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살 난 딸한테 먹을 게 없으니까 옥수숫대라도 먹으라며 한 대 쥐어주고 나왔어요. 돈 벌러 중국 간다고 하면 엄마 손을 놓지 않을 것 같아서 엄마가 산에서 나물 캐고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 했죠. 그때 심정은 말할 여지도 없어요. 남편이 미덥지 않아 동네에 마음 좋은 할머니한테 아이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는데….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온 제가 죄인이죠. 이제라도 만나 정말 다행이에요.”
4월 24일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에서 만난 최영옥(46) 씨. 특실 환자라면 도도할 법도 하건만 병원 관계자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곳 병원장이 탈북하다 동상으로 왼쪽 발가락을 모두 잃은 최씨의 사연을 신문에서 접하곤 재수술을 지원해줬기 때문인 듯했다. 24시간 내내 아팠지만 이제는 이따금씩만 통증을 느낀다는 최씨는 딸 김나나(가명· 21) 씨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서 딸은 자주 코피를 쏟았고 엄마는 그런 딸을 챙기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딸은 탈북 후 지난 6개월 동안 국정원에서 조사받고 하나원에서 탈북자 사회적응 훈련을 받으며 기력을 회복했지만, 아직까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탈북자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어린이교도소 출신이 탈북한 경우는 김씨가 처음”이라며 그곳에서 볼이 패도록 맞은 김씨를 안타까워했다. 기자가 직접 만난 김씨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4월 19일 하나원에서 나와 이제 막 대한민국 국민이 된 딸은 엄마가 한참을 다독이자 굳게 다물었던 입을 조금씩 열었다. 얘기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무 꼬챙이로 항문 파 ‘팽령토’ 꺼내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동. 어느 날 최영옥 씨 집에 낯모르는 남자 김모 씨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당 안팎에서 행실이 좋지 않다고 비난하자 최씨는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김씨와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김씨도 결혼 전날에야 최씨에게 전보로 통보하고 식을 치렀을 정도로 내켜하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일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일하기 싫어하는 남편은 배급을 제대로 받아오지 않았다. 남편 대신 아내가 일하면 될 법하지만 북한 여성 대부분은 주부로 살아가기에 경제력이 없다. 사회동원의 일환으로 농촌지원활동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시댁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며느리가 딸을 낳아 대가 끊겼다고 여기던 시어머니는 갓 태어난 손녀딸을 자기 남편이 입던 속옷으로 둘둘 싸 내팽개칠 만큼 모질었다. 한겨울, 아이를 낳은 지 열흘도 안 된 며느리에게 ‘석탄을 주워오라’ ‘빨래를 해오라’ ‘국수를 받아오라’ 시키는 한편, 불화를 조장해 아들이 며느리를 때리게 만들었다. 김씨는 갓난쟁이 딸을 때려 피를 보는 매서운 사람이었다.
“아빠가 아빠로서 자질을 잃어버린 거죠. 가동(일)을 해야 배급을 받을 수 있는데 가동을 안 하니까 배급이 안 나왔어요. 남들의 절반도 못 받아와서 미음 쒀서 먹고, 그것도 안 되면 풀을 같이 넣어 끓여 먹었어요.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서는 그나마 있던 배급마저 끊겼어요. 그때는 잎갈나무, 잣나무, 느릅나무 등 나무껍질이란 껍질은 다 벗겨 먹었어요. 15리(6km) 길을 걸어가 팽령토라는 흙을 배급받아와 곱게 간 뒤 전을 부치고 빵도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미원’하고 똑같아요. 다만 이걸 먹으면 뒤(똥)를 보기가 어려워 나무 꼬챙이로 항문을 쑤셔서 덩어리진 흙을 꺼내야 해요. 애는 아프다고 울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뒤를 못 보기 때문에 울면서도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었죠.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의 80%는 그렇게 먹고살았어요. 애를 한 번도 배불리 먹여보지 못한 거죠.”
상황을 견디다 못한 최씨는 비밀리에 중국을 드나들며 밥벌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해보리라 결심했다. 마침 절친한 동네 친구가 “중국에서 일할 곳을 주선해주겠다”고 설득했다. 아내의 제안에 남편은 “나라를 배반하고 어떻게 그러느냐”며 삽자루를 휘둘렀지만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자 끝내 허락했다. 그렇게 그는 3개월만 일하다 돌아올 생각으로 탈북했다. 어린 딸은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
“엄마가 어디에 갔는지 몰랐어요. 사흘 동안 엄마 몫으로 호박죽을 남겨놨는데 배고파서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기억은 나요. 배고파 산에 가서 산나물을 뜯고 미나리를 캐서 국수랑 바꿔 먹었지만 굶는 날이 더 많았죠. 당시 학교에 입학하긴 했어요. 학교 간 첫날 ‘가나다라’를 잘 썼다고 선생님께 칭찬받아 기분이 좋았는데, 그다음부터는 학교에서 외화벌이 수단으로 토끼 가죽, 파고철(철) 같은 것을 자주 내라고 해서 못 갔어요. 배고픈데 그것까지 할 수 없더라고요. 학교에서 저를 찾으러 오지는 않았어요.
아빠는 자꾸만 ‘엄마가 너를 버리고 갔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저를 힘들게 한 엄마가 미웠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희 엄마는 죽었다’고 하면 나쁜 감정이 안 들었어요. 돌아가신 분한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러다 열한 살 때 아빠가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고아원에 데려가더니 자신을 삼촌이라고 하곤 ‘야가 부모가 없는데 키워달라’고 말해 그때부터 거기에서 살았어요. 다시 학교에 갔는데 공부를 못하니까 재미없어 안 다녔죠.”
한편 엄마의 중국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배곯던 자식을 보다 못해 나왔는데, 알고 보니 친구가 자기를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며칠 동안 국수를 배불리 먹던 최씨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북송시켜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고, 한족에게 인민폐 8000원(당시 한화 100만 원)에 팔렸다.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간다는 한족 남자가 오누이를 키운다는 말을 듣자 ‘이 아이들이라도 거두면 하늘이 내 아이를 돕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잔돈푼 하나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는 남자와 2년 반 동안 살다 보니 부딪힐 일이 많았다. 의붓딸 역시 아빠가 돈 주고 사온 새엄마를 무시했다.
때마침 잘 알고 지내던 탈북자 이웃이 식당에 나가 용돈벌이를 해보자며 제안했고, 그는 돈을 벌어 자식이라도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포에게 속아 노래방 도우미로 팔렸고, 북송이라는 협박에 시달리며 1년 반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손님 소개로 지금의 중국인 남편을 만난 그는 더는 가슴 졸이며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한국에 홀로 가겠다는 아내를 만류했고, 그는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임신을 했다. 이후 7개월 된 아기를 배 속에 품고 탈북자 친구와 함께 단둘이 한국으로 향했다.
“브로커가 몽골로 데려가서는 사흘만 북쪽으로 올라가 변방대 군인을 만나면 한국대사관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닷새 동안 허허벌판을 걸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3월인데도 날이 무척 추운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들었지만 살려고 계속해서 걸었죠. 그러다 밑이 뜨거워, 보니까 아기가 응애응애 두 번 울더니 울음을 멈춘 채 매달려 있는 거예요. 탯줄을 쭉 뽑으니까 태반이 떨어지더라고요. 감각적으로 아기가 잘못된 걸 알았죠. 정신없었지만 아기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기를 수건으로 싸서 가방에 넣고는, 그 가방을 목에 걸고 걸어가며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추운 날씨에 하혈한 상태로 계속 걸으니 발 주변으로 커다란 얼음이 생겨 걷지 못할 지경이 됐죠. 친구는 그새 얼어 죽었고요.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할 것 같아 아기와 친구를 눕히곤 저도 그 사이에 누웠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변방대 군인이 와서 사진을 찍고, 시체는 놔둔 채 저만 구출해 차에 태웠더라고요. 살려달라고 막무가내로 울부짖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요.”
2006년 3월 23일 중국에서 출발해 4월 10일 한국에 들어온 최씨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6개월간 국군수도병원에서 머물며 왼쪽 발가락을 모두 절단했고 위암 진단을 받아 수술까지 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걷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다. 장애 판정을 받은 그는 지금껏 정부에서 지급하는 최저생계비 40여만 원으로 살아간다.
‘반역자들의 자식’ 철저한 감시
최씨의 남편은 아내가 한국에서 국제결혼 신고를 하고 배우자 초청을 한 뒤에야 비로소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임금 체불이 심해 돈을 손에 쥐지 못했다. 최씨는 근근이 전단지 꽂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푼돈을 모아 그 돈을 브로커에게 보내며 아이를 수소문했다. 꽃제비(노숙인)로 살다 죽었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그때마다 기도했다.
우연히 이북5도청 행사에서 고향 할머니를 만나 아이의 생사를 확인했고, 마침내 2009년 딸과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최씨는 그때부터 더 악착같이 살았다. 건국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문예창작지도사, 한국어지도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딸과 함께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딸의 고아원 생활은 편치 않았다. 아이 70여 명과 함께 생활한 그곳에서는 고철을 주워오라며 할당량을 정해줬는데 그 양을 채우지 못하면 밖에서 자야 했다. 떨어진 고철이 별로 없을뿐더러 많은 아이가 함께 찾다 보니 할당량을 채우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매질을 견디다 못한 딸은 몰래 기차를 탔고, 아빠가 있는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고향에 도착하자 자신을 내친 아빠와 새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여름이라 춥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고, 회령역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공안에게 붙잡혀 어린이교도소라 부르는 회령623호로 끌려갔다.
회령623호의 노동 강도는 고아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탈북한 부모를 둔 ‘반역자의 자식’이 생활하는 이곳은 정치범수용소 다음으로 끔찍한 곳이다. 철조망은 없지만 노동 강도가 세고 감시가 철저하다. 아이 80여 명이 6개의 방에 나뉘어 수용된 채 직원 7명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꽃제비를 단속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꽃제비 상무’ ‘어린이교도소’라고 불렀다. 전국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반역자들의 자식’은 대부분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어린이교도소에 수감된 뒤 출신지 부근의 어린이교도소로 이송된다. 다행히 딸은 고향에서 잡히는 바람에 가장 가혹하다고 알려진 청진시 어린이교도소는 피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부업질을 가요. 두 시간 반 정도 걸어야 밭에 도착하죠. 휴일 없이 일했는데 저는 토요일, 일요일에 쉰다는 걸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어요. 일하느라 배고픈 우리에게 강냉이밥 140g을 줘요. 그런데 강냉이 껍질은 돼지 사료로 써야 하고, 강냉이 눈깔로는 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알맹이만 먹으면 그 양이 얼마 안 돼요. 한 번씩 그 기름을 넣은 기름국을 먹으면 맛있어서…. 허약한 애들은 죽기도 했어요. 배가 고프니까 남자아이들은 돈을 훔쳐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러다 걸리면 직원들이 밥도 못 먹게 밧줄로 많이 때렸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우차를 몰던 직원이 잘 시간에 TV를 보던 저를 발견하곤 벽에 머리를 밀치면서 때렸어요. 순간 쇼크가 와 정신을 잃었죠. 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때려서 제가 잘못했다며 많이 빌었는데도 계속 때렸어요. 조금 아프면 일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며칠을 앓았죠. 직원들은 그렇게 행동해도 다른 직원들한테 욕먹지 않아요. 한번은 비 오는 날 담임선생님이 저희가 앞서 걸어갔다는 이유로 때리는 거예요. 젖은 상태로 맞으니까 여느 때보다 더 아프더라고요. 비 맞으면서 일할 때마다 추워서 엄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마가 없으니까 저는 그저 엄마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코피 쏟는 딸
다행히 2009년 엄마와 전화 연락이 된 딸은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엄마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곧 있으면 엄마가 예전처럼 석탄을 팔아 큰 빵을 사다줄 것 같았다. 19세가 돼 어린이교도소를 나와야 했고 2010년 9월 한약을 재배하는 동약관리소에서 건설 업무(막노동)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생활한 9개월은 평탄했다. 다만 한국 무술영화를 보다 보안원(담당 형사)에게 걸려, 안전부에 배치돼 3개월 동안 취조당하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결국 최씨는 딸이 많이 맞아 허리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고 브로커를 여러 번 띄웠다. 딸은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모녀는 마침내 중국에서 재회했다. 심신이 지친 딸은 엄마를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자다 금방 깨서 그런지 엄마를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옆에서 ‘너희 엄마야’라고 일러주니까 기억이 좀 나는 것 같았어요. 북한은 마흔이 넘으면 할머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나이도 많이 들고 남한에서 잘 먹어 뚱뚱한 할머니처럼 생긴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단정하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예뻐서 좋았어요(웃음).”
최씨는 딸을 알아봤다. 전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를 보면서 자기 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열네 살이나 될까 말까 한 아이의 작은 체구를 보니 가슴이 멨다. 일하느라 귓구멍까지 새까맣게 탄 딸과 만나 해후의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딸을 안전한 나라로 보내야 했다. 자꾸만 코피를 쏟는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열흘치 약을 지어준 엄마는 딸을 태국으로 보내며 가슴을 졸였다.
“확실한 브로커에게 아이를 맡겼다곤 하지만 딸이 한국에 들어온다고 장담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만 했어요. 정작 태국에 들어갔다고 하니 그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빨리 한국에 들어오게 해 병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중국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진찰하니까 영양실조에 스트레스가 겹쳐, 피가 부족한 상태라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암송을 잘해 칭찬받곤 했지만 머리를 많이 맞아 이제는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딸. 감자반찬과 두부찌개만 해달라고 하는 아이를 보니 마음 아프다는 엄마. 모녀는 병실에 나란히 앉아 지난 세월을 더듬다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바라봤다. 엄마는 딸에게 “엄마 노릇을 못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할 처지가 못 된다”면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딸은 이렇게 말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런 순간을 그토록 기다렸는데 엄마를 병원에서 만나니까 마음이 아파요. 북한에 있을 때는 엄마가 잘 살고 건강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와보니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엄마 병을 고쳐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어떻게든 그분들께 보답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제가 잘 사는 게 보답이 될 것 같아요. 헛되지 않게 살겠어요. 이렇게 말한 내용이 알려져 북한 어린이교도소에 있는 친구들이 밥이라도 마음 놓고 먹었으면 좋겠고요. 아침식사를 해도 배가 고파 점심때가 무척 기다려지거든요. 아직도 그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요.”
4월 24일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에서 만난 최영옥(46) 씨. 특실 환자라면 도도할 법도 하건만 병원 관계자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이곳 병원장이 탈북하다 동상으로 왼쪽 발가락을 모두 잃은 최씨의 사연을 신문에서 접하곤 재수술을 지원해줬기 때문인 듯했다. 24시간 내내 아팠지만 이제는 이따금씩만 통증을 느낀다는 최씨는 딸 김나나(가명· 21) 씨와의 약속을 지키려고 16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에서 딸은 자주 코피를 쏟았고 엄마는 그런 딸을 챙기다 한숨을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딸은 탈북 후 지난 6개월 동안 국정원에서 조사받고 하나원에서 탈북자 사회적응 훈련을 받으며 기력을 회복했지만, 아직까지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
탈북자 인권운동에 앞장서온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은 “어린이교도소 출신이 탈북한 경우는 김씨가 처음”이라며 그곳에서 볼이 패도록 맞은 김씨를 안타까워했다. 기자가 직접 만난 김씨는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4월 19일 하나원에서 나와 이제 막 대한민국 국민이 된 딸은 엄마가 한참을 다독이자 굳게 다물었던 입을 조금씩 열었다. 얘기는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무 꼬챙이로 항문 파 ‘팽령토’ 꺼내
함경북도 회령시 세천동. 어느 날 최영옥 씨 집에 낯모르는 남자 김모 씨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당 안팎에서 행실이 좋지 않다고 비난하자 최씨는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김씨와 결혼하기로 작정했다. 김씨도 결혼 전날에야 최씨에게 전보로 통보하고 식을 치렀을 정도로 내켜하지 않았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일까.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일하기 싫어하는 남편은 배급을 제대로 받아오지 않았다. 남편 대신 아내가 일하면 될 법하지만 북한 여성 대부분은 주부로 살아가기에 경제력이 없다. 사회동원의 일환으로 농촌지원활동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도 받지 못한다.
그렇다고 시댁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며느리가 딸을 낳아 대가 끊겼다고 여기던 시어머니는 갓 태어난 손녀딸을 자기 남편이 입던 속옷으로 둘둘 싸 내팽개칠 만큼 모질었다. 한겨울, 아이를 낳은 지 열흘도 안 된 며느리에게 ‘석탄을 주워오라’ ‘빨래를 해오라’ ‘국수를 받아오라’ 시키는 한편, 불화를 조장해 아들이 며느리를 때리게 만들었다. 김씨는 갓난쟁이 딸을 때려 피를 보는 매서운 사람이었다.
“아빠가 아빠로서 자질을 잃어버린 거죠. 가동(일)을 해야 배급을 받을 수 있는데 가동을 안 하니까 배급이 안 나왔어요. 남들의 절반도 못 받아와서 미음 쒀서 먹고, 그것도 안 되면 풀을 같이 넣어 끓여 먹었어요. 그런데 1994년 김일성이 죽고 나서는 그나마 있던 배급마저 끊겼어요. 그때는 잎갈나무, 잣나무, 느릅나무 등 나무껍질이란 껍질은 다 벗겨 먹었어요. 15리(6km) 길을 걸어가 팽령토라는 흙을 배급받아와 곱게 간 뒤 전을 부치고 빵도 만들어 먹었는데, 맛은 ‘미원’하고 똑같아요. 다만 이걸 먹으면 뒤(똥)를 보기가 어려워 나무 꼬챙이로 항문을 쑤셔서 덩어리진 흙을 꺼내야 해요. 애는 아프다고 울지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뒤를 못 보기 때문에 울면서도 그렇게 해줄 수밖에 없었죠. 당시 우리 동네 사람들의 80%는 그렇게 먹고살았어요. 애를 한 번도 배불리 먹여보지 못한 거죠.”
상황을 견디다 못한 최씨는 비밀리에 중국을 드나들며 밥벌이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그렇게 해보리라 결심했다. 마침 절친한 동네 친구가 “중국에서 일할 곳을 주선해주겠다”고 설득했다. 아내의 제안에 남편은 “나라를 배반하고 어떻게 그러느냐”며 삽자루를 휘둘렀지만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자 끝내 허락했다. 그렇게 그는 3개월만 일하다 돌아올 생각으로 탈북했다. 어린 딸은 그때의 기억이 전혀 없다.
최영옥 씨와 딸 김나나 씨가 16년 만에 만나 처음으로 찍은 사진(원 안). 탈북 과정에서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잃은 최영옥 씨는 혜민병원의 도움으로 재수술을 받았다.
아빠는 자꾸만 ‘엄마가 너를 버리고 갔다’고 했어요. 그때마다 저를 힘들게 한 엄마가 미웠는데, 동네 사람들이 ‘너희 엄마는 죽었다’고 하면 나쁜 감정이 안 들었어요. 돌아가신 분한테 그런 감정을 갖고 있으면 안 되니까요. 그러다 열한 살 때 아빠가 함경북도 청진에 있는 고아원에 데려가더니 자신을 삼촌이라고 하곤 ‘야가 부모가 없는데 키워달라’고 말해 그때부터 거기에서 살았어요. 다시 학교에 갔는데 공부를 못하니까 재미없어 안 다녔죠.”
한편 엄마의 중국행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배곯던 자식을 보다 못해 나왔는데, 알고 보니 친구가 자기를 인신매매단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며칠 동안 국수를 배불리 먹던 최씨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북송시켜 정치범수용소에 보내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았고, 한족에게 인민폐 8000원(당시 한화 100만 원)에 팔렸다.
아내를 잃고 홀로 살아간다는 한족 남자가 오누이를 키운다는 말을 듣자 ‘이 아이들이라도 거두면 하늘이 내 아이를 돕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잔돈푼 하나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하는 남자와 2년 반 동안 살다 보니 부딪힐 일이 많았다. 의붓딸 역시 아빠가 돈 주고 사온 새엄마를 무시했다.
때마침 잘 알고 지내던 탈북자 이웃이 식당에 나가 용돈벌이를 해보자며 제안했고, 그는 돈을 벌어 자식이라도 찾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도 동포에게 속아 노래방 도우미로 팔렸고, 북송이라는 협박에 시달리며 1년 반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손님 소개로 지금의 중국인 남편을 만난 그는 더는 가슴 졸이며 살 수 없었다. 하지만 남편은 한국에 홀로 가겠다는 아내를 만류했고, 그는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임신을 했다. 이후 7개월 된 아기를 배 속에 품고 탈북자 친구와 함께 단둘이 한국으로 향했다.
“브로커가 몽골로 데려가서는 사흘만 북쪽으로 올라가 변방대 군인을 만나면 한국대사관에 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닷새 동안 허허벌판을 걸어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3월인데도 날이 무척 추운 데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힘들었지만 살려고 계속해서 걸었죠. 그러다 밑이 뜨거워, 보니까 아기가 응애응애 두 번 울더니 울음을 멈춘 채 매달려 있는 거예요. 탯줄을 쭉 뽑으니까 태반이 떨어지더라고요. 감각적으로 아기가 잘못된 걸 알았죠. 정신없었지만 아기와 떨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기를 수건으로 싸서 가방에 넣고는, 그 가방을 목에 걸고 걸어가며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추운 날씨에 하혈한 상태로 계속 걸으니 발 주변으로 커다란 얼음이 생겨 걷지 못할 지경이 됐죠. 친구는 그새 얼어 죽었고요. 결국 끝까지 가지 못할 것 같아 아기와 친구를 눕히곤 저도 그 사이에 누웠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변방대 군인이 와서 사진을 찍고, 시체는 놔둔 채 저만 구출해 차에 태웠더라고요. 살려달라고 막무가내로 울부짖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요.”
2006년 3월 23일 중국에서 출발해 4월 10일 한국에 들어온 최씨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6개월간 국군수도병원에서 머물며 왼쪽 발가락을 모두 절단했고 위암 진단을 받아 수술까지 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걷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다. 장애 판정을 받은 그는 지금껏 정부에서 지급하는 최저생계비 40여만 원으로 살아간다.
‘반역자들의 자식’ 철저한 감시
최씨의 남편은 아내가 한국에서 국제결혼 신고를 하고 배우자 초청을 한 뒤에야 비로소 입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해도 임금 체불이 심해 돈을 손에 쥐지 못했다. 최씨는 근근이 전단지 꽂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푼돈을 모아 그 돈을 브로커에게 보내며 아이를 수소문했다. 꽃제비(노숙인)로 살다 죽었다는 얘기도 들렸지만 그때마다 기도했다.
우연히 이북5도청 행사에서 고향 할머니를 만나 아이의 생사를 확인했고, 마침내 2009년 딸과 통화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를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최씨는 그때부터 더 악착같이 살았다. 건국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문예창작지도사, 한국어지도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딸과 함께할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딸의 고아원 생활은 편치 않았다. 아이 70여 명과 함께 생활한 그곳에서는 고철을 주워오라며 할당량을 정해줬는데 그 양을 채우지 못하면 밖에서 자야 했다. 떨어진 고철이 별로 없을뿐더러 많은 아이가 함께 찾다 보니 할당량을 채우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매질을 견디다 못한 딸은 몰래 기차를 탔고, 아빠가 있는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상 고향에 도착하자 자신을 내친 아빠와 새엄마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나마 여름이라 춥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고, 회령역에서 살면서 사람들이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공안에게 붙잡혀 어린이교도소라 부르는 회령623호로 끌려갔다.
회령623호의 노동 강도는 고아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탈북한 부모를 둔 ‘반역자의 자식’이 생활하는 이곳은 정치범수용소 다음으로 끔찍한 곳이다. 철조망은 없지만 노동 강도가 세고 감시가 철저하다. 아이 80여 명이 6개의 방에 나뉘어 수용된 채 직원 7명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꽃제비를 단속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꽃제비 상무’ ‘어린이교도소’라고 불렀다. 전국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반역자들의 자식’은 대부분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어린이교도소에 수감된 뒤 출신지 부근의 어린이교도소로 이송된다. 다행히 딸은 고향에서 잡히는 바람에 가장 가혹하다고 알려진 청진시 어린이교도소는 피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부업질을 가요. 두 시간 반 정도 걸어야 밭에 도착하죠. 휴일 없이 일했는데 저는 토요일, 일요일에 쉰다는 걸 한국에 와서 처음 알았어요. 일하느라 배고픈 우리에게 강냉이밥 140g을 줘요. 그런데 강냉이 껍질은 돼지 사료로 써야 하고, 강냉이 눈깔로는 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알맹이만 먹으면 그 양이 얼마 안 돼요. 한 번씩 그 기름을 넣은 기름국을 먹으면 맛있어서…. 허약한 애들은 죽기도 했어요. 배가 고프니까 남자아이들은 돈을 훔쳐 그 돈으로 먹을 것을 사서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는데, 그러다 걸리면 직원들이 밥도 못 먹게 밧줄로 많이 때렸어요. 저 역시 그랬고요.
우차를 몰던 직원이 잘 시간에 TV를 보던 저를 발견하곤 벽에 머리를 밀치면서 때렸어요. 순간 쇼크가 와 정신을 잃었죠. 하지만 그 다음 날에도 때려서 제가 잘못했다며 많이 빌었는데도 계속 때렸어요. 조금 아프면 일할 수 있는데 너무 많이 맞아서 며칠을 앓았죠. 직원들은 그렇게 행동해도 다른 직원들한테 욕먹지 않아요. 한번은 비 오는 날 담임선생님이 저희가 앞서 걸어갔다는 이유로 때리는 거예요. 젖은 상태로 맞으니까 여느 때보다 더 아프더라고요. 비 맞으면서 일할 때마다 추워서 엄마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마가 없으니까 저는 그저 엄마가 돌아가신 줄만 알았어요.”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코피 쏟는 딸
다행히 2009년 엄마와 전화 연락이 된 딸은 ‘나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엄마 만날 날을 기약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곧 있으면 엄마가 예전처럼 석탄을 팔아 큰 빵을 사다줄 것 같았다. 19세가 돼 어린이교도소를 나와야 했고 2010년 9월 한약을 재배하는 동약관리소에서 건설 업무(막노동)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생활한 9개월은 평탄했다. 다만 한국 무술영화를 보다 보안원(담당 형사)에게 걸려, 안전부에 배치돼 3개월 동안 취조당하면서 건강이 악화됐다. 결국 최씨는 딸이 많이 맞아 허리도 제대로 쓸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고 브로커를 여러 번 띄웠다. 딸은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모녀는 마침내 중국에서 재회했다. 심신이 지친 딸은 엄마를 쉬이 알아보지 못했다.
“자다 금방 깨서 그런지 엄마를 봐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옆에서 ‘너희 엄마야’라고 일러주니까 기억이 좀 나는 것 같았어요. 북한은 마흔이 넘으면 할머니거든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나이도 많이 들고 남한에서 잘 먹어 뚱뚱한 할머니처럼 생긴 줄 알았는데 만나보니 단정하더라고요. 우리 엄마가 예뻐서 좋았어요(웃음).”
최씨는 딸을 알아봤다. 전남편을 쏙 빼닮은 아이를 보면서 자기 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열네 살이나 될까 말까 한 아이의 작은 체구를 보니 가슴이 멨다. 일하느라 귓구멍까지 새까맣게 탄 딸과 만나 해후의 기쁨을 나눈 것도 잠시. 딸을 안전한 나라로 보내야 했다. 자꾸만 코피를 쏟는 딸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열흘치 약을 지어준 엄마는 딸을 태국으로 보내며 가슴을 졸였다.
“확실한 브로커에게 아이를 맡겼다곤 하지만 딸이 한국에 들어온다고 장담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기도만 했어요. 정작 태국에 들어갔다고 하니 그다음에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더라고요. 빨리 한국에 들어오게 해 병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중국 병원에 가서 아이를 진찰하니까 영양실조에 스트레스가 겹쳐, 피가 부족한 상태라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거든요.”
암송을 잘해 칭찬받곤 했지만 머리를 많이 맞아 이제는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딸. 감자반찬과 두부찌개만 해달라고 하는 아이를 보니 마음 아프다는 엄마. 모녀는 병실에 나란히 앉아 지난 세월을 더듬다 눈물을 훔치며 서로를 바라봤다. 엄마는 딸에게 “엄마 노릇을 못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할 처지가 못 된다”면서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자라면 좋겠다”고 말했다. 딸은 이렇게 말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이런 순간을 그토록 기다렸는데 엄마를 병원에서 만나니까 마음이 아파요. 북한에 있을 때는 엄마가 잘 살고 건강한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와보니 엄마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더라고요. 엄마 병을 고쳐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어떻게든 그분들께 보답하고 싶어요. 무엇보다 제가 잘 사는 게 보답이 될 것 같아요. 헛되지 않게 살겠어요. 이렇게 말한 내용이 알려져 북한 어린이교도소에 있는 친구들이 밥이라도 마음 놓고 먹었으면 좋겠고요. 아침식사를 해도 배가 고파 점심때가 무척 기다려지거든요. 아직도 그곳에 있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