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성 안중근의사기념관장.
조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78년 최연소(29세) 서울대 교수 발령을 받고 귀국했다. 이후 경영전략부터 국가경쟁력, 경영디자인, 윤리경영, 창조경영까지 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고 선도해왔다. ‘세월은 우리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마음속 열정까지 시들게 하진 못한다’는 사무엘 울만의 시구를 좋아하는 ‘젊은’ 학자로 살아왔다.
밸런타인데이? 안 의사 사형 언도일
조 교수는 요즘 안중근 의사의 삶과 죽음이 우리 시대에 전하는 메시지를 알리는 일과 36년 학자 생활을 정리하는 글쓰기에 골몰하고 있다. 특히 최근 5년간은 서울대에서 ‘창조’와 ‘나눔’에 관한 강의를 주로 해왔는데, 이를 우리 사회의 미래 패러다임이라고 역설했다.
2월 11일 조 교수를 만난 곳은 서울 남산에 자리한 안중근의사기념관. 그가 관장으로 있는 곳이기도 하다. 14일 밸런타인데이가 안중근 의사 사형 언도일이기도 하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새삼 안 의사 추모 분위기가 일고 있다. 더욱이 1월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들어서자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라고 망언을 쏟아내 우리 국민은 물론 중국 국민까지 분노하게 했다. 심지어 2월 초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까지 나서서 안중근 의사를 “사형을 판결받은 인물”로 규정해 비난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밸런타인데이는 일본 상술에 의해 ‘초콜릿을 주고받는 날’로 변질돼 여러 가지를 생각게 한다.
일본 관방장관의 ‘테러리스트’ 망언에 대한 조 교수의 생각은 단호했다.
“안중근 장군의 항일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의 진원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안 장군은 군인 신분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해 동포를 말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정조준해 저격한 것이지 무고한 일반인에게 해를 끼친 테러리스트가 절대 아닙니다. 안 장군은 심지어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있던 영사를 비롯한 정부관리에게도 팔꿈치와 다리 등에 경상만 입혔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테러리스트가 될 수 있습니까.”
조 교수는 안중근의사기념관 관장으로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안중근 의사와 깊은 인연의 뿌리를 갖고 있다. 안 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가 조교수의 왕고모할머니, 즉 증조할아버지의 누이기 때문이다. 조 교수의 배우자 역시 김구 선생의 비서였던 김우전 광복회 회장의 따님이라 집안 전체가 독립운동가 자손이다.
조 교수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줄곧 ‘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안 의사 스스로 ‘장군’이라는 칭호로 불리기를 유언처럼 바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안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개인의 보복 행위가 아닌 명백한 우리 무장독립군의 항일투쟁이기 때문이다. 안 의사가 재판 당시 “나는 전쟁 중 적장을 사살한 군인이다” “나는 대한제국 의병군 참모중장이므로 군사재판에 회부해달라”고 주장한 것이나,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군인 본분이다)’이라는 글을 남기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군인정신을 강조한 것만 봐도 군인으로서 의연한 삶을 살다 간 그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조마리아 여사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안중근 의사 집안은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뜬 가톨릭 신자였다. 하지만 살인을 금기시하는 가톨릭 교리 때문에 안 의사 서거 당시에는 교회에서 그를 위한 미사를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교회 명령에 불복한 프랑스인 신부 빌렘이 자발적으로 그의 임종예배를 주도했는데, 빌렘 신부는 이 사건으로 신부 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당하는 일까지 겪었다. 조 교수는 이에 대해 ‘도덕’과 ‘윤리’ 개념을 들어 설명했다.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에게 보낸 서한 내용. 중국 하얼빈에 건립된 ‘안중근의사기념관’ 개관식 장면.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언도받은 뒤에도 옥중에서 꾸준히 대한독립과 세계 평화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글로 남겼다(왼쪽부터).
“윤리적으로 안 장군의 행동은 무척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주권을 잃고 그 국민이 다른 나라에게 핍박받는 것은 국민과 동포 처지에서 당연히 막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윤리가 사회법을 잣대로 하는 반면 도덕은 자연법에 의거한 것입니다. 종교는 무릇 자연법을 따르는 것이어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는 도덕적 기준에 의거해 윤리적 기준과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겠죠. 하지만 가톨릭에서도 최근에는 안 장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그를 ‘복자’, 즉 성인(聖人) 전 단계로 칭합니다. 백년전쟁 당시 잔 다르크가 100년 넘게 지속된 전쟁의 고통을 끝내고 프랑스를 구하려고 선봉에 나서 성녀 칭호를 얻은 것처럼, 안 장군의 항일운동 또한 평화와 공존을 위한 종교적 선택이었다는 해석입니다. 실제로 안 장군은 대단한 평화주의자이기도 했고요.”
조 교수는 안 의사를 진정한 휴머니스트이자 인권주의자, 원칙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그의 의거는 또 대한민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 평화와 공존의 의미로도 연결된다고 했다. 안 의사는 “평화를 사랑하는 일본 국민을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했다”고 말할 만큼 대한민국 미래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나아가 세계 평화와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광복 70년,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졌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분열을 거듭하는 우리 현실에서 안 장군의 이야기는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자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평화와 공존에 대한 안 장군의 철학은 단순히 한국 독립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걱정했던 것처럼 일본의 침략행위는 결국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참사를 낳았습니다. 전쟁에 패망한 일본은 미국에 점령당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죠. 안 장군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은 우리 동포를 보호하고 주권을 지키려는 일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미래, 세계 평화를 걱정한 선견지명에서 비롯한 일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평화주의 철학과 올곧은 품성은 옥중에서 그를 감시하던 일본인 간수 치바 도시치까지 감화하게 했고, 그의 고향 미야기현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안 의사를 추모하는 법요가 성대하게 열릴 정도다.
창조와 나눔의 철학 설파
조 교수가 안중근 의사 바로 알리기 작업 외에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창조와 나눔의 철학이다. 이는 그가 강단에 선 36년을 집대성하며 내놓은 미래 패러다임을 뜻하는 단어들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이끈 패러다임이 모방, 벤치마킹이었다면 앞으로 미래를 이끌 단어는 ‘창조’와 ‘나눔’이 될 것입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창조경영은 평화와 공존을 위한 즐거운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조 교수는 자신이 진행하는 모든 수업에서 기말고사를 폐지하는 대신 학생들에게 뉴 비즈니스 모델, 신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발표하게 했다. 그리고 5년 전부터는 ‘창조’와 ‘나눔’을 키워드로 삼은 실험적 형태의 강의를 시작했다. 자신을 표현하려고 동영상 제작은 물론, 연극이나 뮤지컬까지 준비해야 하는 강의 방식은 학생뿐 아니라 조 교수 자신에게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나눔’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무료병원으로 현장학습을 나가는 등 지금까지의 경영학 수업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강의를 하는 동안 학생들보다 제가 더 많이 배운 느낌입니다. 예술은 모든 창조적 행위를 가능케 합니다. 창조와 나눔, 이 둘은 예술에 그 뿌리를 둡니다. 경영학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측면이 강하죠.”
그는 개인적으로 안중근의사기념관 사업이 자신에게 창조와 나눔의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했다.
“2011년 가을부터 안 장군의 뜻을 국민과 함께 나누려고 안중근 아카데미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얼빈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된 것처럼 국내는 물론, 해외에 안중근의사기념관 분관을 개설하는 일도 도모하고 있고요.”
교수직에서는 물러나지만 퇴임 이후 그는 더욱 바빠질 예정이다. 인생 2막은 이제 국가와 사회, 학교로부터 받은 도움을 어떤 형태로든 갚아나가는 시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효율성을 중심으로 인풋 대비 아웃풋을 늘리는 것이 경영 목표였지만 21세기에는 그 성격이 확연히 바뀌었습니다. 기업이나 학교,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조화를 통해 자기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해졌죠. 발전을 위해 누군가를 희생하는 것은 구시대적인 발상입니다. 모든 구성원이 함께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이러한 창조 과정이 나눔으로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목표이자 바람입니다.”
조동성 관장이 안중근 의사의 사형 재판 현장을 재현한 모형 앞에서 당시 정황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