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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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휴전선을 38선보다 북쪽으로 올려놓은 구국의 영웅

전설적인 반격 작전으로 우리 땅을 수호한 故 백선엽 장군을 추모하며

  •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

    입력2020-07-15 11:3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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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백선엽 장군. [뉴시스]

    고 백선엽 장군. [뉴시스]

    7월 10일 한미동맹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살아 있는 전설로 존경받던 백선엽 장군이 향년 100세로 별세했다. 백 장군의 별세 소식에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즉각 성명을 내고 “한국은 백선엽 장군과 영웅들 덕분에 오늘날 번영하는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며 그의 유산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고, 그를 존경하던 수많은 미군 장성 역시 존경하는 스승이자 전우였던 백 장군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위대한 군사 지도자

    미국의 여러 동맹 가운데 하나고, 아시아 작은 나라에 불과한 한국의 한 노장(老將)의 부고(訃告) 소식에 백악관은 물론, 수많은 미군 장성이 앞다퉈 애도와 조의를 표하는 것은 백 장군이 그만큼 한미동맹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정치적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역한 장성들이 백 장군을 애도하고 조의를 표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를 떠나 군인으로서 군인 백선엽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2006년부터 2008년 사이 주한미군사령관으로 재직한 버웰 벨 예비역 대장은 “내 관점에서 백선엽 장군은 대한민국의 아버지이며, 그의 활약은 미국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미국의 국부 조지 워싱턴의 활약과 다를 바 없다”고 평가하면서 “세계의 위대한 군사 지도자이자, 스승이자, 진실한 친구를 잃었다”며 백 장군을 잃은 슬픔을 전했다. 

    직전 한미연합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주한미군 차원에서 백 장군의 생일을 챙기고 평택기지 대강당 이름을 백선엽 강당으로 명명하는 등 백 장군에게 각별한 존경을 표해왔던 빈센트 브룩스 예비역 대장 역시 “나는 수십 년 동안 백 장군을 존경했다. 그의 타계는 한미동맹에 크나큰 손실이고, 진정한 역사의 한 부분을 잃은 것”이라며 슬픔을 표했다. 

    미군 고위 장성들은 백 장군 살아생전 그를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불렀다. 백 장군은 1950년 북한의 불법적 남침으로 풍전등화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해낸 영웅이고, 그의 리더십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군 주요 군사학교 교재에 수록돼 미군 장교들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백선엽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계 최강 군대인 미군의 교육자료에 오르게 한 결정적 계기는 바로 다부동전투였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는 오늘날 경북 칠곡군 가산면 일대에서 1950년 8월 3일부터 29일까지 격렬하게 벌어진 전투였다. 당시 29세 청년으로 준장 계급장을 달고 있던 백 장군은 지연전을 펼치며 8월 3일 낙동강을 건너 예하 11연대를 해평동, 12연대를 낙동리, 13연대를 인동에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하게 했다. 각 연대 앞에는 북한군 15사단과 13사단, 3사단이 몰려오고 있었다. 

    당시 북한군은 격노한 김일성의 독촉을 받고 있었다. 김일성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진격이 막히자 각 사단 야전본부를 직접 돌며 무슨 일이 있어도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 때문에 북한군 각 사단은 T-34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1사단 방어선 전 지역에서 파상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7600명 vs 2만1000명

    다부동 전투 성공 후 1사단장 백선엽 준장(왼쪽), 사단 참모장 석주암 대령(가운데), 미군 포병부 대장 헤틱 대령.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다부동 전투 성공 후 1사단장 백선엽 준장(왼쪽), 사단 참모장 석주암 대령(가운데), 미군 포병부 대장 헤틱 대령.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백 장군의 1사단은 낙동강 일대에 방어선을 치기는 했지만, 전황은 절망 그 자체였다. 1사단은 제대로 된 장비는 고사하고 훈련을 변변치 않게 받은 학도병들을 모두 끌어모아도 병력이 7600명을 넘지 못했지만, 이들을 향해 밀려오는 북한군은 T-34/85 전차와 수백 문의 야포 지원을 받는 2만1000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사단은 8월 3일부터 8일 야간까지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지만,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 우위의 북한군을 막아낼 수 없었다. 결국 1사단은 군단의 후퇴 명령을 받아 다부동 일대로 이동해 백 장군이 지형 정찰 후 직접 선정한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사단의 좌익에는 15연대(13연대 개칭), 중앙에는 12연대, 우익에는 11연대를 배치했고, 치열한 방어전으로 손실된 병력과 장비도 보충 받았다. 그런데 중앙의 12연대가 병력을 보충하고 정비를 하던 중 북한군 13사단이 방어선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인근 감제고지인 수암산과 유학산을 점령해버렸고, 이로 인해 1사단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됐다. 

    북한군이 점령한 수암산과 유학산은 구미, 왜관 일대에서 지대가 가장 높았는데, 이곳을 점령하면 주변 봉우리의 진지를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었다. 수암산과 유학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은 김일성은 전력을 집중해 다부동을 돌파한 뒤 그대로 대구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다부동 전면에 걸쳐 북한군 3개 사단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북한군의 파상 공세를 막기 위해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다부동 일대를 폭격하라고 지시했고, 일본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 폭격기 98대가 하늘을 뒤덮으며 북한군 거점에 융단폭격을 퍼부었지만, 북한군은 기세가 조금 꺾였을 뿐 전력 손실은 크지 않았다. 

    북한군은 밤낮으로 파상 공세를 이어갔고, 결국 8월 20일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하며 밤낮으로 싸우던 11연대 1대대 진지가 돌파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군 방어선이 뚫렸다는 소식을 들은 미8군 사령부는 국군 11연대 1대대 좌측 능선에 있던 27연대 병력이 포위되기 전 병력을 뒤로 빼겠다고 한국군 측에 통보해왔다. 미 27연대가 빠지면 방어선은 대구까지 밀려날 상황이었고, 절체절명의 순간 백선엽 장군은 결단을 내렸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그는 11연대 2대대가 지키던 진지를 찾아갔다. 이들은 이틀째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된 공세 탓에 잠은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기진맥진해 있는 상태였다. 백 장군은 후퇴하려는 병사들을 가로막고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미군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우리가 물러서면 되겠나.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물러서면 너희가 나를 쏴라.” 

    사단장이 선두에 서 돌격을 명하자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백 장군의 뒤를 따랐다. 사기충천한 2대대 병사들은 8월 21일 488고지를 탈환했고, 여세를 몰아 유학산과 수암산을 모두 탈환했다. 한 달여에 걸친 격전 끝에 다부동지역은 국군과 북한군의 시신 8000여 구로 뒤덮였다. 

    3배 넘는 적을 상대로 다부동을 지켜낸 백 장군은 8월 28일 철수 명령을 받고 미 육군 제1기병사단에게 다부동 방어선을 인계한 뒤 부대 재정비를 위해 후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미군이 북한군의 9월 대공세에 밀려 다부동을 빼앗기자 다시 1사단을 이끌고 다부동을 탈환하며 적의 공세를 저지했다. 

    1사단이 다부동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낸 덕분에 유엔군은 전력을 재정비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 전세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었고, 백 장군은 1사단을 이끌고 반격으로 전환해 파죽지세로 북한군을 격파하며 10월 19일 연합군 최초로 평양에 입성하는 눈부신 전과를 세웠다. 

    백 장군의 무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1사단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에 아군 방어선이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속에서도 1사단 전력을 온전히 유지해 퇴각했고, 3월 28일 상관이던 김백일 제1군단장이 전사하자 그의 후임으로 제1군단장에 취임하면서 동부전선 방어 책임을 맡았다.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은 중공군 3개 야전군과 북한군 3개 군단을 동원해 유엔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제1군단의 좌익을 맡고 있던 국군 제3군단이 현리에서 대패하면서 한국은 3군단과 1군단 2개 군단이 포위돼 궤멸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됐다. 

    제1군단은 원통 일대에서 필사적으로 북한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면서 제3군단 병력이 안전하게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백 장군은 11사단 병력을 대관령에 투입해 보급로를 확보하고, 중공군이 강릉비행장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 동부전선 전역의 미군 항공 지원이 끊기지 않도록 조치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대공세를 막아낸 백 장군은 5월 하순부터 역공을 펼쳐 동부전선 전역에서 중공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현재의 휴전선 동부지역이 기존 38선보다 북쪽으로 올라간 것은 이 당시 1군단의 반격 덕분이다.

    나라의 운명을 구한 명장

    요컨대 백 장군은 다부동에서 북한군을 막아 멸망 직전의 대한민국을 한 번 구했고, 강원도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을 막아 한국군 주력부대가 전멸되지 않도록 방어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을 또 한 번 지켜냈다. 대군 수만 명을 이끌며 한 나라의 운명을 구한 명장의 당시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일생을 대한민국 발전과 번영에 헌신했다.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이 돼 부국강병 기틀을 다진 박정희라는 인물을 지키고 키워낸 것도 백 장군이고, 대한민국 후방을 교란하던 빨치산을 토벌하고 치안을 바로잡는 데 큰 공을 세운 것도 백 장군이다. 

    한민족 역사상 어떤 한 개인의 눈부신 공적으로 국란 위기를 극복한 사례는 많다. 그러나 백 장군의 공이 더 돋보이는 이유는 그가 피와 땀으로 지켜낸 것이 한민족 반만년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가져다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안팎으로 시끄러운 7월 어느 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번영의 기틀을 지켜낸 한 영웅을 잃었다. 영원한 안식의 길에 들어선 영웅에게 자유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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