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 저는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잘 몰랐어요. 암도 감기처럼 병원치료 잘 받으면 낫는 병인 줄 알았죠. 이렇게 오래 고생할 줄 알았다면 처음에 제대로 대처했을 텐데…. 이제 와서 좀 후회를 해요.”
주정미(48·사진) 씨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열정적이고 똑 부러지게 일하는 분’(권순만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업무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부하’(변재진 전 보건복지부 장관)라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할 만큼 그저 소녀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주씨는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보건복지부 국장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정책센터에 파견돼 근무하던 ‘잘나가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1989년 행정고시(행시)에 최연소로 합격했고, 의약분업 당시 공보담당 서기관을 맡았으며, 건강보험 정책을 책임지는 보험정책팀장도 거쳤다. 2006년 혁신인사기획팀장(현 인사과장)에 여성 최초로 발탁되는 등 ‘금남의 벽’을 잇달아 넘어서며 능력을 발휘해 주위의 신망도 두터웠다.
세 번째 항암치료
그의 남다른 경력을 주워섬기자 주씨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농담처럼 “제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너, 그러고 살다 크게 아플 줄 알았다’고. 저는 그냥 열심히 산다고만 생각했는데, 남들 눈에는 그렇게도 보였나 봐요”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해놓고는 또 웃는다. 주씨에 따르면 “암에 걸린 뒤 웃음이 헤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일 가야 웃을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웃고, 꽃이 핀 걸 보면서 웃고, 가만히 앉아 있다 혼자 배시시 웃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눈가에 웃음 주름이 보기 좋게 잡혀 있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 그는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2009년 유방에서 처음 발견된 암이 이듬해 뼈로 전이된 것이다. 두 차례의 혹독한 항암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잡힌 줄 알았던 암의 기세는 지난해 가을부터 다시 등등해졌다. 암 재발 소식을 전하며 담당의사는 주씨에게 아이들이 몇 살인지부터 물었다고 했다.
“큰애가 대학생, 작은애는 고등학생이라고 하니 ‘많이 키우셨네요. 그럼 됐습니다. 이제 다른 생각 말고 치료에만 집중합시다’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아, 지금 내가 많이 심각한 상태구나.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거구나’ 깨닫게 됐어요.”
몸 상태도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그는 일을 쉬기로 결심했고, 지금은 경기 가평 한 펜션에 장기 투숙 형태로 머물고 있다. 남편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찾아와 하루씩 머물다 가고 아이들이 틈틈이 들르긴 하지만, 평소에는 잣나무 숲에 둘러싸인 황톳집에서 하루 세끼를 혼자 해 먹으며 오롯이 자신을 돌보는 데만 집중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하늘과 나무와 꽃들뿐. 그러다 보니 3주에 한 번씩 항암주사를 맞으러 서울 갈 때를 제외하곤 세상 흐름을 잊고 산다. 주씨는 “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새삼 ‘좀 더 일찍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예전엔 늘 많이 바빴어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주말마다 동네 목욕탕에 가서 때 밀어주는 서비스를 받을 때 정도뿐이었죠.”
그러다 2009년 봄, 목욕관리사 아주머니로부터 오른쪽 가슴에 멍울 같은 게 만져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두어 달 뒤 다른 아주머니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그냥 지나쳤다. 미루고 미루다 7월 중순 찾아간 근무지 근처 병원에서 그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이미 암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지만, 이때도 일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국장으로 승진한 지 5개월여밖에 되지 않았고, 아동청소년복지정책관으로 우리나라 아동과 청소년 복지 정책 전반을 담당한다는 데 대한 보람과 열정이 넘쳐나던 때였기 때문이다.
다시 웃을 수 있는 이유
그러나 암은 호락호락한 병이 아니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뒤부터 구토가 일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각종 통증이 수시로 그를 찾아왔다.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고, 간신히 잠자리에 들어도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혈액순환이 안 돼 손끝 발끝의 말초신경이 둔해지더니, 급기야 모든 손톱이 피부로부터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염증이 생기면 항암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까 봐 손톱이 있던 부위를 이틀에 한 번씩 소독하면서, 붕대로 감싼 채 버텨야 했다. 밥 먹을 때도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채 음식을 집었다.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견딘 끝에 마침내 이겨냈다고 생각한 암이 다시 찾아왔을 때 주씨가 느꼈을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써서 일찍부터 암에 전력으로 맞서도록 돕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몸의 이상 신호를 지나쳤던 자신의 무심함과 항암치료 과정에서 저질렀던 실수들, 그리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암과 싸워나갈 수 있게 자신을 일으킨 힘 등에 대해 차근차근 정리한 책 ‘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썼다.
주씨가 가장 강조하는 건 몸이 건네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라는 것. 돌아보면 그는 암 진단 1년여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많이 아팠다고 했다. 잠을 자다 팔이 저려 깨곤 할 정도였지만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전에 없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겨난 것도, 술을 마시면 한 번씩 기억이 나지 않던 것도 모두 몸이 보낸 이상 신호였는데 무시했다. 주씨는 “암은 빨리 찾아낼수록 생존율이 높아지고, 경제적 부담은 줄어든다. 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는 지나치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의 책에는 이외에도 체온을 올려 면역력을 높이는 법과 건강한 식사법, 그리고 마음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법 등에 대한 주씨의 체험적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다 △놀랍거나 감동스러운 것을 보고 마음으로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일부러라도 웃는다 △작은 친절이라도 베푼다 △뜨거운 목욕을 한다’처럼 소박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힘이 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한 사람이, 한창 힘이 넘치던 40대 초반, 인생의 정점에서 마주한 깊은 좌절과 그 안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가 따뜻하게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주씨는 “보잘것없지만 내가 경험한 것들을 통해 현재 투병 중인 환자와 가족이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절망 속에 있던 이가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라고 잠깐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렇게 남은 힘을 모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앞으로 내 삶의 목표”라고 했다. 그가 지독한 고통 안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주정미(48·사진) 씨는 해맑은 표정으로 웃었다. ‘열정적이고 똑 부러지게 일하는 분’(권순만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업무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부하’(변재진 전 보건복지부 장관)라는 세간의 평가가 무색할 만큼 그저 소녀 같아 보이는 미소였다.
주씨는 지난겨울까지만 해도 보건복지부 국장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정책센터에 파견돼 근무하던 ‘잘나가는’ 고위 공무원이었다. 1989년 행정고시(행시)에 최연소로 합격했고, 의약분업 당시 공보담당 서기관을 맡았으며, 건강보험 정책을 책임지는 보험정책팀장도 거쳤다. 2006년 혁신인사기획팀장(현 인사과장)에 여성 최초로 발탁되는 등 ‘금남의 벽’을 잇달아 넘어서며 능력을 발휘해 주위의 신망도 두터웠다.
세 번째 항암치료
그의 남다른 경력을 주워섬기자 주씨는 조금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농담처럼 “제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한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너, 그러고 살다 크게 아플 줄 알았다’고. 저는 그냥 열심히 산다고만 생각했는데, 남들 눈에는 그렇게도 보였나 봐요”라고 했다.
이런 말을 해놓고는 또 웃는다. 주씨에 따르면 “암에 걸린 뒤 웃음이 헤퍼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종일 가야 웃을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웃고, 꽃이 핀 걸 보면서 웃고, 가만히 앉아 있다 혼자 배시시 웃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눈가에 웃음 주름이 보기 좋게 잡혀 있었다.
하지만 사실 지금 그는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2009년 유방에서 처음 발견된 암이 이듬해 뼈로 전이된 것이다. 두 차례의 혹독한 항암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잡힌 줄 알았던 암의 기세는 지난해 가을부터 다시 등등해졌다. 암 재발 소식을 전하며 담당의사는 주씨에게 아이들이 몇 살인지부터 물었다고 했다.
“큰애가 대학생, 작은애는 고등학생이라고 하니 ‘많이 키우셨네요. 그럼 됐습니다. 이제 다른 생각 말고 치료에만 집중합시다’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며 ‘아, 지금 내가 많이 심각한 상태구나.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하는 거구나’ 깨닫게 됐어요.”
몸 상태도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그는 일을 쉬기로 결심했고, 지금은 경기 가평 한 펜션에 장기 투숙 형태로 머물고 있다. 남편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찾아와 하루씩 머물다 가고 아이들이 틈틈이 들르긴 하지만, 평소에는 잣나무 숲에 둘러싸인 황톳집에서 하루 세끼를 혼자 해 먹으며 오롯이 자신을 돌보는 데만 집중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온통 하늘과 나무와 꽃들뿐. 그러다 보니 3주에 한 번씩 항암주사를 맞으러 서울 갈 때를 제외하곤 세상 흐름을 잊고 산다. 주씨는 “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새삼 ‘좀 더 일찍 이런 시간을 가졌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예전엔 늘 많이 바빴어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주말마다 동네 목욕탕에 가서 때 밀어주는 서비스를 받을 때 정도뿐이었죠.”
그러다 2009년 봄, 목욕관리사 아주머니로부터 오른쪽 가슴에 멍울 같은 게 만져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두어 달 뒤 다른 아주머니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그냥 지나쳤다. 미루고 미루다 7월 중순 찾아간 근무지 근처 병원에서 그는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이미 암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였지만, 이때도 일 걱정부터 했다고 한다. 국장으로 승진한 지 5개월여밖에 되지 않았고, 아동청소년복지정책관으로 우리나라 아동과 청소년 복지 정책 전반을 담당한다는 데 대한 보람과 열정이 넘쳐나던 때였기 때문이다.
다시 웃을 수 있는 이유
그러나 암은 호락호락한 병이 아니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한 뒤부터 구토가 일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각종 통증이 수시로 그를 찾아왔다.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고, 간신히 잠자리에 들어도 두 시간에 한 번씩 깨어나는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혈액순환이 안 돼 손끝 발끝의 말초신경이 둔해지더니, 급기야 모든 손톱이 피부로부터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 염증이 생기면 항암치료를 받지 못하게 될까 봐 손톱이 있던 부위를 이틀에 한 번씩 소독하면서, 붕대로 감싼 채 버텨야 했다. 밥 먹을 때도 일회용 비닐장갑을 낀 채 음식을 집었다. 그렇게 혹독한 고통을 견딘 끝에 마침내 이겨냈다고 생각한 암이 다시 찾아왔을 때 주씨가 느꼈을 절망이 얼마나 컸을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힘을 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도록, 암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써서 일찍부터 암에 전력으로 맞서도록 돕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몸의 이상 신호를 지나쳤던 자신의 무심함과 항암치료 과정에서 저질렀던 실수들, 그리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암과 싸워나갈 수 있게 자신을 일으킨 힘 등에 대해 차근차근 정리한 책 ‘암이래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를 썼다.
주씨가 가장 강조하는 건 몸이 건네는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라는 것. 돌아보면 그는 암 진단 1년여 전부터 오른쪽 어깨가 많이 아팠다고 했다. 잠을 자다 팔이 저려 깨곤 할 정도였지만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전에 없던 꽃가루 알레르기가 생겨난 것도, 술을 마시면 한 번씩 기억이 나지 않던 것도 모두 몸이 보낸 이상 신호였는데 무시했다. 주씨는 “암은 빨리 찾아낼수록 생존율이 높아지고, 경제적 부담은 줄어든다. 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는 지나치지 말고 병원을 찾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그의 책에는 이외에도 체온을 올려 면역력을 높이는 법과 건강한 식사법, 그리고 마음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법 등에 대한 주씨의 체험적 정보가 담겨 있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으려면 △좋아하는 노래를 반복해서 부르거나 듣는다 △놀랍거나 감동스러운 것을 보고 마음으로 느낀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체험한다 △일부러라도 웃는다 △작은 친절이라도 베푼다 △뜨거운 목욕을 한다’처럼 소박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힘이 있다. 세상 두려울 것 없던 한 사람이, 한창 힘이 넘치던 40대 초반, 인생의 정점에서 마주한 깊은 좌절과 그 안에서 깨달은 삶의 지혜가 따뜻하게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주씨는 “보잘것없지만 내가 경험한 것들을 통해 현재 투병 중인 환자와 가족이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절망 속에 있던 이가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라고 잠깐 마음의 위안이라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이렇게 남은 힘을 모아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앞으로 내 삶의 목표”라고 했다. 그가 지독한 고통 안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