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4

2000.10.12

앞 못보는 정책, 부실만 키운다

문제점 개선 없이 또 40조원 추가 조성…자금 배분, 운용의 투명성 확보 급선무

  • 입력2005-06-24 10: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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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못보는 정책, 부실만 키운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엄청난 규모의 공적자금이 투입될 때마다 언론에 가장 많이 등장한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부는 최근 경제팀을 대폭 개편한 후 애초 논의되던 20조∼30조원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공적자금 40조원 추가 조성 방침을 내놓았다. 여론과 정치권의 반응은 생각 밖으로 호의적이었다. ‘추가 조성은 어차피 불가피한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애당초 공적자금의 조성과 운용 등 각각의 단계마다 제기되었던 문제점들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초기 공적자금의 조성 규모 문제. 정부가 98년 5월 공적자금을 조성할 당시 기준으로 삼았던 금융권의 부실여신 규모는 모두 118조원이었다. 6개월 이상 연체된 고정 이하 여신 68조원에다 향후 부실채권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있는 요주의 여신(당시 3개월 이상 연체) 50조원까지 포함한 금액이다. 물론 정부가 여기에 붙인 이름은 ‘부실여신’이 아니라 ‘불건전여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단계부터 부실채권 규모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는 사뭇 달랐다. 서강대 남주하 교수(경제학)는 “국제기준으로 따지자면 (비록 정상 여신이라고 하더라도) 부채 상환능력까지 감안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18조원이라는 수치는 출발부터가 잘못된 것이다”고 지적했다. 남교수는 그동안 이미 ‘금융권의 부실채권 총규모가 정부 발표 수치보다 30조원이나 많다’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놓아 파문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부실 규모 추정을 통한 공적자금 규모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추가 자금 소요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대우사태로 인해 부실이 겹친 투신권의 출자 지원과 부실채권 매입을 위해서만 12조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기도 했다. 종금사 퇴출 과정에서도 예금대지급 등을 위해 10조원 넘는 돈이 들어갔다. 모두 ‘발등의 불’만을 인식했던 결과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공적 자금 배분과 관련해서도 제일 서울은행 등 회생 가능성이 낮은 금융기관에 무작정 자금을 쏟아붓다보니 회생 속도가 늦어질 뿐 아니라 공적자금 회수 전망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부실금융기관이 회생할 기미를 보이지 않다보니 자연히 전반적인 구조조정 진척도에 영향을 미쳐 주가는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결국 증자 지원에 들어간 공적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해놓고도 감독당국이 적극적인 사후 모니터링 역할을 맡지 못한 것도 커다란 오점으로 꼽힌다. 2차 구조조정을 앞두고 있는 금융기관들 입장에서는 채무기업들을 과감하게 도산처리하는 등 채권자로서의 역할을 스스로 충실히 수행하지 못할 것이 뻔한데도 이에 대해 별다른 조처를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채무기업 도산이 금융기관의 부실 심화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금융기관들은 결국 ‘돈 먹는 하마’로 변해버린 것이다.



    공적자금 운용 방식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만큼 40조원 추가 조성 방침 발표 이후에도 시장에서는 향후 공적자금 투입 방식에 적지 않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부는 공적자금 운용 투명성과 관련해 야당의 공격이 잇따르자 40조원 추가조성 방침을 밝히면서 여야가 추천하는 인사가 함께 참여하는 ‘공적자금 관리위원회’를 만들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위원회 구성의 구체적 방법과 위상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위원회가 단순 심의 기구인지 의결 기구인지, 또 공적자금 투입 현황을 어느 정도까지 모니터링하고 지적사항이 드러나면 어디까지의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 ‘아직 검토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아무런 답변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재경부 관계자의 설명.

    그러나 당장 그동안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해왔던 공적자금 투입 기능과 역할 분담에서 불분명한 측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동안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기 위해서는 금융감독위원회가 부실금융기관을 지정하고 예금보험공사나 자산관리공사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면 예보 운영위원회를 열어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하는 방식을 취해왔다. 예보 운영위원회는 단순히 예보 인사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금융통화운영회와 같은, 공적자금에 관한 한 최고의결기구나 다름없다. 그런데 ‘공적자금 관리위원회’가 만들어지면 당장 이 기능을 환수하는 것인지 병행하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부터가 없다. 그나마 운영위원회에는 그동안 정부측과 은행연합회 등 이익단체 이외에 2명의 민간전문가가 참여해 공정성을 보강해왔으나 현재는 이들이 모두 사임해 공석인 상태. 위원회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증언하는 공적자금 투입과 관련 한 심의 내용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재경부장관 위촉으로 예보 운영위원회에 참여했던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공적자금 투입에 관한 한 대부분의 안건이 금감위에서 결정된 채로 넘어오기 때문에 별다른 선택의 권한이 없었다”고 전했다. 김원장은 “실질적으로 예보기금이 지출되는데도 불구하고 예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 대해 상당히 우려하는 분위기였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공적자금 운용방식과 관련해 미국계 금융기관인 JP모건 서울사무소 임석정 소장도 두 가지 점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첫째 정부가 또다시 채권발행 방식을 동원할 경우 회사채 발행 대기 물량이 쌓여 있는 상황에서 시장에 부담을 준다는 것, 둘째 정부에서 현물로 은행에 직접 출자할 경우 성공한 사례가 국제적으로도 없을뿐더러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대규모 공적자금을 수혈받은 서울은행 등에서 다른 우량은행에 비해 임직원들에 대해 마구잡이로 저리 특혜 대출을 해준 도덕적 해이 사례가 국정감사 자료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공적자금 GDP의 40%… 국민 모두의 빚 ‘눈덩이’

    물론 원칙적으로 따지자면 예보나 자산관리공사가 채권발행 형식으로 투입한 공적자금은 정부 입장에서 따지자면 지급보증만을 선 우발채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직접 상환 의무를 진 것이 아니고 이들 기관이 채권을 상환할 수 없을 경우에 비로소 정부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논리도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이들 채권을 보유한 금융기관이나 투자자들에게 해마다 수조원씩 이자를 지급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정부 재정의 몫이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들 채권발행분 역시 국가채무, 즉 나라빚에 포함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적자재정에 시달리는 마당에 뒤늦은 공적자금 투입이 나라살림을 더욱 휘청거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정책 선택의 기회를 놓친 대가다. 그리고 그 대가를 가장 혹독하게 치르는 것은 한명 한명의 납세자들이다. 남주하 교수는 “GDP의 40%가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은 국제적으로도 사례가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정책 실패의 대가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머지않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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