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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이 할머니들 대변한다 생각했던 내가 순진했다”

[인터뷰]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文정부, ‘피해자’ 아닌 ‘정의연’ 중심주의”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정의연이 할머니들 대변한다 생각했던 내가 순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을 지낸 천영우 전 수석이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천영우 TV'에서 당시 위안부 협상 뒷이야기를 공개했다. 그를 21일 오전 만났다. 그는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 해결 자체를 원하지 않는 단체였다”며 말문을 열었다.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해결을 원치 않아 보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나. 

“정대협의 존재근거가 할머니들이다 보니 문제가 해결되면 정대협이 문을 닫아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 진다.” 

-외교안보수석이 직접 위안부 문제해결에 나섰던 배경이 있나. 

“2011년 8월 헌법재판소가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의 외교적 재량권에 속하는 일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어떻든 헌법 기관이 정부에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라고 법적 의무를 부과한 것이어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정치적 문제에서 법적 문제가 된 상황에서 그대로 있으면 정부가 헌법을 위반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해 12월18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교토 한일정상회담에서 의제로 다루기로 했다. 위안부 의제가 한일정상 회담 테이블에 오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천 전 수석은 “하지만 정상회담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회담 전날 저녁, 노다 총리가 주최한 소규모 비공식 만찬이 있었는데 이 대통령이 작심을 하고 이번 회담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참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가 좋아서 내심 기대를 하고 다음날 공식회담에 나섰는데 노다 총리는 일언반구 이에 대한 반응이 없이 다른 소리만 했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이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그게 이후 벌어진 한일관계 내리막의 출발이었다.”

문제해결에 나선 일본 사이토 관방부장관

-그런데 왜 위안부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게 됐나. 

“이듬해 2012년 봄에 사이토 관방부장관이 특사자격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개인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이 높아 보였다. 전통적으로 일본 민주당 좌파들은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갖고 있다. 사이토 장관이 그런 경우였다. 

일본에서 관방부장관은 3선 의원이 하는 꽤 무게감이 있는 자리이다. 향후 총리급인 관방장관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아 국회를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으로도 중량감 있는 인사들이 맡는다. 외무성 차관보다 비중이 높다. 노다 총리나 외무대신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별로 열의가 없었는데 사이토 장관이 나서서 외무성과 총리실을 설득해 나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시 사이토 장관이 내놓은 안이 ‘할머니 한사람 한사람을 주한 일본대사가 직접 만나 총리의 사과 친서와 일본 정부 보상금을 직접 전달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렇다.” 

천 전 수석은 한쪽에서는 일본과의 협상채널을 열어놓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신이 직접 할머니들과 정대협 윤미향 대표를 직접 만났다고 했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그렇게 나선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할머니들을 만나겠다고 하니 주변에서 다 말렸다. 수석이 만나면 나중에 국장급은 만날 수가 없고 혹시 무리한 주장이라도 내세우면 감당하지 못하다는 거였다. 나는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갖고 정상회담에서까지 거론한 건데 수석이 나서야지 그런 식으로 발을 빼면 어떻게 하느냐’는 입장이었다. 우선 피해 당사자들인 할머니들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직접 듣고 싶어 면담을 추진했다.” 

-시간과 장소는? 

“2012년 초 청와대 면회실 2층 카페였다. 처음엔 ‘나눔의 집’을 직접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참모들이 말렸다. 그곳은 정대협이 직접 컨트롤하는 곳이라 할머니들이 편하게 이야기하기 어렵다는 거였다. 그래서 결국 청와대로 모셨다. 이번에 문제제기를 한 이용수 할머니도 계셨던 것 같다.” 

-몇 명이 나왔나. 

“대여섯 분 정도였다. 이름은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외적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진 할머니들이 나왔던 것 같다. 분위기는 좋았다. 할머니들도 청와대 수석이 직접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으니만큼 이번에만큼은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리라는 기대감을 보였다.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당시 그분들 나이가 여든이 넘었으니 길어야 10년 산다고 할 때 ‘시간이 없다’는 거였다. 아무리 좋은 해결책이라도 세상을 떠난 다음에 나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일본으로부터 사과도 보상도 둘 다 받으면 좋겠지만 사과보다는 그동안 고생한 것에 대해 제대로 된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들에게 ‘대통령도 지대한 관심이 있고 수석인 나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대통령과 국민을 설득하겠다”

-그러는 와중에 사이토 안(安)이 나온 거고. 

“사이토 장관이 제시한 ‘총리의 사과편지와 국가예산으로 보상금을 지불하겠다’고 하는 안은 굉장히 진일보한 내용이었다고 판단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일본이 자기들의 정부 예산으로 보상금을 내는 것이니만큼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해 이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설명할 것이라는 것,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노(No)’만 하지 말라는 거였다. 

만약 이것을 약속하면 내가 이 세상 욕을 다 들어 먹더라도 대통령께 건의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전에 고노 총리가 국가책임을 인정했기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 이 정도는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윤미향 대표를 만난 이유는? 

“일본에서 답이 오기 전에 합의가 어떤 방향으로 이뤄질지 모르지만 미리 단체 대표를 만나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나는 이러이런 논의가 지금 한일정부 간에 오가고 있으니 나중에 합의가 이뤄지더라도 찬성이나 지지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내놓고 판을 깰 정도의 반대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나는 일본 정부가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면 정대협이 반대하더라도 밀어붙일 생각이었다. 그게 할머니들을 위해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런 ‘폭탄’을 미해결 상태에서 다음 정부에까지 넘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다.“ 

-윤 대표를 굳이 만날 필요는 없었는데 만났다는 건가. 

“외교부 내에서 반대가 심했다. 큰일 난다, 그러다 다친다는 거였다. 정대협은 이미 당시에도 할머니들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관료들 사이에도 깊게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외교부를 설득했다. 나야 앞으로 공직을 더 할 사람은 아니지만 외교부는 대일(對日) 외교를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니 모든 비난을 내게 하라면서 말이다.”

“친일 프레임에 걸리면 살아남지 못한다”

-새삼스러운 질문이지만, 왜 그런 반응들이 외교부에 팽배했을까. 

“정대협으로부터 ‘친일 프레임’에 걸려 들어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거였다. 공무원들에게 친일 낙인이 찍히면 관료로서의 미래가 있겠나. 정대협의 실체를 알아도 맞붙어 싸우겠다는 ‘간 크고 무모한 공직자’는 없다. 이길 방법도 없고 괜히 상처만 입는다. 최대한 그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차원에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였다. 나 역시 그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지만 최소한 단체의 이해는 구해야겠다,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자는 차원에서 만난 거였다.” 

-당시 만난 윤 대표 반응이 매우 떨떠름했다고 공개했는데. 

“실제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니 이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 해결 자체를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는 그날이 정대협이라는 조직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 아닐까. 나는 정말 열심히 동분서주하며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의였는데 이 사람들은 ‘진짜 해결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태도였다. 최소한 할머니들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한다고 생각했었던 내가 순진했던 셈이다. 정대협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세간의 이야기들을 직접 깨달았던 경험이었다.” 

-이번에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를 보고 ‘터질 것이 터졌다’는 느낌을 받았겠다. 

“모든 성역이란 내부자들의 고발이 있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밖에서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안티들의 광란정도로 여긴다. 사교 집단이란 것도 내부 신자들의 고발이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닌가.” 

그는 “정대협의 변질은 우리 사회 과도한 친일 반일 프레임 속에서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묻혀지고 단체 이익만 도드라지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무조건 반일(反日)만이 대한민국이 추구해야할 가치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 우리 사회에 친일이 있을 수 있다고 보나. 국민 정서상 일본에 대해서는 대부분 반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국익을 얼마나 생각하느냐의 차이 아닌가. 내가 수석을 할 때도 일본 문제가 나오면 관료들은 다들 항일독립투사가 되고 싶어 했다. 

만약 정대협이 좀더 융통성을 발휘하는 입장이었다면 정부로서도 좀더 유연하게 협상 테이블에 나설 수 있었다고 본다. ‘돈 몇 푼에 영혼을 팔았다’는 소리를 계속 들을 바에 정부로서는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2015년 위안부 합의는 사이토 안보다 결코 수준이 높지 않았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재협상하겠다고 하면서 일본에서 받은 돈도 돌려주지 않고 깔아뭉개놓고 있는 상황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외치지만 정의기억연대 중심주의 아닌가.”





주간동아 1240호 (p4~7)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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