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6

..

인터뷰

용접공→과학도→법학도 변신 남구현 박사 “인생은 늘 다이내믹”

‘네이처’ 표지 장식 논문 둘러싸고 5년 만에 누명 벗어…UC버클리 로스쿨서 法 공부 중

  • 정혜연 기자 grape06@donga.com

    입력2017-09-19 11:38:14

  • 글자크기 설정 닫기
    2012년 5월 남구현(38·사진) 박사는 박사 졸업 후 첫 논문으로 세계적 과학저널인 영국 ‘네이처’ 표지를 장식한 연구교수로 주목받았다. 한국인들로 구성된 연구진의 논문이 표지에 오른 건 처음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국위선양을 한 인물로도 화제가 됐다.

    논문 주제는 ‘균열 제어를 통한 형태화(Patterning By Controlling Cracking)’로, 본문은 쐐기나 계단 모양의 흠집 등을 이용해 실리콘 웨이퍼(반도체의 재료인 둥근 원판)에 직선, 곡선, 다양한 패턴의 균열을 만드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 기술을 응용하면 초소형 바이오칩은 물론, 초정밀 반도체 회로도 만들 수 있다. 당시 ‘네이처’는 이 논문에 대해 ‘균열 연구와 나노공학을 연결하는 새 다리를 놓았다’고 평가했다.



    한 편의 연극 같은 삶

    논문과 함께 그의 성공 스토리도 알려져 화제가 됐다. 외환위기로 집안이 어려워져 학업을 포기하고 용접공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 고난을 딛고 성공한 사례로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그의 연구에 참여했던 한 대학원생이 남 박사를 자신의 공을 가로챈 교수로 지목하는 글을 올려 논란이 됐다. 남 박사는 그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이후 5년 동안 남 박사는 본인 연구만큼이나 판결문과 법학 서적을 찾아보는 데 시간을 할애하며 살았다. 긴 기다림 끝에 올해 7월 대법원은 최종 선고를 내렸고 그는 승리했다. 앞서 1심, 항소심 모두 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줬기에 이미 예상된 결과였다.



    3번의 재판을 진행하는 동안 전도유망하던 젊은 학자는 자신의 길에서 전진하지 못한 채 천금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안타까울 법도 한데 남 박사는 인터뷰 내내 “세상에 나보다 힘든 사람이 더 많다”며 이겨낸 듯한 모습을 보였다. 10대 때 워낙 시련에 단련된 탓일까.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1막. 물리학도 꿈꾸던 소년이 용접공으로남 박사의 인생은 한 편의 연극 같다. 그는 외환위기로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기 전까지 유복한 시절을 보냈다. 대구에서 레미콘 회사를 운영하던 부친은 어릴 때부터 외아들인 그를 회사에 데리고 나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로 신뢰하고 아꼈다. 남 박사는 여느 10대와 마찬가지로 기름 냄새 나는 레미콘 회사에서 일하기보다 과학자의 꿈을 키워나갔다. 성적도 꽤 잘 나왔다. 대학수학능력평가(수능)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전교 1~3등을 유지했다. 목표 대학은 서울대 물리학과였다. 그런데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아버지 회사는 부도가 났다.

    열아홉 고등학생이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을 것 같다. 당시 어땠나.
    “부도가 크게 나는 바람에 아버지는 감옥에 갔고, 어머니와 누나들은 모두 흩어졌어요. 저는 다행히 학교 기숙사에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는데, 채권자들이 학교로 찾아오는 건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공부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지금도 수능을 어떻게 쳤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대학을 가도 채권자가 쫓아올 것 같아서 학업을 포기한 뒤 돈을 벌려고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어요. 그러던 중 입영통지서가 날아왔죠. 어머니가 홀로 채권자를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늦게 갔으면 하더라고요. 가끔 고향에 가야 해서 병역특례를 알아보던 중 인천 레미콘 회사에 공고가 났어요. 어릴 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막상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니 궁금하더라고요. 마침 정보처리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서 지원했는데 용접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웃음)”

    용접공 출신 박사로 알려져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오해도 있다.
    “인문계 고등학교 나와서 1년 동안 아르바이트하다 군대 들어간 스무 살짜리 남자애가 용접을 알 리 만무하잖아요. 그런데 레미콘 회사가 깨끗한 옷 입고 사무만 볼 수 없어요. 생산부 근로자들이 ‘레미콘 회사에서 3년만 일하면 총각도 애를 낳는다’고 할 정도로 그쪽 일이 힘들어요. 그만두는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죠. 어쨌든 저는 병특 기간을 채워야 하니까 자리가 빌 때마다 이것저것 다 해야 했고, 용접일이 많아 그걸 주로 했던 거죠. 사실 용접도 기계공학에 포함돼요. 20~30년 전에는 용접을 대학교 공과대학에서도 가르쳤어요. 지난해부터 국민대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용접 내용을 가르쳐야 할 부분이 있어서 생생한 경험을 살려 강의하고 있죠.”

    그때 서울대 물리학과 친구에게 물리학 책을 빌려 독학한 건가.
    “그렇죠. 1년을 그렇게 일하다 보니 퇴근하면 ‘공부를 좀 해야지’ 하는 생각보다 ‘나오기 전에 윤활유를 뿌리고 왔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공부와 멀어지더라고요. 언젠가 대학을 가야 한다는 다짐도 점점 희미해졌어요. 안 되겠다 싶어서 친구에게 미적분학, 물리학 책을 빌려 쉬는 시간마다 회사에서 봤어요. 같이 일하던 분들이 ‘왜 어려운 책을 보는 척하냐’며 비웃기도 했는데, 그러던 말던 공부했죠. 2년이 지나고 산업체를 옮길 기회가 와서 건설교통부 내 항공국 업무를 보던 컴퓨터 회사로 갔어요. 일이 많았지만 굵직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게 상당한 공부가 됐어요. 그때 희망 전공도 물리학에서 항공우주공학으로 바뀌었죠.”





     2막. 청운의 꿈 안고 혈혈단신 미국행  2002년 군복무는 마쳤지만 회사에서 진행하던 업무가 남아 있어 남 박사는 계약직으로 몇 개월 더 일했다. 그때 황명신 항공대 교수(작고)가 “머리도 좋고 의지도 있으니 대학부터 미국에서 시작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한국 대학에 입학하려고 준비하던 그는 계약직으로 일하며 모은 돈과 ‘월간항공’ 기자로 일하며 모은 돈을 들고 이듬해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UC버클리에 바로 입학한 것인가.
    “그렇지 않아요. 주립대라도 유학생은 학비가 한 학기 1000만 원이 넘는데 커뮤니티 칼리지는 30% 수준에 다닐 수 있었죠. 2년간 공부한 뒤 편입하는 게 경제적이라는 조언을 듣고 희망 대학인 UC버클리 인근 프리몬트의 샤보(Chabot)칼리지에 들어갔어요. 나중에 UC버클리를 가려면 그 근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갔는데 학교를 다니다 보니 도시가 평화롭고 정비도 잘돼 있어 공부하기 좋았어요. 2년 뒤 항공과로 편입하고 싶었지만 UC버클리에는 항공과가 없어서 기계공학과로 편입했어요. 졸업할 즈음 진짜로 MIT 항공과로 옮길까 하다 지도교수님의 권유로 기계공학과 석·박사 통합 과정에 들어가 3년 만에 졸업했죠. 돌아보면 미국에서 보낸 7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에요. 마치 고등학교 시절 불행을 보상받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그런데 왜 미국에서 자리 잡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첫 번째 이유는 그래도 한국이 그리웠어요. 가족이 한국에 있었고, 박사 과정이 끝날 즈음 아버지도 출소를 앞두고 있었어요. 미국에서 자리 잡더라도 아버지 곁에 있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죠. 두 번째 이유는 박사 논문 준비 과정에서 ‘네이처’에 실린 논문에 나오는 현상을 발견했기 때문이에요. 균열 연구를 하시는 교수님에게 보여드렸더니 큰 관심을 나타냈어요. 제가 발견한 걸 교수님이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았고, 당시 UC버클리에서 포스트 닥터로 있던 고승환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가 ‘한국 가서 같이 연구하자’고 해 하루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 연구하고 싶어졌죠.”

    2010년 이화여대 교수에는 어떻게 초빙된 것인가.
    “UC버클리 석·박사 통합 과정이 3년 반인데 2009년 말, 반년의 논문 학기만 앞두고 있었어요. 박사 논문은 거의 다 써놨지만 심사 통과 전이라 한국에 돌아가려면 뭔가 명분이 필요했어요. 그때 KAIST(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갈 예정이던 고승환 교수가 알아봐줘 같은 대학 연구교수로 갈 수 있게 됐어요. 그런데 학교 규정상 박사학위를 받기 전인 사람을 교수로 채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지만 학교 규정이니까 포기하고 다른 쪽으로 알아봤어요. 우연히 이화여대 초기우주과학기술연구소에 계약직 특임교수 자리가 난 걸 보고 지원했죠. 계약직이다 보니 오랫동안 공석이었다고 하는데, 일단 제 연구를 빨리 하고 싶어서 가리지 않고 넣었던 거예요.”

     3막. 천당과 지옥을 오간 2012년  이미 머릿속에 박사 졸업 후 첫 논문에 대한 구상을 끝냈던 남 박사는 실험을 통해 데이터와 사진만 얻으면 되는 상황에서 이화여대에 갔다. 그러나 연구소에서는 그곳의 연구비로 자신의 실험을 할 수 없었고, 본인의 실험보다 처리해야 할 행정적 업무가 많아 연구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남 박사는 고 교수와 함께 본격적으로 크랙 연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그가 몸담고 있던 연구소를 지휘하는 박일흥 이화여대 교수가 학생들의 경험을 위해 관련 실험에 학생 2명을 참여시킬 것을 그에게 권했다. 학생들이 실험 과정을 도왔고 데이터를 수집해 남 박사에게 전했다. 그러한 과정 끝에 논문은 2012년 5월 ‘네이처’에 실렸다. 이 논문의 제1저자 및 공동 교신저자에 남 박사, 공동 교신저자에 고승환 교수, 제2저자에 박일흥 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나머지 실험에 참여한 학생들은 ‘감사의 글’에 이름이 올랐다.

    ‘네이처’에 논문은 언제 제출한 것인가.
    “2011년 말 논문을 제출했고, 이틀 만에 심사에 들어가겠다는 e메일을 받았어요. 사실 전 세계 학자들이 ‘네이처’에 논문을 보내는데 그중 30%만 심사한다고 들어서 심사받기도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듣기로 심사위원의 결과와 상관없이 결정권은 에디터에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 논문의 심사위원 결과는 호평 하나, 악평 하나, 중립 하나였는데 에디터가 약간의 수정만 요청해와서 게재될 걸 예상했어요. 그런데 표지 논문까지는 상상도 못 했죠. ‘네이처’에서 아티스트를 고용할 테니 원하는 이미지를 설명해주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은 표지로도 나간다는 뜻이거든요. 발표 나기 몇 달 전이었는데 정말 기뻤죠.”

    당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
    “UC버클리 대학원 동문들은 ‘와 진짜 해냈구나’ 하는 반응이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관련 내용의 논문을 낼 거라고 보여줬거든요. 그러면서 의견도 물었고요. 사실 많은 학자가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실릴 논문을 목표로 연구하고, 저도 그중 한 명이었을 뿐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죠.”

    기쁨이 너무 짧았다. 제자의 글이 인터넷에 오르며 제자의 공을 뺏은 교수로 몰렸는데, 당시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논문을 진짜 열심히 준비했고, 그것을 한국에서 꽃피우고 싶었어요. 그런데 오지 않았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으니 힘들었죠. 석 달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집 안에서만 지냈어요.”

    해당 대학원생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였나.
    “일단 논문에 쓸 데이터를 얻으려면 고가의 반도체 공정 장비인 ‘LPCVD’에 특정 온도, 압력, 가스 성분의 비율 등 5~6개 조건을 입력한 웨이퍼를 6시간 동안 넣어두는 실험을 수차례 진행해야 했어요. 미국에서는 이 기계를 제가 직접 다뤘는데, 한국에서는 이 기계가 있는 곳이 서울대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등 몇 군데 없는 데다 한 번 이용하는 데 100만 원 이상 들어 저 또한 쉽게 사용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마침 이화여대 대학원생들이 서울대에 가는 업무가 있고, 박 교수도 학생들에게 시키라고 하니 지시했던 거죠. 분명한 건 실험 레시피는 제가 설계해 학생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입니다.”

    판결문에 해당 학생이 논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나와 있는데 근거는 무엇인가.
    “양측이 심각하게 대립하자 고승환 교수가 ‘재판정에서 직접 논문 내용을 물어보라’고 법원에 의견서를 냈어요. 그 내용은 피고인에게도 미리 공지가 됐고, 준비할 시간도 있었어요. 재판부에서 양측에 관련 내용을 질문하고 김기범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에게 맞는지 확인시켰어요. 김 교수는 누구의 답이 맞냐는 판사 질의에 저의 답이 맞다고 했습니다. 이 밖에도 피고인은 자신이 다뤘다고 주장하는 장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용어조차 답을 못 했어요.”

    해당 대학원생이 실험에 참여한 것은 사실인데 왜 저자로 이름을 넣어주지 않았나.
    “논문에 쓸 실험에서 조건을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게 없으면 의미 있는 데이터가 도출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그 학생은 ‘네이처’에 논문이 실린 뒤 ‘실험을 직접 주도했고, 결정적 성과도 직접 발견했다’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노트에 실험 조건이 다 적혀 있다고 주장했죠. 제가 그 학생에게 실험 조건을 지시한 e메일을 법원에 제출했는데 확인해보니 연구노트에 적힌 내용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더라고요. 연구노트라고 볼 수 없는 부분이죠.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놓고 어찌됐든 교수가 논문을 쓰면 학생이 거들기만 해도 논문 저자에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고 해요. 그게 관행이라는데 저는 지금도 그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4막. 다시 시작  2012년 이후 한국을 뜨고 싶다는 생각도 컸지만 그는 ‘한국에서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버텼다. 그사이 남 박사는 3년 계약으로 KIST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했고, 퇴근 이후 연구실에 남아 균열 연구를 이어갔다. 2015년에는 국제 학술지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후속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는 국민대 기계공학부에서 시간강사로 전기전자공학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제 마음의 짐을 덜어낸 그는 다시 시작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젊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5년을 돌아보면 기분이 어떤가.
    “후속 논문을 한 편밖에 못 썼어요. 상대 측 변호사는 ‘후속 논문도 못 쓰는 박사’라고 지적했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크랙’만 들여다봐도 생각이 너무 복잡해져서 연구하기가 힘들었죠. 사실 첫 논문이 발표됐을 때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과 후속 연구를 진행해 쭉쭉 뻗어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아직 상용화된 것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관련 분야 특허가 나온다든지 하면 보고만 있어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면 현재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가.
    “일단 후속 연구를 계속하고 있고, 중국 은나라 임금들이 거북이 등 껍데기에 균열을 내 점을 쳤던 것에서 착안한 연구도 함께하고 있어요. 또 아이러니하게도 소송을 진행하면서 법학에 관심이 생겨 제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이버대 법학 학사와 한국방송통신대 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올해는 UC버클리 법학대학원에 입학해 여름 동안 미국에 가서 수업을 들었어요. 여름에만 진행하는 석사 과정인데 학위 취득 후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시험을 칠 수 있어서 준비 중입니다.”

    어떻게 UC버클리 법학대학원에 합격했나.
    “저도 합격하리라 생각지 못했는데 입학원서에 제가 겪었던 사건에 대해 썼어요. 그러면서 e메일에 제가 적합한 학생일지 모르겠다고 적었는데, 합격통지서와 함께 ‘우리는 당신이 버클리 법학과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믿습니다!(We believe you are a perfect fit for Berkeley Law!)’라는 답신을 받아서 매우 기뻤죠.”

    한 가지하기도 힘든데 법학까지 공부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1심과 항소심은 거의 1년 만에 결과가 나왔어요. 그런데 대법원 판결은 3년이 걸렸죠. 알고 보니 대법관 1명이 하루에 사건 7~8건을 처리해야 해 물리적 시간이 많이 들었던 거더라고요. 인공지능이 바둑기사도 이기는 세상인데 인공지능이 사건을 판단하고 대법관이 최종 심사만 하게 된다면 재판 결과를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줄어들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미국 스탠퍼드대는 벌써 인공지능 법판단 연구를 하고 있어요. 우리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미국 한 회사가 인공지능 법판단 상용화에 성공하면 굉장히 큰일이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이런 로직을 만들어 시장을 설득하려면 아무래도 관련 연구가 먼저 진행되고 있는 미국에서 해야 할 테고, 그러려면 미국 변호사 자격증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공부하고 있어요.”

    과학도에서 법학도까지 인생이 상당히 드라마틱한 것 같다.
    “학창 시절 항상 인생은 다이내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런 사건을 겪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요.(웃음)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상당히 성숙해졌고 배운 것도 많아서 무조건 마이너스는 아니었어요. 지금 인공지능 법판단 연구를 매우 즐겁게 하고 있거든요. 만약 이 연구가 성공한다면 이 사건이 연구를 있게 한 것일 테니, 어찌 보면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죠. 물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