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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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마시는 마음에 하늘과 구름 어리네

茶亭 활래정 짓고 茶談과 풍류 즐겨 … 한양 선비부터 쟁쟁한 다인들과 교유

  • 정찬주/ 소설가

    입력2005-06-16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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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 마시는 마음에 하늘과 구름 어리네

    선교장 활래정

    이른 아침, 낙산사에서 나와 강릉 가는 길에 선교장(船橋莊)을 들른다. 선교장의 다정(茶亭)인 활래정(活來亭)을 보기 위해서다. 이른 아침이어선지 선교장에 든 사람은 나그네 일행뿐이다. 서울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친절한 자원봉사자가 안내를 자청한다. 남편을 따라 강릉에 정착했다며 활래정부터 설명하기 시작한다. 봉사에서 우러난 말은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때마침 활래정에 비치는 아침 햇살이 봉사자의 마음처럼 곱다. 활래정이란 다정의 이름은 송나라 주자(朱子)의 ‘관서유감(觀西遺感)’이란 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작은 연못이 거울처럼 펼쳐져/ 하늘과 구름이 함께 어리네/ 묻노니 어찌 그같이 맑은가/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 活水來).

    활래정 연못의 근원은 선교장의 뒷산 태장봉이다. 태장봉의 계곡 물이 연못으로 흘러와 늘 맑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물은 다시 경포호로 들어가는데, 오은거사(鰲隱居士) 이후(李 )가 활래란 말을 빌려온 이유는 수신(修身)을 이야기하고 있음일 터다. 마음이 청정하여 거울처럼 되면 하늘과 구름이 오롯이 찾아드는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가 아닐까.

    활래정은 창덕궁의 부용정을 모방해 지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다정 중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활래정 처마 밑에는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시가 어지러울 만큼 즐비하게 붙어 있다. 추사 김정희에서부터 근세의 몽양 여운형까지 많은 다인(茶人)들이 시화를 남겼다. 그중에서도 오천(烏川) 정희용(鄭熙鎔)의 칠언시에는 당시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조선 후기 선비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전략) 느지막이 휘장 치고 동자 불러 차 한잔 얻으니/ 난간에는 퉁소 부는 객이 있어차향 속에 잠겨 있네/ 그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 번이나 티끌세상이 헛되이 긴 줄 알겠구나.



    창덕궁 부용정 모방한 건물

    동자가 차를 달여 나르는데, 다정의 난간에는 퉁소를 부는 객이 있고, 주인과 손님이 마주 앉아 정겹게 다담(茶談)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활래정을 지은 오은은 강릉에 터를 잡아 선교장을 지은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의 손자인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만석의 농토를 재력 삼아 풍류를 즐긴 은둔거사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풍류는 격조가 있어 한양의 선비들이 험준한 대관령을 넘어 선교장을 찾아왔는데, 특히 추사는 홍엽산거(紅葉山居)라는 편액과 병풍, 다시(茶詩)를 남겼다.

    차를 마시는 전용공간인 다정이, 그것도 궁궐의 누각인 부용정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것은 차문화의 전성기를 상징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사실 활래정은 순조 16년(1816), 오은 나이 46세에 지어졌으니 당시는 다산초당의 정약용, 일지암의 초의선사, 정조의 부마(사위)인 해거(海居) 홍현주, 다시를 가장 많이 남긴 자하(紫霞) 신위 등 쟁쟁한 다인들이 차를 주고받으며 교유했던 시대인 것이다.

    나그네는 문득 창덕궁 부용정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고 만다. 언젠가 부용정을 관리하는 사람이 종교적 신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못의 연을 다 뽑아버렸다고 해서 법정스님과 함께 비 오는 날 현장 확인(?)에 나선 적이 있었다. 스님은 사실을 확인하고 어느 신문에 칼럼을 게재하여 곧 원상복구됐지만 연꽃이 무슨 죄가 있었는지 씁쓸하다. 차 한잔에 편견을 버리는 것도 다인의 정복(淨福)이리라.

    가는 길양양에서 7번 국도를 따라 강릉 방향으로 가다 오른쪽으로 꺾어 경포대 어귀에 있는 경포동사무소를 지나 2분 정도 가면 선교장에 다다른다.



    茶人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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