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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추석을 잊은 사람들

“노량진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다”

공무원 채용 늘린다는 말에 몰려든 고시생 북적

“노량진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다”

“노량진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한 공무원시험 대비 학원 강의실 모습(왼쪽). 경찰공무원시험 대비 학원 로비에 걸린 강의 안내문들. 내용을 살펴보면 추석 연휴에도 강의가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동아 DB,박세준 기자]

“집에 갈 수도 없고 가고 싶지도 않아요.”

얼마 전 9급 공무원시험에 낙방한 이모(27) 씨의 말이다. 이씨처럼 공무원시험 준비생(공시생)은 대부분 장장 열흘간의 연휴에도 집에 가지 못한다. 학원마다 연휴를 맞아 특강을 개설했기 때문. 그러나 이들은 특강이 아니더라도 굳이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부모를 볼 면목이 없어서다. 명절에 친척이라도 모이면 공무원시험 준비에 대한 질문 공세가 쏟아지는데 이를 감당할 심적 여유도 없다.



“연휴는 딴 세상 이야기”

9월 24일 찾은 서울지하철 1호선 노량진역 앞 대로변에서는 수험생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저렴한 식당이나 카페 를 찾아 놀러온 사람이 많았다. 노량진에 놀러온 사람과 수험생은 옷차림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수험생들 복장은 대부분 무채색 티셔츠에 하의는 트레이닝복이나 레깅스였다. 신발도 무채색 운동화나 슬리퍼가 대다수였다. 이들은 앞만 보며 빠른 걸음으로 골목 사이사이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정모(38) 씨는 “대로변에 대형 공무원시험 대비 학원이 밀집해 있지만 수험생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주말에는 학원 수업이 없어 수험생이 찾아올 이유가 없다. 평일에도 새벽 무렵 학원에 들어가려고 줄을 설 때와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수험생이) 학원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곳이 노량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여기저기 붙은 특강 포스터였다. 포스터에 표시된 특강 기간은 대부분 추석 연휴였다. 노량진에서 10년 넘게 문구점을 운영해온 김모(54) 씨는 “이 동네는 휴일이 없다. 학원이 쉬는 날에도 수험생들이 독서실에 나오고 명절 연휴에는 학원이 특강을 열기 때문에 수험생을 상대하는 가게는 문을 닫고 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동작경찰서를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각종 음식점과 카페가 즐비한 거리가 나온다. 종종 오락실이나 PC방 등 놀이시설도 보였다. 수험생은 대부분 이 거리도 잰걸음으로 지나쳤지만 일부는 오락실 앞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두 달 전 9급 공무원시험 공부를 시작했다는 한모(28) 씨는 “노량진에서 공부해 얼마 전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친구가 이곳에서 발걸음이 느려지면 그해 시험은 낙방한다고 했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잠깐 머리나 식힐까’ 하는 마음에 오락실, PC방, 당구장을 기웃거리다 보면 어느새 그곳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한씨는 독서실 인근에 도착해서야 걸음을 늦췄다.

수험생의 메카로 불리는 노량진이지만 처음 온 사람은 독서실을 찾는 데 애를 먹는다. 독서실이 번화가의 소음을 피해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 있기 때문. 최근에는 식당이 가까운 골목보다 원룸, 고시원 인근에 자리 잡은 독서실이 인기다. 식사할 수 있는 곳이 가깝다는 이점보다 유혹이 덜한 면학 환경을 택하는 것. 중등교사 임용시험을 준비 중인 박모(28여) 씨는 “식당이 멀고 식사 후에는 언덕길을 걸어 독서실에 와야 해 아예 편의점 도시락을 사온다. 고시원과 유사한 시설을 갖춘 일부 독서실은 라면이나 밥 등 간단한 음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사치다

“노량진 달력에는 빨간 날이 없다”

서울 노량진 골목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추석 연휴 대비 특강 홍보 포스터.[박세준 기자]


골목으로 20분가량 걸어 들어가면 곳곳에 경사로가 보인다. 이 경사로에는 수험생들이 기거하는 고시원이나 원룸이 밀집해 있다. 경사로 진입 구간 바닥에는 수험생이 공부하는 공간이니 조용히 해달라는 경고 문구가 적혀 있다. 가파른 경사로를 올라야 하는 데다 경고 문구까지 있으니 수험생이 아니라면 굳이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수험생 밀집지역인 셈.

이곳에서는 잠시 담배를 피우거나 가족과 전화 통화하는 수험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들은 통화할 때 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통화가 끝나면 조용히 고시원이나 독서실로 들어갔다.

경찰공무원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오모(26여) 씨는 “수험생활 중 친구가 한 명 생길 때마다 수험 기간이 1년씩 늘어난다는 속설이 있다. 친구를 사귀면 놀 핑곗거리만 늘어난다는 뜻이다. 주위 수험생과 친분을 맺지 않으려고 말을 섞지 않는다”고 했다.

오씨는 대학 때만 해도 사교적이어서 친구가 많았으나 수험생활을 하면서 누구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드물다 보니 이제는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불편하다고도 했다. 

일부 수험생은 폴더형 휴대전화를 쓴다. 막 통화를 끝낸 수험생 양모(25여) 씨에게 구형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이유를 물었다. 양씨는 “학부모들이 중고교 자녀에게 공부에 집중하라고 구형 휴대전화를 사주는 것과 같은 이유다. 카카오톡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외부와 연락할 수 있는 창구가 생기면 1년간 공부만 하겠다는 다짐이 흔들릴 수 있다. 지금 쓰는 휴대전화에는 연락처가 하나도 저장돼 있지 않다.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는 가족 외에는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고시원 건물 구석에는 분리수거를 할 수 있는 쓰레기통이 마련돼 있었다. 쓰레기  대다수는 컵라면과 즉석밥, 통조림, 편의점 도시락 등 간단히 식사할 수 있는 제품의 빈 용기들이었다.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온 지 1년째라는 주모(28여) 씨는 “식사하러 움직이는 시간이 아까워 컵라면과 김치로 때우고 있다. 부모님이 김치를 챙겨준다고 지방에서 올라올 때를 빼고는 외식을 하지 않는다. 생활비도 많이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 채용 인원 늘려도 여전히 힘든 공시

노량진에서 하숙형 고시원 관리업무를 하는 조모(48여) 씨는 “애들(수험생)이 밥 먹는 걸 보면 마음이 짠하다. 밥 먹을 때도 단어장을 펴놓는다. 밥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책을 보며 식사하다 보니 간혹 허공에 숟가락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저렇게 밥을 먹으면 소화가 잘될까 싶다”고 말했다. 조씨에게 다소 나태한 수험생은 없느냐고 묻자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수험생도 많다. 그런 경우는 그룹스터디를 한다며 나가 밤늦게나 들어오기 때문에 식사하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노량진 생활 5년 차라는 허모(31) 씨는 “사람들이 노량진에 컵밥집이 많은 이유가 가격이 저렴해서라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컵밥도 내용물에 따라 4000원이 넘기도 해 오히려 한 끼에 4500원 정도 하는 뷔페형 고시식당에서 제대로 식사하는 편이 낫다. 하지만 여전히 컵밥이 잘 팔리는 이유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학원 강의실에서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면 강의 시작 30~4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그러려면 식사를 10~20분 안에 끝내야 하는데 이때 컵밥이나 김밥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7월 정부는 5년간 공무원 17만4000명을 추가 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채용 인원이 늘었으나 그만큼 많은 사람이 공무원시험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어 경쟁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9월 23일 2017년 지방공무원 7급 공채 필기시험에는 총 2만8779명이 지원했다. 필기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인원은 총 222명. 평균 경쟁률은 129.6 대 1로 최근 5년간 시험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이다.

노량진에서 2년간 기거하다 최근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노량진을 떠난 이모(26) 씨는 “공무원시험은 문제가 어렵다기보다 경쟁해야 할 사람이 많아 합격이 힘들다. 얼마나 실수를 줄이는지가 관건이다. 알고 있는 문제를 실수로 틀려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수험생 생활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험 기간이 긴 공무원시험에 사람이 몰리자 경제적 손실도 크다. 한창 일할 세대인 이들이 취업준비에 긴 시간을 소요하는 만큼 경제활동인구는 줄어들기 때문. 현대경제연구원이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 않아 생기는 경제적 손실이 매년 17조1429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수험생들은 이 같은 지적이 달갑지 않다. 이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 어려워 공무원시험 준비에 뛰어들었기 때문. 두 달 전 노량진에 들어온 강모(27) 씨도 취업난이 심해 공무원시험을 보기로 했다.

강씨는 “대학 4학년 1학기 때는 대기업과 중견기업 위주로 입사 지원을 하다 2학기에는 눈을 낮춰 중소기업에도 지원했다. 1년간 150번 넘게 지원서를 썼지만 단 한 곳에도 채용되지 않았다. 어학시험 점수와 학점도 높고 대학 생활 내내 다양한 대외활동을 했지만 지방 4년제 대학 출신이다 보니 서류 통과조차 어려웠다. 지난 설에 학벌 외 다른 스펙은 나보다 훨씬 낮지만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촌이 1년 만에 취업에 성공한 것을 보고 기업 입사 준비보다 공기업이나 공무원시험을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노량진 수험생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공무원시험 채용 인원이다. 노량진 생활 4개월 차인 송모(23여) 씨는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5, 6년째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들을 볼 때마다 빨리 합격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게 된다. 이번 정부가 공무원 채용 인원을 대폭 늘렸지만 지지율이 떨어지거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줄어들 수 있다는 소문이 있다. 수험 기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2~3년 안에는 합격하고 싶다.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입력 2017-10-03 09:00:02

  •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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