의 미래

깜깜이 트럼프 정부, 혼란의 미국…세부 공약, 체계화된 이데올로기, 정책 방향 전무

  • 김창환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 | chkim.ku@gmail.com

    입력2016-11-21 10: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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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어떻게 공직 경험이 전혀 없고, 수많은 성추행을 저질렀고, 인종주의적 선동을 자행하고, 정책 이해도가 낮고, 멕시코와 국경에 벽을 세우겠다는 황당한 공약을 내세우고, 토론에서 대통령다운 안정감과 품위를 전혀 보여주지 못했고, 심지어 장애인을 흉내 내며 모욕하기까지 했고, 미국의 주적이던 러시아와 친하고, 선거운동 내내 사실과 어긋나는 주장을 반복하고, 그래서 민주당뿐 아니라 여러 공화당 정치인마저 지지를 포기했으며, 주요 언론 대부분이 당선에 반대하고,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던, 그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의 제목 ‘우리가 모르는 우리나라’가 현 미국 사회의 당혹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당혹감은 선거에서 진 민주당 지지자만의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자 역시 자신들이 왜 선거에서 이겼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느끼는 혼란과 당혹감이 너무 커 필자가 속한 대학 곳곳에서는 이번 선거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오바마 지지자가 돌아선 이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선거(대선) 후보가 트럼프에게 진 가장 큰 이유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이 많은 중서부 지역이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이곳은 2008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담대한 희망’을 들고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지지한 지역들이다. 2012년 오바마 대통령 재선 때도 이 지역 백인의 민주당 지지는 변함없었다. 빌 클린턴과 오바마 후보가 대선에서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이른바 ‘러스트 벨트(Rust Belt)’라고 부르는 중서부 공장지대 노동계급과 뉴욕·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동부 및 서부의 중산층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연대한 덕분이었다. 중서부의 위스콘신과 미시간은 1992년 빌 클린턴이 당선한 이후 모든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던 주다. 이 강고한 연대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면 왜 4년 전 최초의 흑인대통령을 받아들인 백인 노동계급이 이번엔 압도적으로 인종주의 선동가를 지지한 것일까. 인종주의 연구자들이 주장하듯 감춰진 인종주의(covert racism)가 트럼프라는 정치인을 만나 공공연한 인종주의(overt racism)로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인가. 실제로 트럼프 당선 이후 소수인종 학생에 대한 위협과 공격이 여러 대학에서 일어났다. 만약 인종주의가 아니라면 미국 남성들이 깊은 성차별 의식을 갖고 있어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인가.



    하나하나 따져보자. 트럼프의 당선 이유를 알아보는 것은 이후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칠지 예측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세계화와 기술 발전으로 노동계급의 경제 상황이 악화된 것은 모두 알고 있으나, 민주당과 공화당은 모두 적절한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중서부 러스트 벨트 유권자가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리라 기대했다. 그 이유는 공화당이 노동계급을 향해 보인 적대적 태도가 이번에도 민주당에게 반사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 예측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에 대한 공화당의 전형적 태도를 확인하려면 2012년 미트 롬니 당시 대선후보의 발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인 기부자들과 만찬에서 롬니 후보는 미국의 절반에 달하는 47% 국민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정부 복지만 바란다고 한탄했다. 롬니 후보의 이 발언은 백인 노동계급의 곤궁이 그들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즉 경제적 곤란함의 원인이 노동계급 자신에게 있다는 의견이다.

    빈곤의 원인에 대한 사회과학계의 논쟁을 아주 단순화해 요약하면 문화결정론과 구조결정론으로 구분할 수 있다. 문화결정론은 가난한 사람에게 ‘빈곤의 문화’가 만연해 그들이 학업을 등한시하고 정규직을 갖지 않으며 마약과 알코올에 중독돼 인생을 낭비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논리다. 반면 구조결정론은 경제구조의 변화로 괜찮은 일자리가 모두 사라진 결과 삶의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일탈 행동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문화결정론은 일탈을 빈곤의 원인으로, 구조결정론은 일탈을 경제구조 변화의 결과로 본다.

    최근 미국 백인 노동계급의 거주지역에서 일탈 행동이 크게 늘었다. 백인 노동계급의 혼인율은 낮아지고, 혼외 출산율은 높아졌으며, 알코올과 마약 중독은 크게 늘었다. 나이가 들어도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비공식 부문에서 불안한 수입에 의존하는 비율 역시 크게 늘었다. 공화당은 이들 백인 노동계급의 구조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도와주려 하기보다 ‘빈곤의 문화’가 흑인으로부터 백인에게로 파급, 확산되고 있다고 한탄하며 이들을 비난했다. 오바마가 승리한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이 태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트럼프는 달랐다. 노동계급이 아닌 이민자와 자유무역을 공격하면서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고 위대한 미국을 다시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산업 성장 뒤 배고픈 노동자

    이에 반해 민주당은 노동계급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는 인식하고 있었으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무대책은 오바마 행정부의 업적을 보면 좀 더 분명히 드러난다. 오바마 대통령이 자랑하는 업적 가운데 하나가 미국 자동차산업 부활이다. 2008년 경제위기 직후 미국 자동차산업은 풍전등화 처지였다. 이를 살려낸 것이 오바마 정부다. 공격적인 재정 지원으로 미국 자동차회사는 완벽하게 부활했다. 지난 8년 오바마 임기 동안 미국 자동차 생산량이 55% 증가했다.  

    그런데 오바마 행정부 기간 자동차산업은 살아났지만,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삶은 그에 비례해 개선되지 않았다. 자동차산업의 총고용자 수는 줄었고, 자동차산업 종사 노동자의 소득은 2000년대 초반 대비 23% 감소했다. 즉 중서부 지역의 노동계급은 산업은 발전하는데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경제적 파이는 줄어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이유는 자동차 부품의 해외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완성차에 들어가는 수입 부품의 가격이 차량 대당 1000만 원 정도였다면, 지금은 1200만 원가량으로 늘었다. 자유무역을 공격하는 트럼프의 주장에 노동계급이 격하게 공감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일부에서는 민주당이 왜 버니 샌더스를 대선후보로 택하지 않았느냐고 질문할 것이다. 그 배경에는 민주당의 지식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샌더스는 국민건강보험, 도로·항만 등의 인프라, 교육, 은퇴연금, 세금 등에서 진보적 정책을 강력하게 펴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민주당을 지지하는 많은 경제학자가 샌더스의 정책은 지속 가능성이 낮다고 진단했다. 샌더스의 정책은 작더라도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민주당의 증거기반정책의 전통에 위배됐다. 리버럴 지식인들은 불평등을 해결할 정책적 대안도, ‘담대한 희망’이 될 유토피아적 이상도 제시하지 못했다.  

    민주당과 공화당이 망설이는 사이 일관된 정책적 대안 없이 마케팅 기술로 노동계급의 불만을 자극한 이가 트럼프다. 그는 반이민자, 반자유무역자라는 선동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듣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노동계급의 현실 앞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에 집착할 시간이 없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큰 공감을 얻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소속 정당과 관계없이 하지 않았을 전략을 그는 구사했다.

    미국 리버럴 지식인들은 트럼프가 제기하는 노동계급 문제에 타당성은 있지만, 적어도 미국인이 이런 후보를 뽑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인종주의를 배격하는 태도가 지배적 문화로 사회생활 대부분에 자리 잡았고, 여기서 과거로 돌아갈 리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들은 트럼프의 인종주의적 발언이 과거 인종차별 발언과 차이가 있음을 간과했다.  

    트럼프가 지속적으로 공격한 대상은 소수인종이라기보다 불법이민자였다. 미국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백인 노동계급 가운데 불법이민자가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응답한 유권자는 대부분 트럼프를 지지했다. 반면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은 클린턴을 지지했다. 트럼프 지지자의 79%가 불법이민자 문제가 심각하다고 밝힌 반면, 클린턴 지지자는 20%만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인종주의는 옳지 않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지만, 불법체류자 문제에서는 그런 합의가 없다. 이 틈새를 트럼프는 파고들었다. 불법이민자 이슈를 매개로 인종주의와 경제구조 문제를 결합한 것이다.



    불확실성의 시대

    성차별 문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트럼프 지지자도 트럼프에게 여성 혐오 문제가 없다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의 45%가 그의 성추행이 상당한 문제라고 응답했다. 클린턴 캠프는 선거 막판까지 경합 주에서 트럼프의 여성혐오 문제를 부각하는 정치 광고를 내보냈다. 설령 클린턴이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트럼프의 자질 문제를 계속 환기하면 트럼프에게 투표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불거진 제임스 코미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클린턴 e메일 재수사 발언은 도덕적 문제로 트럼프 지지를 망설이던 유권자에게 클린턴의 반대편을 찍을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민주당은 잃어버린 노동계급의 지지를 되찾아올 방안에 골몰할 것이다. 민주당의 행보가 쉽게 예측되는 데 반해 공화당과 트럼프 정부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트럼프를 당선케 한 유권자가 과거 보수 지지층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의 일등공신인 노동계급의 요구는 기존 공화당 지지자와 다르다. 때로는 양자 간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전통적인 공화당 정책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노동계급을 만족시킬 구체적 정책이 무엇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구체적 정책의 효과에 대한 분석으로 들어가면 트럼프 행정부 역시 민주당이 당면했던 정책의 현실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트럼프 정부의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체계화된 이데올로기가 없다.

    다른 어떤 공약보다 실행 가능성이 높은 정책은 불법이민자에 대한 공격적 대응이다. 트럼프는 당선 후에도 적어도 200만~ 300만 명의 불법체류자를 추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사실 오바마 대통령 재임 기간에도 불법이민자 200만 명이 추방됐다. 오바마 행정부는 이를 가능한 한 조용하게 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비슷한 수를 추방하더라도 자신의 업적으로 크게 선전하며 실행할 것이다. 불법체류자 추방은 한인사회와 무관한 이슈가 아니다. 미국 국토안전부가 2012년 발간한 불법이민자 추계에 따르면 한인 불법체류자 수는 23만 명이다. 일곱 번째로 많다. 트럼프의 이민정책은 재미 한인사회에 큰 불안을 야기하고 갈등을 일으킬 개연성이 높다. 트럼프 당선으로 세계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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