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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행창의 자전거 유럽 기행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코펜하겐 거리 건축물에선 역사의 깊이 ‘물씬’… 배에서 만난 친구 집에서 행복한 체류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여명 무렵 바라본 코펜하겐시 청사. 농가 뜰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조랑말. 선상에서 바라본 코펜하겐시 전경.(왼쪽부터)

겨울로 접어드는 북유럽의 기후 탓에 노르웨이 횡단 계획을 훗날로 미룬 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가는 여객선에 자전거를 실었다. 축제 분위기가 한창인 선실을 뒤로하고 객실로 돌아와 몸을 누이니, 3개월 가까운 여정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간다.

이제 또 새로운 나라다! 도착을 알리는 방송에 일어나 선상에 올랐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잇는 10km가 넘는 거대한 은빛 다리 앞 바다 가운데로 길게 늘어선 풍차들이 덴마크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준다. 화창한 아침 햇살 아래 빛나는 중세식 교회 탑들이 역사의 깊이를 더하는 코펜하겐 시내. 코펜하겐보다 훨씬 북쪽인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위도 선을 네 개나 내려온 남쪽이어선지 따뜻한 기온이 피부로 느껴졌다.

코펜하겐은 바이킹이 세운 나라 가운데 가장 유서 깊은 입헌군주제 왕국인 덴마크의 수도. 중세 시절 수백년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한 발틱 연안 북유럽 일대를 석권했던 막강 덴마크 왕국의 중심부다. 시 북동쪽에 있는 연안 부두 터미널을 벗어나, 작은 만(灣)을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를 2km 정도 달리다 바닷가에서 상당히 눈에 익은 작은 동상을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아직 차가움이 묻어있는 아침 햇살을 등에 업은 채 짧은 그림자를 떨구고 있는 주인공은, 그 유명한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 인어공주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인어공주’의 인지도에 비한다면 의외로 작은 동상이 아닐 수 없다.

유럽 미학(美學)의 선조 격인 그리스 미학의 상징, 팔등신 비너스상의 구조를 본뜬 듯한데 어딘지 어색하다. 동상 앞으로 바짝 다가가 벌써 수십년 전에 읽은 안데르센 동화집, 그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도통 떠오르질 않는다. ‘뭐가 다른 것일까’하고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문제가 있는 곳에 답이 있게 마련인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처녀 가슴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다가, 인어공주 동상이 또다시 사라지면 어떻게 할 거냐!”며 내 쪽을 향해 걸어왔다.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 인어공주 동상 앞 도로에 선 필자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 ‘인어공주’ 동상과의 만남



“방금 ‘또다시’라고 했는데, 이 동상이 언제 사라진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 왈,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인어 이야기에 근거하여 세워진 ‘진짜’ 인어상은 꼭 30년 전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온 덴마크가 떠들썩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 아직도 그 인어상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현재 있는 동상은 도난 이후 코펜하겐 시에서 새로 세운 것이라니, 역시 뭔가 사연이 있는 인어상이었던 셈이다.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냐고 묻기에, 몇 년 전부터 세계일주를 목표로 여섯 대륙을 몇 개 구간으로 나누어 한 구간씩 여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1년 전에 지병으로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현재 요양 중인데, 조만간 집을 팔아 10년간 계획으로 자전거 세계일주를 할 생각이란다. 대단한 결심이 아닐 수 없다. 시내를 안내해주겠다는 그의 제안에 우리는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1년 내내 흐린 잿빛 하늘로 알려진 덴마크인데, 운이 좋았는지 이날만큼은 청명한 늦가을 하늘빛을 보여주었다. 하늘색만큼이나 투명한 햇살이 중세풍 그윽한 코펜하겐 거리의 중후한 색상을 한층 선명하게 비추고 있다. 과연 듣던 대로 과거와 현대가 맞물려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다색의 문화와 역사가 생동감 있게 존재하는 현재진행형 국제도시가 아닐 수 없다.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에게조차 낯설지 않은 푸근한 그 뭔가가 느껴졌다.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코펜하겐 옛 시가지로 이어지는운하. 덴마크 친구 시몬 가족과 함께한 필자.(왼쪽부터)

금세 친구가 된 그는 “여행자용 숙소보다는 내 집이 편할 테니 함께 가자”고 제안해왔다. 하지만 나는 코펜하겐에 도착하면 들르기로 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사양했다. 우리는 언젠가 지구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아무런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은 채 헤어졌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사람은 또 우연한 인연으로 다시 만난다. 이것이 길을 떠나온 이가 갖는 믿음이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코펜하겐에 도착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엷은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룻밤 머물 둥지를 찾아야 한다. 헬싱키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여객선에서 만났던 시몬이라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시몬은 무척 반갑게 맞아주었다. 19세기 중엽에 건축되었다는, 사각형 정원으로 둘러싸인 빌라 형식의 시몬네 집은 유럽적 고풍스러움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저녁식사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는 시몬의 어머니는 무사히 잘 도착한 것을 축하하자며 어디서 구했는지 일본 매실주까지 꺼내왔다. 동화 속에 나오는 천사 같은 이미지에, 지적이면서도 자상해 보이기까지 하는 시몬의 어머니는 젊은 우리보다 더 유창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정한 시몬 가족과의 대화는 자정이 넘도록 이어졌다. 가족, 그것은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일 것이다. 낯선 사람을 자연스레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해주는 이들과의 만남도 여행자로서는 다시 느낄 수 없는 행복이다.

떠나는 날 아침, 누구보다도 아쉬워한 사람은 시몬의 어머니였다. 긴 여행에 지칠 때면 언제든지 덴마크 엄마와 코펜하겐 가족들이 기다리는 이곳으로 다시 오란다. 언젠가 다시 만날 코펜하겐의 내 가족, 방랑자에게는 과분한 ‘가족’이라는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선물을 얻고 떠난다.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코펜하겐 시내를 벗어나, 바닷가에 떠오르는 태양을 친구 삼아 남쪽으로 이어진 국도 151호선에 접어들었다. 다음 목적지, 독일로 가는 배편이 있는 덴마크 최남단 롤란 섬 로드비하겐까지는 일직선으로 약 160km 거리다. 들판 사이로 이어진 국도엔 차량이라고는 거의 없고, 국도를 따라 자전거 전용도로까지 이어지고 있어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환상적인 코스다.

국도변 민가 부근서 하룻밤 … 情 담긴 토스트 선물받아

평화로운 농촌 뜰 사이를 달리다 날이 저물었다. 국도변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따라 가보니,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민가가 나타났다. 아이들이 뛰노는 부엌에서는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창문가에 노크를 하고, 집 부근에서 하룻밤 야영할 수 있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등잔불을 밝히고 취사 준비를 하는데 누군가 텐트 앞에서 부르는 소리가 난다. 나가보니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물병 두 개와 비닐에 싼 뭉치를 들고 서 있었다. 따뜻하게 구운 토스트 몇 개와 작은 햄 통조림에 치즈까지 들어 있다. 소박한 인정이 담긴 음식이다.

‘풍차’가 맞이하고 ‘인어공주’가 배웅 인사

시민들이 여가를 즐기는 코펜하겐 옛 시가지 광장.

다음날 아침, 아직 불이 꺼진 채인 창문가를 향해 하룻밤 잘 지내고 간다는 인사를 남기고 희미한 새벽녘 국도에 올랐다. 안개 자욱한 벌판 저만치 농가 뒤에서, 외로운 움직임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풍차가 새벽길을 달려가는 이방인을 바라보고 서 있다.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은 하늘을 이고 오전 한나절을 달린 끝에, 정적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바닷가 소도시 로드비하겐에 도착했다.

이제 독일 땅 푸트가르덴이 넘어지면 손 닿을 거리에 있다. 나라 사이의 이동이라기보다는 조그만 섬과 육지를 잇는 통학용 여객선에 오른 느낌. 차가운 바람이 부는 선상 너머로 덴마크 하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선실로 내려왔다. 떠남에는 언제나 아쉬움이란 여운의 동반자가 같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추억을 간직할 수는 있어도, 그 속에 안주할 수는 없다. 방랑자의 길은 그렇게 계속된다.



주간동아 2005.02.01 471호 (p74~75)

  • 글·사진=행창/ 승려 haengchang17@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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