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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발렌타인의 사회학

고급 위스키에 취하는 코리아!

접대하는 쪽이나 받는 쪽 “ 발렌타인 정도 돼야” … 부와 권력 과시하는 자리 항상 동반

  •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고급 위스키에 취하는 코리아!

고급 위스키에 취하는 코리아!
12월6일 초저녁 서울 종로구 청진동 한정식집 J, 지방선거 출마를 노리는 A 의원과 측근, 그리고 몇몇 기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수인사를 나눈 뒤 한 참석자가 종업원에게 술을 시켰다. 그때 A 의원이 나섰다.

“내가 가지고 온 술이 있어.” A 의원은 휴대전화로 수행비서를 찾았다. 조금 후 비서는 차 트렁크에 실린 발렌타인 17년을 들고 왔다.

“괜찮지.”

술을 파는 음식점에 술을 들고 들어온 비례(非禮)에도 한정식 주인을 대하는 A 의원의 태도는 당당했다. 여주인도 ‘양해한다’는 듯 눈웃음을 보냈다. 10여명의 참석자들이 발렌타인 한 병을 다 비운 것은 30여분이 지난 후.

A 의원은 다시 대기하던 비서진을 통해 발렌타인 한 병을 더 주문했다. 비서진을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A 의원의 트렁크에는 서너 병의 발렌타인이 더 남아 있었다.



비슷한 시각, 한정식집 J와 20여m 떨어진 또 다른 한정식집 M. 역시 지방선거 출마를 노리는 B 의원이 측근 및 기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B 의원도 이날 트렁크에 실린 발렌타인으로 참석자들을 접대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과 청진동 등 한정식집 골목이 뜨겁다. 며칠 남지 않은 2005년을 기념하는 모임들로 여념이 없다. 정치인은 물론 공직자 및 CEO 등 ‘밥집’을 찾는 부류는 다양하다. 그러나 때와 장소는 달라도 공통적으로 모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있다. 바로 발렌타인이다.

때와 장소는 달라도 모임의 단골 위스키

그들은 이 술로 하나가 되고 술자리를 달군다. 발렌타인은 CEO 및 정치인, 검찰 등 이른바 ‘험한’ 일을 하는 인사들이 선호하는 대표적인 술이다. 대접하는 사람도 대접받는 사람도 ‘발렌타인 정도는 돼야…’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발렌타인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은 공항에서 검증된다. 발렌타인은 인천공항 개항 이래 면세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위스키다. 1위가 17년이고 2위는 30년, 그리고 3위가 21년 등으로 발렌타인 삼형제가 1, 2, 3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조니 워커, 로얄살루트, 글렌피딕 등 명품 위스키는 많다. 그러나 한국 애주가들은 유독 발렌타인에 빠져들고 또 취한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발렌타인의 등장은 권력의 부침과 일정 부분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발렌타인이 우리 사회에 모습을 보인 시기는 1980년 말. 이른바 노태우 정부 초기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당시 박태준 전 총리를 비롯해 김윤환 전 의원,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등과 몇몇 재벌그룹 회장 등 정·재계 실력자들이 ‘목에서 잘 넘어가는’ 이 술의 맛을 알고 지인들에게 한두 병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른바 발렌타인 신화의 시작이다. 특히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발렌타인 30년에 심취, 신화를 증폭시켰다. 최고 권력자가 즐기는 술은 곧 그 추종자들의 관심사로 등장하게 마련. 많은 사람들이 이 술을 찾고 그 맛에 빠져들었다.

고급 위스키에 취하는 코리아!

한 양주 애호가가 자신의 차 트렁크에서 발렌타인을 꺼내고 있다.

눈치 빠른 몇몇 정계 실력자들은 이 술을 계보 관리의 수단으로 삼았다. 차 트렁크에 술을 싣고 다니며 기분 날 때마다 나눠주고 같이 마셨다. 6공의 핵심실세였던 P 씨의 트렁크에 발렌타인 30년이 끊이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시대상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런 문화가 2005년 인사동과 청진동 한정식집 골목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발렌타인은 행운의 위스키다. 한국 정치권력과 먼저 연을 맺었던 시바스리갈, 조니 워커 등 전통적 강호들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고개를 떨궈 상대적으로 마케팅이 편했기 때문이다. 시바스리갈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그날 그 자리(10·26사태)’에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시바스리갈이 그 자리를 함께한 것은 큰 불행이었다. 애주가들은 음모와 공작, 그리고 파워게임이 횡횡했던 그날 그 자리가 주는 부정적 이미지를 시바스리갈에서 떠올렸다. 박정희 이후 등장한 5공 군사정권은 약점을 감추기 위해 맹목적 국수주의에 불을 붙였다. 양주는 사치와 부패, 그리고 타락의 상징물로 각인돼 설 자리를 잃었다. 이후 노태우 정권과 함께 등장한 발렌타인이 10여년 비운 양주 왕좌에 무임승차했다는 지적이 나온 배경이다.

발렌타인은 명품이다. 물론 스스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이미지를 조작한 부분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과시하는 자리에 동반하는 술이란 인식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발렌타인을 만드는 회사도 소수의 오피니언 리더들만 먹는 술이란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 발렌타인이 탄탄한 카리스마를 확보하는 데 일조했다. 권력자들과 오피니언 리더들도 이런 발렌타인의 이미지를 은연중 즐기는 경우가 많다. 발렌타인의 권위는 술을 파는 사람도, 술을 먹는 사람들도 부정하는 경우가 드물다. 12월6일 청진동 밥집에서 술을 먹은 A 의원의 설명이다.

“술을 접대받고 접대를 하는 사람들은 발렌타인 17년은 돼야 술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정치권 술자리를 섭렵한 그의 이런 분석은 의미심장하다. 발렌타인의 상징 조작에 주당들이 맹목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묵은’ 위스키에 대한 한국 주당들의 집착은 유별나다. 술의 고장인 유럽에서는 조니워커 레드, 발렌타인, 파이니스트 등의 6~8년산 정도의 비교적 무난한 위스키가 판매율 1, 2위를 달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다. 12년 이상 된 고급 위스키가 전체 판매량의 85%를 차지한다. 주령(酒齡)이 많다고 좋은 술은 아니다. 그러나 고급주, 명품주에 취한 애주가들은 이런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발렌타인에 취한 한국인들의 자화상을 뒤집어보면 비뚤어진 한국의 이런 음주문화를 활용한 발렌타인의 상술이 엿보인다. 발렌타인을 선호하는 사람 가운데 발렌타인의 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비판적 지적이 나온 것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술 전문가들도 이런 지적에 동의한다. 발렌타인을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한국적 현상이라는 것. 한국 주당들이 발렌타인 17년을 선호하지만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나 유럽의 경우 발렌타인의 판매량은 상대적으로 처진다. 한국 주당들 중 일부에서도 선택의 다양화를 주장하는 목소리들이 커지고 있다.

J&B, 임페리얼, 듀어스, 스카치 블루 등도 발렌타인과 맞서 서울의 밤을 뜨겁게 달구는 대표적인 고급 위스키들이다.



주간동아 2005.12.27 516호 (p34~35)

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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