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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 현대家 잔혹사

왕자의 난과 갈라진 운명

장남은 사고사, 4·5남은 자살…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화려한 복귀

왕자의 난과 갈라진 운명

왕자의 난과 갈라진 운명

2001년 3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빈소를 지키는 아들들. 왼쪽부터 몽구, 몽근, 몽헌, 몽준, 몽일. 사진공동취재단

현대그룹의 금융 부문 주축이던 현대증권의 매각은 정몽구-몽헌 형제 간 분란으로 갈라진 현대가(家)의 불행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 쫓겨나다시피 현대그룹을 떠나 현대자동차그룹을 세운 정몽구 회장은 자신의 그룹을 재계 2위로 올려놓은 반면,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황태자’로 낙점받은 정몽헌 회장은 주요 계열사들을 잃고 검찰 수사를 받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운을 맞았다.

조선 초기 왕자의 난 못지않게 세인의 뇌리에 깊이 박힌 현대가 왕자의 난은 2000년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차남 정몽구와 5남 정몽헌 사이에서 벌어진 분쟁을 일컫는다. 당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아버지를 대신해 공동회장으로 그룹을 경영하던 두 형제는 그룹 경영권을 두고 마찰을 빚었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부상한 계기는 2000년 3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의 인사 문제였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그룹 일원이자 정몽헌 회장의 측근이었다. 동생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 정몽구 회장은 3월 14일 밤 기습적으로 이 회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보시킨다.



정몽헌 반격에 정몽구 떠나고…뒤바뀐 운명

왕자의 난과 갈라진 운명
당시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을, 정몽헌 회장은 건설·전자 부문을 가져갈 예정이었는데, 그때 현대차의 위상은 지금처럼 높지 않았던 반면 현대건설과 현대전자는 국내 최고 기업들이었다. 아버지 정주영 명예회장은 처음부터 경영 능력이 두드러졌던 정몽헌 씨를 특히 아낀 것으로 알려졌다. 자동차만으로는 향후 성장가능성을 확신할 수 없던 정몽구 회장 측은 현대증권으로 대표되는 그룹의 금융 부문을 노리고 동생의 측근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배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 정몽헌 회장은 귀국하자마자 자신의 측근이자 아버지의 가신그룹 일원인 이익치 회장,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 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등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정몽구 회장은 26일 아버지를 만나 회장직 복귀 명령을 받아내지만 몇 시간 뒤 정몽헌 회장과 가신그룹은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그 명령을 무효화시켰다. 당시 정 명예회장은 고령으로 판단력이 흐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월 27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직접 현대경영자협의회에서 ‘정몽헌 단독 회장 체제’를 공식 승인하면서 왕자의 난은 정몽헌 회장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정몽구 회장은 2000년 9월 자동차 관련 계열사들을 가지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실시해 현대차그룹을 만들었다. 왕권 다툼에서 패한 왕자가 왕국을 떠나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두 형제의 운명은 이후 완전히 뒤바뀐다. 현대그룹의 모기업이자 상징이나 다름없던 현대건설이 2000년 10월 1차 부도를 맞고 휘청거렸고, 결국 2001년 8월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된다. 현대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성장을 거듭하던 현대전자도 외환위기 당시 LG반도체를 무리하게 인수했다 2000~2001년 반도체시장이 불황을 맞자 빚 10조 원을 지고 결국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당시 사명이 하이닉스반도체로 바뀐 현대전자는 2012년 SK그룹에 인수돼 SK하이닉스라는 새 이름으로 순항을 거듭하고 있다.

심지어 정몽헌 회장 본인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불행한 말로를 맞았다. 아버지의 숙원사업이기도 했던 대북사업과 관련해 4억5000만 달러(약 5000억 원)를 북한에 은밀히 송금한 사건으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 2003년 8월 4일 서울 종로구 계동에 위치한 사옥 12층 회장실에서 투신자살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 증언에 따르면 정몽헌 회장은 대북송금 문제로 대북사업 전반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엇갈리자 크게 고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현대그룹은 정 전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경영을 이어나가고 있으나 각종 대북사업이 중단되는 등 현재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반면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차그룹은 쾌속 순항을 계속하며 재계 서열 2위 지위를 굳혔다. 특히 2011년 현대건설 인수는 과거 현대그룹의 영광을 상징하던 기업을 접수한 것이라 더욱 의미있는 사건이었다. 2010년 당시 매각 절차를 밟던 현대건설을 인수하고자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은 10년 전 왕자의 난 이후 다시 격돌했다. 자금력에서 열세였던 현대그룹이 훨씬 높은 입찰가를 제시하면서 우선협상대상자가 됐으나 언론과 정치권에서 자금 조달 능력 등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다소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현대그룹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가 박탈됐고, 결국 현대건설은 현대차그룹의 손에 들어갔다. “감개무량하다. 11년 만이다.” 정몽구 회장이 2011년 4월 1일 계동 현대 사옥에 들어서면서 기자들에게 한 말이다.



장남 사고사에 4, 5남 자살 ‘비극’

이제는 세인의 기억 속에서 많이 잊혔지만 사실 현대가는 ‘왕자의 난’과 정몽헌 회장의 자살뿐 아니라 자식들이 부모보다 일찍 세상을 뜨는 비극을 두 차례나 겪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필 인천제철 회장이 1982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4남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이 90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

정주영 명예회장은 장남 몽필 씨에게 특히 엄격했다고 한다. 정몽필 씨는 경영 실적이 좋지 않아 해외 지점을 많이 돌아다니다 귀국 후 인천제철 회장으로 취임한 지 갓 1년을 넘긴 1982년 4월 29일, 그의 차량이 울산에서 서울로 향하던 고속도로 위에서 트레일러 차량과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사망했다. 장남의 사고사가 가져온 충격 때문이었을까.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이 사건 이후 크게 변했다고 한다. 평소 “자질이 없는 아들에게는 경영을 맡기지 않는다”고 공언하던 정 명예회장이 이후 모든 아들에게 계열사를 나눠주고 경영을 맡긴 것.

정주영 명예회장의 넷째 아들인 정몽우 현대알루미늄 회장은 1990년 4월 24일 서울 강남구 한 호텔에서 농약을 마시고 숨진 채 발견돼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망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세간에 존재를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사망한 이후에야 정몽우 회장이 10년 넘게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사실이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는 현대알루미늄의 경영에 크게 관여한 적이 없고 주로 병원 등지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정몽우 씨의 장남 일선 씨는 현대BNG스틸 대표로 경영 일선에서 뛰고 있고, 삼남 정대선 씨는 현대BS&C 대표로 기업을 성공적으로 경영하다 2014년 전문경영인에게 대표직을 넘긴 상태다.






주간동아 2016.04.13 1033호 (p30~31)

  • 김수빈 객원기자 subin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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