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중식 기자]
이종수(64) 한국임팩트금융 대표와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 윤흥길의 이 소설이 생각났다. 이종수 대표야말로 ‘일곱 개의 은행으로 남은 사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대표의 삶은 많은 부분 소설 속 권기용을 떠올리게 하지만 엔딩은 정반대다.
이 대표는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울 사당동 철거민촌에서 살았다. 학업성적은 우수했지만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뒤늦게 서강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힘겨운 현실에 대한 분노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2학년 때인 1974년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6개월의 옥살이 동안 그는 밑바닥 인생들과 사귀면서 세상을 향한 눈흘김보다 눈웃음을 배웠다고 했다. 출옥 후 1년 뒤, 갈 곳 없어 자신의 철거민촌 집을 찾은 감방동기와 4년 반 동안 한 방에서 동고동락하며 평생을 ‘빈자의 이웃’으로 살리라 결심했다.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국내 기업 입사가 힘들어 외국계 은행(체이스맨해튼)에 들어간 그는 이후 직장을 옮겨가며 3개의 상업은행 설립에 참여한다. 호주은행 한국 지점, 호주은행 말레이시아 지점, 캄보디아 ABA은행이다. 동남아에서 은행 2개 설립에 참여하며 동남아통이 된 그는 진로그룹에 발탁돼 기조실 임원과 동남아본부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고 빈곤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젊은 날의 초심을 떠올린다.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살다 번쩍 정신을 차렸다고 해야겠죠. 외환위기로 일자리를 잃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평생 빈민의 이웃이 되겠다’고 했던 젊은 날의 결심이 떠올랐습니다.”
훌쩍 사표를 낸 그는 인도네시아 빈민직업교육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현장감각을 익힌 뒤 1999년 국내에 돌아와 사회복지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 국내 사회복지학자들을 만나 2002년 ‘빈자의 은행’으로 알려진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의 한국형 모델로서 ‘사회연대은행’을 설립한다. 보증인도, 담보도 없는 저소득계층에게 저리로 최대 1000만 원 창업자금을 빌려주고 자활할 수 있게 지원하며 장기적으로 이자와 원금을 회수하는 은행이었다.
한국형 서민금융 사회연대은행
사회연대은행이 제시한 솔루션은 저소득의 빈곤과 일자리 부족이라는 시장의 문제점을 시장의 논리(금융)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당시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과 맞아떨어졌다. 그와 함께 국내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대표하는 은행으로 떠올랐다.특히 4800억 원 규모에 이르던 은행 휴면예금을 재원 삼아 저소득층과 차상위층의 자립을 돕자는 그의 아이디어가 2007년 국회 입법으로 이어지면서 한 해 대출금만 10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대기업들의 기부금도 줄을 이었다. 지금까지 사회연대은행의 대출 건수는 2000건에 총액 400억 원에 이른다.
또 대부업체로부터 고리로 학자금을 빌린 뒤 취업이 안 되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대학생들을 돕기 위한 학자금전환대출 사업에도 착수했다. 그 취지에 호응한 생명보험협회에서 200억 원을 지원받아 약 4000명의 대학생을 고리대금의 늪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정부가 직접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에 뛰어들면서 사회연대은행의 재원은 고갈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시중은행과 대기업을 엮은 ‘미소금융’(현 서민금융진흥원)을 2009년 말 출범시키면서 민간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은 설 땅을 잃고 말았다.
“2009년 100억 원에 이르던 사회연대은행의 대출금이 2010년 45억 원이 되고, 2011년엔 25억 원으로 4분의 1 토막이 났습니다. 그나마 사회연대은행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다른 마이크로크레디트는 다 고사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미소금융이라도 잘 됐으면 좋을 텐데 7개 시중은행의 휴면예금을 독차지하고 6대 대기업별로 별도 재단을 만들게 해 총 1조 4000억 원의 재원을 조성했지만 지금까지 대출된 금액이 2300억 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정부가 나서 돈을 많이 모았지만 전문성과 효율성이 떨어진 겁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창조경제 쪽으로 지원이 쏠려 제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연대은행으로선 사실상 정부에 의해 사업영역을 침해당한 셈이다. 이 대표는 귀국한 이후 10년간 재직해오던 보험중개사 에이온 코리아에 사표를 내고 대안을 모색하다 2012년 재단법인 한국사회투자를 설립했다. 사회연대은행이 10억 원을 출연해 세운 한국사회투자는 개인사업 대출을 넘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에 대한 융자에 초점을 맞췄다.
“사회연대은행이 개인금융이라면 한국사회투자는 기업금융 내지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회연대은행이 고기 잡는 방법과 도구를 지원해준다면 한국사회투자는 많은 양의 고기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도록 어장 자체를 개선하고 개척하는 데 투자한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빈곤, 실업, 장애, 고령화, 저출산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개인만 도와주는 방식으론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좀 더 큰 규모로 도움을 주는 금융이 되자는 취지였습니다.”
이 대표가 이사장을 맡은 한국사회투자는 이후 서울시 사회투자기금 500억 원을 위탁받는 한편 민간에서 조달된 기부금까지 총 560억 원을 130개 프로젝트에 융자해줬다. 180명의 택시기사가 2500만 원씩 출자금을 납부해 세운 한국택시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쿱택시, 사회적 벤처로 출발해 ‘나눔카’라는 개념을 기업화한 ‘쏘카’, 서울 강동구 암사동 정수장 위 태양광패널에서 생산한 전력의 판매 수익으로 에너지 취약계층을 돕는 암사태양광발전소, 서울 금천구 동네주택을 매입해 지하셋방에 사는 노인들에게 지상에 생활공간을 마련해주는 사회적 주택사업…. 이 중 쏘카는 원금과 이자만 회수하는 융자가 아니라 수익금 배분까지 받는 투자였다면 큰돈을 벌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사업 초창기 공유경제와 탄소 절감, 주차장난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한국사회투자가 40억 원을 대출했는데 사업성을 인정받으면서 베인캐피털로부터 180억 원, SK로부터 650억 원 투자금을 유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업도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중단됐다.
사회적 투 · 융자사 한국임팩트금융
서울 강동구 암사아리수정수센터에 설치된 수도권 최대 규모의 태양광 발전시설 ‘암사태양광발전소’. [동아DB]
180명 택시기사의 협동조합으로 운영하는 쿱택시, 나눔카(카 셰어링)를 사업화해 성공한 쏘카(왼쪽부터). 이들은 모두 한국사회투자의 융자지원을 받은 사회적 기업이다. [동아DB, 홍중식 기자]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간 차원에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이 대표가 사회적 금융기관을 만들면 그때마다 정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형국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부터 10년간 사회연대은행을 운영해보고 그 후 5년은 한국사회투자를 운영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다. 사회연대은행은 기업과 금융의 기부를 통해 재원 1000억 원을 모금했는데 민간 차원의 기부재원이라는 게 기부를 제공하는 쪽의 상황이 바뀌면 지속가능하지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하더군요. 이에 한국사회투자는 정부의 공적기금에 의존해 운영했는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갈등관계에 있거나 정권이 바뀌면 지속가능성이 더 힘들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민간 중심의 지속가능한 사회금융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한국임팩트금융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한국사회투자는 정부 재원에 기대 융자밖에 할 수 없었지만, 한국임팩트금융은 민간기금을 모아 투·융자가 모두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임팩트금융이란 정부 차원의 복지가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사회 및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에 재원의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사회적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면서 재무적 이윤까지 창출하자는 개념으로 2015년에만 세계적으로 그 재원이 16조 원에 이른 것으로 조사됐다.
2017년 10월 창립된 한국임팩트금융은 올해 안에 출자금 200억 원과 기부금 100억 원을 모금해 총 300억 원의 재원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 투자로서 소셜프로젝트에 대한 투·융자사업에 나설 계획이다. 3월에는 산하에 임팩트캐피털코리아라는 자산운용사도 출범시킬 예정이다. 한국임팩트금융은 유한회사로 이종수 대표 외에도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황영기 금융투자협회 회장, 윤만호 EY 부회장(전 산은금융지주 사장) 등이 직접 출자한 사원으로 참여했다.
“한국에선 지난 10년간 사회문제 해결에 정부의 역할이 커졌습니다. 정부의 공적자금이 투입되면 신속하게 재원을 키우고 많은 사람에게 금방 알릴 수 있는 지속가능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나랏돈이라고 캐시 플로(cash flow)를 고려하지 않은 채 마구 돈을 쓰는 것도 문제지만, 정권이 바뀌거나 정부 재정 상태가 악화되면 재원이 쉽게 고갈되는 문제도 있습니다. 반면 서구에서는 민간이 재원을 끌어모으고 다양한 투·융자 기법을 적용해 자금을 선순환시키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사회적 펀드 조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 대표가 임팩트금융의 역할모델로 꿈꾸는 것은 미국 최대 투자은행인 JP모건의 디트로이트 도시재생 프로젝트다. 미국 자동차산업의 성지이던 디트로이트는 자동차산업의 쇠락과 함께 빈민가로 전락해갔는데, 2013년부터 JP모건의 1억 5000만 달러 투자로 100여 개 사업체가 세워지고 새로운 일자리가 수천 개 만들어지면서 도시 활성화에 성공했다.
“시계를 손으로 만져 감지할 수 있게 한 시각장애인용 시계 제조업체나 게임 수익으로 사막화되는 몽골에 나무를 심겠다는 게임업체 같은 사회적 벤처에 대한 투자부터 시작할 겁니다. 버려진 공간을 재활용해 대안에너지를 생산하거나 주택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주택 설립, 농어촌이나 낙후지역을 개발하는 소셜프로젝트를 대상으로 한 사회적 장기투자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금융의 종합판 ‘소셜뱅크’
한국임팩트금융 설립에는 이헌재 전 부총리의 도움이 컸다. 거의 평생을 관계에서 보낸 이 전 부총리가 민간 중심의 임팩트금융 지원에 적극 나섰다는 점이 이채롭게 다가왔다.“지난해 초 이 전 부총리 측에서 저를 보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저도 의아해하며 만났어요. 이 전 부총리는 ‘경제·금융 분야의 일을 많이 해왔는데 더 늙기 전에 해야 할 과제가 지역재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역재생에 공헌할 수 있는 일을 찾다 임팩트금융을 알게 됐다며 제게 먼저 손을 내밀었습니다. 덕분에 재계와 금융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죠.”
민관협력과 관련해 이 대표는 흥미로운 주장을 내놨다. 한국이 더는 공정사회를 추구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정사회는 흔히 쓰는 공정사회(公正社會)가 아니다. 공무원이 정하면 민간이 모여서 그 뒤를 따른다는 공정사회(公定私會)를 뜻한다.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민간이 나서 성과를 거두면 정부가 그걸 가로채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일을 겪은 것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뒤 진보적 대통령의 코드에 맞추려고 공무원들이 민간에 맡겨도 될 일을 다 자신들이 하겠다고 나서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정부는 법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좋은 생태계를 만드는 일에 주력해야지 민간이 더 잘할 수 있는 일까지 하겠다고 나서선 안 됩니다. 야구장에선 선수가 뛰어야지 감독이 뛰어서 쓰겠습니까.”
한국임팩트금융 설립으로 이 대표는 평생 ‘6개의 은행’을 세웠다. 인생 전반부에 세운 3개는 상업은행이었고, 후반부에 세운 3개는 사회적 금융기관이었다. 이 대표의 꿈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국임팩트금융을 성공시키는 것이 제 마지막 미션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설립한 사회적 금융기관을 종합한 ‘소셜뱅크’를 후배들이 세운다면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는 게 제 마지막 꿈입니다. 소셜뱅크는 2008년 금융위기 발생 이후 금융기술을 돈 버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사회적 문제해결을 위한 대규모 투자에 적용하는 은행을 말합니다. 사회연대은행 같은 소매은행, 한국사회투자 같은 기업은행, 한국임팩트금융 같은 투자은행의 기능을 모두 포괄한 진짜 은행이라는 점에서 제 인생의 마지막 꿈으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에게 ‘일곱 개의 은행으로 남은 사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