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 위주 평가 배제” 상당 부분 훼손
박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교육평가 분야의 권위자로 국립교육평가원장,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한국교육학회장 등을 지냈다. 1988년 문교부(현 교육부) 용역을 받아 대입제도 개선안을 내놓을 당시 그가 강조한 것은 단편적인 사실을 외웠다가 시험장에서 잘 끄집어내는 능력을 토대로 학생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대신 기초지식과 문제해결적 사고능력을 측정하려고 개발한 것이 바로 수능이다.
“그래서 처음엔 언어와 수리, 두 영역밖에 안 만들었어요. 과목 성격도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고요. 언어는 마치 지능검사 같았죠. 응시자가 대학 강의를 알아듣고 논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수리도 계산능력은 전혀 보지 않고 추론능력만 평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쪽에서 영어시험 추가 요구가 나왔다. 영어강의가 늘고, 원서를 교재로 활용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만큼 수험생의 영어능력 정도는 평가해줘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였다. 시험과목이 셋으로 늘었다.
“이러한 내용으로 대입제도 개선안을 발표하려 했더니 압력이 들어오더군요. 사회과 탐구를 빼놓고 언어, 수리능력만 평가하면 안 된다고요. 그 압력이라는 건 교육부 장관 아니라 대통령도 감당 못 할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좋다, 그럼 ‘탐구’라는 이름도 넣자’고 해서 ‘수리’ 과목 이름을 ‘수리·탐구’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개혁안을 중앙교육심의회에 제출하니 이번엔 과학교과 쪽에서 들고 일어났다. 결국 ‘사회탐구’ ‘과학탐구’라는 별도 과목이 생겼다. 그래도 과거 학력고사처럼 개별 과목마다 문제를 출제하지는 않고 범교과적으로 학생의 수학능력을 평가한다는 기본 방침을 유지했다.
“그러자 정부 안쪽에서 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더군요. 범교과적으로 출제하면 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치느냐.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 아니냐….”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가 대입제도 개선방안을 연구하던 1989년 발표한 ‘대학교육적성시험 문항개발 연구’ 보고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대학교육적성시험’은 학력고사를 대체할 시험의 이름으로 당시 사용하던 것이다.
“학력고사 때는 선택과목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학생들이 자신이 시험 치를 과목을 직접 고르는 거였는데, 과목마다 더 많이 선택받으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어요. 그러다 보니‘선택과목 쉽게 내주기’ 같은 일도 벌어졌고요.”
수능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수능 도입 당시 그는 “대체 이 시험이 학력고사와 어떤 점에서 다르냐”고 묻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여러분이 지금 학력고사를 치르면 결코 여러분이 졸업한 대학, 그 학과에 다시 입학하지 못할 겁니다. 고등학생 때 배운 걸 다 잊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동안 우리나라는 몇 년 안 돼 다 잊고 말 것을 기준으로 학생을 평가했다는 겁니다. 수능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여기서 수능 언어영역 시험을 보면, 입시공부 전혀 안 하고도 100점 만점에 90점 이상을 받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박 명예교수는 이것이 대학입시의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또 수능제도 개발 당시부터 강조한 ‘정상적인 고교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이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 출제’ 원칙도 지켜야 한다고 믿는다.
당장 진통 있어도 큰 그림 그려야
“전국에 고등학교가 약 2000개 있습니다. 학교당 한 명씩 만점을 받으면 수능 만점자가 2000명 나오는 겁니다. 이게 이상합니까. 오히려 전교 1등 하는 학생조차 풀지 못하는 문제를 내놓고 평가를 한다는 게 비정상적이죠. 평가는 교육을 지원하는 도구이지 목표가 아니에요. 학생을 한 줄로 세우려고 어려운 문제를 내놓고, 1점 차를 기준으로 당락을 결정짓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박 명예교수는 1997년 국립교육평가원장을 맡아 대학입시 업무를 총괄하면서 수능이 끝난 뒤 최고득점자와 계열별 수석을 공개하던 관행을 없앴다. 과거 0.1점 단위로 끊어 발표하던 점수대별 누계 분포표도 1점 단위로 폭을 넓혔다. 그는 “아무리 엄정하게 만든 평가라도 측정 오차가 ±5점 수준이다. 수능 335점이나 340점이나 차이가 없다는 얘기”라며 “특정 대학에서 수능 점수만을 기준 삼아 340점 받은 학생은 붙이고 335점 받은 학생은 떨어뜨리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좀 더 근원적으로 수능점수에 대한 맹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게 박 명예교수의 생각이다.
“수능이라는 제도를 처음 만들 때 취지는 이 시험으로 응시자의 수학능력만 판별하고, 학생 선발권한은 대학이 갖도록 하자는 거였어요. 이를 위해 응시자마다 점수를 주지 말고, 최대 5등급 정도로 구분만 하자는 생각도 했죠. 대학 학점이 ‘ABCDF’로 나눠지는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박 명예교수의 이 생각은 ‘대학입시에서 그렇게 할 경우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이 문제가 된다’는 반대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든 평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최근 기업 채용에서 학점, 영어성적 등의 비중이 줄고 면접이 중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선발하기에 더 적절한 방법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대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의 기준과 원칙에 따라 학생을 선발할 수 있어야 해요.”
명문대 선호현상과 학벌주의가 공고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당장 대학자율선발 방식을 도입할 경우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은 그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능 도입 당시 이 제도가 정착하면 우리 교육 전반에 큰 변화가 생길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하지만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학생들은 암기식 교육과 입시경쟁에 시달리잖아요.”
박 명예교수의 바람은 이제라도 전국의 학생을 한 줄로 세우는 입시제도를 없애고, 학교교육을 정상화할 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는 당장은 진통이 있더라도 우리 사회의 지향에 맞는 대입제도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우직하게 지켜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