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서울 조계사에서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가운데)과 스님들이 도박 사건에 대해 참회하는 108배 참회정진을 하고 있다.
8월 21일(음력 7월 15일) 하안거 해제를 마친 수좌들이 만행(萬行)을 마다하고 조계사로 모여든 까닭은 무엇일까. 그들은 ‘청정승가 구현이라는 목표를 위해 자승 (총무)원장의 연임은 불가하다’는 내용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 한 장을 조계사 옆 한 가건물(묵언정진 장소)에 걸었다. 10월 10일 치르는 제34대 총무원장 선거에서 종단 개혁과 쇄신을 이룰 수 있는 참신하고 수행력을 갖춘 총무원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요구다.
“자승 재신임 vs 절대로 안 된다”
수좌들은 “모든 스님이 돈을 떠나 수행과 교화의 본분에 충실할 수 있도록 제도 및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며 △비구승 중심이 아닌 사부대중이 참여하는 종단 운영과 재정투명화를 이룰 것 △은처승(隱妻僧) 문제는 계율에 의해 바르게 정립할 것 △폭력, 부패, 비리, 비방, 폭로 등에 의한 비승가적 행위를 근절하고 청정승풍을 회복할 대책을 마련할 것 △도박, 폭력에 연루된 스님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 △직선제를 포함한 선거제도를 개선해 화합승가를 이룰 것 등을 촉구했다. 또 이 요구사항을 원만히 이루기 위해 자승 원장의 연임을 강력 저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조계종 기득권 승려들의 행보가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수좌들의 행보는 청정한 승가구현이라는 정신적 이상향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극명히 대비된다. 이는 돈과 권력이 없는, 이름 없는 수좌들의 묵언정진이 힘을 얻는 이유이기도 하다.
50여 년 전 불교계는 ‘불법에 대처 없다’는 구호 하나로 일어선 소수 비구승이 대처승을 밀어낸 ‘정화불사’를 겪었다. 20년 전에는 무소불위 힘을 과시했던 서의현 전 총무원장이 개혁파 승려들에게 축출된 종단개혁이 있었다. 이런 역사는 이번 수좌들의 행보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조계종의 현 상황이 그 당시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조계종은 지난해 5월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백양사 승려 도박사건’ 이후 잇따른 범계(계율을 어기는) 행위로 큰 홍역을 겪고 있다. 그 혼란의 중심이 자승 원장을 비롯해 조계종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승려’라는 폭로가 잇따르면서 제2, 제3의 정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불교계에 빠르게 확산 중이다. 수좌들이 요구한 7개 항은 현재 조계종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비쳐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자승 원장을 지지하는 세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들은 자승 원장의 범계 사실이 거론되지만 어느 것 하나 뚜렷한 물증이 없으며, 대부분 의혹 제기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지난해 터진 백양사 승려 도박사건은 엄밀히 말해 다른 계파 승려들이 저지른 일이며, 최근 터져 나온 도박사건 역시 수사가 진행 중이므로 그 결과가 나오기 전에 반대파에서 이를 근거로 공격하는 것은 정치 공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자승 원장 측 한 관계자는 “자승 원장은 지난 4년간 계파정치 탓에 제대로 할 일을 못했다. 이번에 연임하게 되면 제대로 자성과 쇄신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도법 스님, 수경 스님 등 교계 바깥에서 비교적 후한 평가를 받아온 승려들이 자승 원장 편에 서서 연임을 돕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 자승 원장 측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은 연임 저지를 요구하며 묵언정진에 들어간 수좌들이다. 수좌들은 교단의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자승 원장 측도 매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다. 수좌들을 내치지 않고 정진 공간을 내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의 연임을 반대하는 수좌들이 ‘가피’에 둘러앉아 묵언정진하고 있다.
수좌들의 정진 장소는 조계사 입구 우정총국 화장실 뒤쪽의 ‘가피’라는 가건물이다.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는 열악한 장소에서 수좌 30여 명이 면벽 대신 동그랗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하루 9시간씩 정진하고 있다. 9월 6일부터는 총무원 청사 1층 로비에서 단식 및 묵언정진에 들어갈 예정이다. 이들이 든 화두는 ‘이 뭐꼬?’가 아닌 ‘자승 원장 OUT’이다. 자승 원장이 연임하거나 그 대리인이 총무원장에 선출될 경우 더 많은 수좌가 조계사로 모여들 개연성이 있다. 아직 합류하지 않은 수좌들도 대부분 정진에 든 수좌들과 인식을 같이해 그 폭발력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게 대변인 선법 스님의 설명이다.
그러나 수좌들의 요구가 쉽게 관철될 것 같지는 않다. 자승 원장은 후보등록일(9월 18~29일)을 앞두고 9월 5일 현재까지 불출마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의 향방은 오리무중이다. 야권(3자 연대)에서 보선 스님(전 종회의장·대흥사 회주)을 후보로 내세워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자승 원장의 입지는 견고하다. 연임하거나 최소한 대리인을 당선시킬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 아직 우세하다. 문제는 연임이든 대리인 당선이든 수좌회가 요구한 ‘자승 원장 연임 저지, 청정승가 구현’과는 동떨어진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계종단이 또 한 번 혼란사태를 겪게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조계종을 염려하는 사부대중께서는 저희 수좌들의 뜻에 적극 동참해주시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불교 중흥의 깃발을 높이 듭시다!”
조계사 정진을 시작하면서 사부대중을 향해 외친 수좌들의 ‘소리 없는’ 호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조계사가 위치한 서울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에 국민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