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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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사법 개혁 배울 것 많네

대법원 판사들 배심제 등 커다란 관심 … 국민들 사법 참여 확대 노하우 ‘타산지석’

  • 정호재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05-01-19 17: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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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사법 개혁 배울 것 많네
    사법 체계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그 나라와 본격적인 교류가 가능해집니다.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원만하게 해결 절차를 모색할 수 있지요.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에서 여타 분야의 발전에 비해 사법 교류는 미미하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근래 러시아는 형사재판제도를 개선하고 배심제를 확대하는 등 고강도의 사법 개혁을 추진해왔는데 우리가 참고해야 할 대목으로….”

    1월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의 한 소회의실. 법조인들로 보이는 참석자들이 정태익 전 주러대사(61)가 풀어놓는 ‘새로운 동북아 질서와 한러관계’란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이날 모임은 2004년 8월 대법원 판사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러시아법 연구회’의 다섯 번째 발표 자리.

    ‘대한민국 판사가 러시아 사법제도에 관심을 갖는다?’ 당연히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옛 소련은 적대진영을 대표한 초강대국이었다. 그리고 공산독재 국가의 후예가 ‘선진적’ 사법제도를 갖췄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생경하기 때문이다.

    연구회의 인적 구성 역시 전례 없이 파격적이다. 법원행정처 이광범 송무국장(연구회장ㆍ사시 23회)과 법원행정처 김상준 기획조정심의관(사시 25회)을 비롯해 법과대학 교수, 변호사, 사법연수원생, 시민단체 간사와 심지어 법조 기자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른바 러시아의 사회시스템 전반을 조망해보기 위한 광의의 법조연구 모임인 셈이다.

    공산독재 국가 선진적 사법제도



    “러시아와의 사법 교류를 대비한 측면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가장 근래(1993년)에 배심제를 도입한 나라가 러시아이기 때문에, 이 점이 러시아 법 연구의 필요성을 높인 까닭입니다.”(법원행정처 김유진 송무심의관)

    국내에서 매번 반복되는 ‘사법 개혁’의 가장 큰 물줄기는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사법 구조를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 첫 단추가 로스쿨을 통한 다양한 법조 인력의 원활한 수급, 두 번째가 바로 배심ㆍ참심제로 대표되는 국민의 사법 참여 확대 정책이다.

    러시아 사법 개혁 배울 것 많네

    2007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될 배심ㆍ참심제를 무리 없이 정착시키기 위한 대법원과 법조인들의 움직임이 본격화되기 시작됐다.2004년 8월26일, 사법개혁위원회 주도로 서울중앙지법에서 처음 열린 배심원 모의재판 모습.

    2004년 12월 활동을 끝마친 사법개혁위원회(위원장 조준희ㆍ이하 사개위)는 2007년부터 5년간 전국적으로 배심ㆍ참심제의 시범 시행을 확정짓고 세부 내용을 대통령 직속 사법제도개선추진위원회(위원장 한승헌ㆍ이하 사개추위)로 넘겼다(상자기사 참조). 앞으로 2년 뒤면 우리도 영화에서나 구경했던 시민의 재판 참여 모습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정 시한이 촉박해지자 오히려 대법원 쪽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전 세계 57여개 나라의 국민사법참여제도를 연구하기 시작했지만, 이 국가들은 이미 수세기 혹은 수십년 전부터 배심ㆍ참심제를 도입해왔기 때문에 제도적인 특징 이외에 손에 잡히는 노하우를 얻기 힘들었다. 이 같은 이유가 러시아 사법체계를 연구 대상으로 삼은 소련 붕괴로 배경으로 작용한 것이다.

    91년 소련 붕괴로 개혁과 개방의 파고를 맞이한 러시아는 크렘린 주도 아래 93년 대대적인 사법 개혁에 돌입했다. 우리와 다른 점이라면 볼셰비키 집권 이전인 제정러시아 시대(1864년) 이미 배심제를 도입해 40여년간 운영해본 경험을 갖고 있으며, 공산시절에도 참심제와 유사한 사법제도를 운영해왔다는 것이다. 우리와 무관한 듯한 러시아 상황이지만 비슷한 대목도 적지 않다. 우선, 대륙법 체계 속에서 개혁 개방 이후 미국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배심제도를 도입했다는 점과 국가권력에 의한 위로부터의 사법 개혁을 하는 점이 그렇다.

    “뿐만 아니라 만장일치의 결론을 요하는 미국식 배심제보다도 다수결을 따르는 러시아식 배심제가 우리 시스템에 맞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주대 법학부 김영옥 교수)

    사법제도 개혁 이후 러시아에서 벌어진 변화는 무엇일까. 러시아인들은 과거 공산주의 시절에 자조적으로 “판사들이 무죄 판결문을 쓸 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검찰과 법원의 공생관계가 심각했다. 무죄 판결률이 0.3%를 밑돌았는데 이는 검찰 기소내용이 거의 100% 법원에 의해 그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 개방 이후에도 법조 인력에 대한 낮은 대우와 최악의 경제상황 때문에 “고문과 비리경찰이 횡행하고 돈을 줘야만 무죄가 나온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이에 옐친 대통령은 93년 전격적으로 배심제를 부활시켰다. 독자적 결정력을 가진 배심원단은 검찰의 조악한 증거들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부패한 판사들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형사사건의 무죄율이 10%까지 오르기 시작했다(참고로 우리나라 무죄율은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2002년 1.07%에서 2004년 2.1%까지 증가했다. 이는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된 결과라는 평가다). 93년 러시아의 89개 지역 중 9개 지역에서 시작돼 2003년에는 러시아 전 지역으로 확대 시행됐다.

    제도보다는 운영이 더 중요

    김상준 부장 판사는 “국민사법참여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증거인정 등의 제도를 엄격하게 가다듬고 혹시 모를 부작용에 대비해야겠지만, 역시 제도보다 운영이 더 중요해 보인다”며 “러시아의 상황을 검토해보니 훨씬 안정된 우리 사회가 배심제를 더 잘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사개위의 안은 5~9명의 배심을 구성해 1심 형사재판에 적용하는 것으로 유럽식 참심제보다 미국식 배심제에 더 가깝게 설계돼 있다. 5년간의 시범 시행을 거쳐 우리 실정에 가장 맞는 국민사법참여제도를 확정하게 된다.

    물론 러시아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주장에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는 한 특파원은 “러시아에서는 판사를 매수하는 사례가 많아 배심제가 꼭 필요했다”면서도 “도입 이후 사법환경이 훨씬 좋아졌지만 워낙 열악한 수준에서 향상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비슷한 성과를 내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우리의 지나친 ‘연고주의’를 배심제의 가장 큰 걸림돌로 예상하기도 한다.

    4회 모임에서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타난 러시아의 배심제도’에 대해 발표한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이지은 간사(36)는 “급변하는 정치상황 속에서 진행된 러시아의 사법 개혁이 우리와 비슷한 면이 많다”면서 “일반적 예상과 달리 러시아의 상황까지 연구해가며 배심제 도입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대법원 판사들을 지켜보면서 사법개혁 의지를 공감할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4년 6월에는 ‘러시아법 연구회’를 구상한 대법원 소속 판사들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배심제도를 견학하는 등 사법 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사법부는 얼마 전 사상 최초로 러시아 연수 법관을 선발, 파견하기도 했다. 인천지법 소속 임태혁 판사(사시 35회)가 그 주인공으로 과거 미국과 서유럽에 한정됐던 사법 교류의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는 역할을 수행할 전망이다.



    배심제(陪審制)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직업 법관과 독립하여 사실 문제(형사사건에서는 유·무죄의 판단)에 대한 평결을 내리고, 법관이 사실 판단에 대한 평결 결과에 구속되어 재판하는 제도. 11세기경 영국에서 기원하였으며, 오늘날 형사배심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러시아 스페인

    홍콩 스리랑카 사이판 등 50여개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러시아와 스페인은 1990년대에 배심제를 부활시켰다.

    참심제(參審制)

    일반 시민인 참심원이 직업 법관과 함께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직업 법관과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사실 문제 및 법률 문제를 모두 판단하는 제도. 유럽대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도로 13세기경 스웨덴에서 시작됐으며 현재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이 대표적인 참심제 시행 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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