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78

2019.03.01

특강 | 우리가 몰랐던 백범 김구

치하포 의거로 발현된 청년 김구의 피 끓는 애국심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9-03-04 11: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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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27일 오전 8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청년 김구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2월 27일 오전 8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청년 김구에 대해 특강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2월 27일 오전 8시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위치한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시민 250명이 대회의실을 가득 메운 가운데 특강이 진행됐다. 주제는 ‘우리가 몰랐던 백범 김구, 그 두 번째 이야기’로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강사로 나섰다. 

    100년 전 나라를 되찾고자 온 국민이 떨쳐 일어섰던 3·1운동이 일어났다. 그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이날 특강에서 김 전 의장은 평생을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살아온 백범의 우국지사로서 면모를 생생하게 되짚어 설명했다. 지난해 6월 김 전 의장은 ‘백범일지’를 문답식으로 정리한 책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를 펴냈다. 특강과 책에 담긴 내용을 통해 3·1운동 이전까지 청년 김구의 뜨겁고도 치열했던 애국적 삶을 되돌아본다.

    백범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1896년 2월 제2차 청국 기행에 나선 김구는 평안도 안주에서 다시 발길을 돌린다. 을미사변에 분개해 1월부터 전국 곳곳에서 을미의병이 봉기한 데다 아관파천, 단발령 정지(2월) 같은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김구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고 그를 일약 전국적인 유명 인사로 만든 치하포 의거는 이때 일어났다. 1896년 3월 9일, 21세의 김구는 1895년 8월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의 원수를 갚고자 황해도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스치다 조스케를 처단한다. 이른바 치하포 의거다. 김구는 나루터 여관 주인 이화보에게 “왜놈의 시체는 바다에 던져 물고기 밥으로 주라”고 이른 뒤 다음의 포고문을 써 벽에 붙였다. 

    ‘국모(민비)를 시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國母報讐) 이 왜놈을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 



    그러고는 이화보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네가 이 동네 동장이라 하니 안악군수에게 사건 전말을 알려라. 나는 집으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리겠다. 왜놈의 칼은 내가 가져간다.” 

    김 전 의장은 “치하포 의거는 을미사변에 따른 순간적 의분으로 벌어진 돌발 행동이었지만 김구의 일생에서 훈장과도 같은 상징적 사건이 됐다”고 평가했다. 실제 김구는 ‘백범일지’에도 어떤 장면보다 치하포 의거를 생생히 묘사하고 있다. 

    ‘사람의 일은 모름지기 밝고 떳떳해야 하오. 세상을 속이고 구차히 사는 것은 사나이 대장부가 할 일이 못 됩니다.’ 

    스치다를 죽인 김구는 “본가로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신하라”는 동학당 동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또한 그는 집으로 돌아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부모에게 낱낱이 전했고, 부모 역시 피신을 권하지만 듣지 않았다. 

    “이 한 몸 희생해 만인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면 죽더라도 영광된 일입니다” 

    치하포 의거는 피 끓는 애국 청년의 처절한 절규였다. 조선인이 살아 있음을 내외에 과시한 의거였다. 나라의 왕비(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일본인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이는 국가적 수치이고 민족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다. 유교의 윤리관, 동학혁명의 영향, 조선인으로 태어난 자의 의무와 사명감이 백범을 행동하게 했다.-‘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중에서치하포 의거 이후 김구는 해주 감옥에 갇혔다. 죄목은 세 가지. 첫째는 동학농민 봉기 때 동산평의 일본인 미곡 탈취 사건, 둘째는 장연에서의 산포수 거사 사건, 셋째는 치하포 사건이었다. 김구는 1896년 7월 초 인천 감옥으로 이감됐다. 갑오개혁 이후 외국인 관련 사건을 다루는 특별 재판소가 인천에 생겼기 때문이다. 8월 마지막 날 인천 감옥에서 첫 신문이 있었다. 경무관 김윤정이 물었다. 

    “치하포에서 3월 9일 일본인을 살해했느냐.” 

    김구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날 내가 그곳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왜구 한 명을 때려죽인 사실은 있소.” 

    법정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자 옆 의자에 앉아 신문 과정을 지켜보던 일본 순사 와타나베가 통역에게 까닭을 물었다. 김구는 죽을힘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지금 이른바 만국공법이나 국제공법 어디에 국가 간 통상 화친조약을 맺어놓고 그 나라 임금을 시해하라는 조문이 있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 국모를 시해했느냐. 내가 죽으면 귀신이 되어, 또 살면 온몸으로 네 임금을 죽이고 왜놈을 씨도 안 남기고 모조리 죽여버려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으리라.” 

    와타나베는 “치쿠쇼, 치쿠쇼”(본뜻은 ‘짐승’이지만 주로 욕으로 쓰는 일본어) 하며 대청 뒤쪽으로 도망쳤다. 

    김구는 재판소 관리들에게 따지듯 물었다. 

    “나는 시골의 일개 천민이지만 백성의 의리로 국가가 치욕스러운 일을 당한 것이 부끄러워 왜구 한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동포가 왜인들의 왕을 죽여 복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몽백(국상을 당해 소복을 입고 백립을 쓰는 것)을 하고 있는데, 춘추대의에서 나라님의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몽백을 아니한다는 구절도 읽어보지 못했습니까. 한갓 헛된 부귀영화와 국록을 도적질하는 더러운 마음으로 어찌 임금을 섬긴단 말입니까.” 

    김구의 당찬 꾸짖음에 관리 수십 명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수 말을 들으니 충의와 용기가 실로 놀라워 당혹스럽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날 이후 김구는 감옥에서 ‘대장’이 됐다. 수백 명의 관원이 만나는 사람마다 “제물포가 개항하고 감리서가 문을 연 이래 처음 보는 희귀한 사건”이라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벌렸기 때문이다. 김구를 보려고 면회를 청하는 이들도 날이 갈수록 늘었다. 9월 5일 2차 신문일에는 경무청 주변이 인파로 뒤덮였다. 담장과 지붕 위까지, 경무청 뜰이 보이는 곳 어디든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올라가 있었다. 

    육신은 가두어도 정신은, 영혼은 가둘 수 없었다.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이미 속국이나 마찬가지가 된 나라에서 감옥은 백범에게 ‘감옥 안의 감옥’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아니, 오히려 김구는 감옥 안에서 나름대로 독립을 쟁취했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다. 죄수뿐 아니라 간수, 뭇 백성들에게까지 공감대를 넓혀갔다. 어느 순간 백범은 감옥 안에서 ‘대장’이 돼 있었고, 그의 명성은 감옥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바깥세상 멀리까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육신보다 정신이 먼저 탈옥해 있었다. (중략) 국난에 임해 영웅이 등장하고 위기에 지도자가 나온다. 이 한 몸 나라 위해 던지기로 한 청년 지사 김창수(백범)는 (치하포 의거를 계기로) 어엿한 지도자로 영글어간다. -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 중에서

    사형 직전 일어난 두 번의 기적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해윤 기자]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맡고 있는 김형오 전 국회의장. [박해윤 기자]

    1896년 11월 7일자 ‘독립신문’에는 중죄인 5명과 함께 살인강도 김창수(김구)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신문이 배포된 뒤 김구가 갇혀 있는 감리서가 들썩였다. 죽기 전 그를 보려는 면회객 행렬이 옥문 밖까지 길게 이어졌던 것. 그러나 두 번의 행운이 겹치면서 김구에 대한 사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첫 번째 행운은 고종이 사형을 중지하라는 어명을 내린 것이었다. 당시 사형은 임금의 재가를 받은 뒤 집행됐는데, 임금이 교수형 집행을 재가한 상태에서 뒤늦게 대궐 안에 있던 승지 가운데 하나가 명부에 적힌 김구의 죄명 ‘국모보수’를 우연히 보고 임금에게 안건을 다시 올렸고, “이 사안은 국제관계와도 맞닿아 있으니 일단 사형 집행을 중지시키라”는 어명이 내려온 것이다. 두 번째 행운은 시간과 결부됐다. 사형 집행 중지 어명은 내려졌지만 인천 감리서까지 어명이 전달되기에 시간이 촉박했던 것.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사형 집행을 사흘 앞두고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개설돼 임금의 지시가 감리사 이재정에게 극적으로 하달됐다. 김구는 “만약 서울-인천의 전화 개통이 사흘만 지체됐어도 나는 스물한 살 나이로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고 말았을 운명이었다”고 ‘백범일지’에서 회고했다. 

    이와 관련해 학계 일각에서는 이견을 내놓고 있다. ‘고종이 직접 걸어온 구명 전화’ 이야기는 서울과 인천 사이에 장거리 전화가 놓이기 전이므로 고종의 구명은 ‘전화가 아닌 전보’로 전달됐을 것이라는 얘기다.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치하포 의거를 계기로 청년 김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일평생을 나라를 되찾는 데 앞장서게 됐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백범 김구에 대한 이야기는 독립과 자유를 향한 그의 혁명가의 삶을 되짚어보는 두 번의 특강을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남북관계 잘되려면 주변국 지지 필수적”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우리가 몰랐던 백범 김구, 그 두 번째 이야기’ 특강 이후 김형오 전 국회의장을 따로 만났다. 김 전 의장은 “100년 전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이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선조의 치열한 몸부림이었다면, 2019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성의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대한제국 망국의 교훈은 지도자와 국민이 국제정세에 어둡고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돼 있지 않으면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00년 역사를 교훈 삼아 앞으로 미래 100년을 준비하는 각성의 계기로 삼아야겠죠.” 

    대한민국 미래 100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세계 정세 흐름을 분석하고, 우리를 지켜낼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남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그러자면 내부적으로 화합하고 단결해야죠. 김구 선생은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되는 나라를 만들자’고 말씀하셨어요. 최근 남북을 포함한 동북아가 세계 평화의 중심축으로 작동할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남북평화와 남북공존공영을 위한 방법론을 두고 우리 내부에서 이견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끼리가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남북이 손잡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우리 민족이 자존감을 갖고 국제정세에 대응하는 것은 옳지만, 세계적 흐름 속에서 작동하도록 하려면 폭넓은 외교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우리의 국제정세 기본 축은 한미관계입니다. 한미안보동맹이 흔들리면 나라의 중심축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일관계도 지금처럼 어긋나 있게 방치해선 안 됩니다. 남북평화와 남북공존공영을 위해서는 한 나라라도 더 우리의 입장을 지지하도록 당겨 와야 합니다.” 

    한일 간에는 위안부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며, 한일 외교관계가 파탄 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국익을 위한 외교는 냉혹하면서도 고차원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한중관계도 기로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어떤 존재로 인식되느냐가 중요합니다. 한국이 미국에게 중요한 존재인가, 중국에게 필요한 존재인가에 양국관계가 달려 있습니다. 국제관계는 투자 대비 효율이 떨어지면 언제든 포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국이 북한 눈치를 보면서 한국을 우습게 여기도록 방치해선 안 됩니다. 중국이 남북한을 균형 있게 대하도록 하는 게 1단계이고, 남북이 뜻을 모아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중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설득하는 게 2단계 목표입니다. 남북관계가 잘되려면 무엇보다 주변국의 지지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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