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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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계급’ 활동이 활발한 도시가 경제적으로 번성한다

[김재준의 다빈치스쿨] 문화경제학 창시자 윌리엄 보멀이 예술과 경제에 주목한 이유

  • 김재준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

    입력2024-05-09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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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창조성과 창의성을 갖춘 인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창조적 인재가 많은 도시가 경제적으로 부흥한다는 것도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도시를 중심으로 문명이 발전하면서 고밀도 도시가 늘어날 전망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 고밀도가 적절한지다. 이와 관련해 조각을 만드는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필자는 미국 프린스턴대 대학원에 다닐 때 그의 수업을 듣기도 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오페라 ‘카르멘’의 한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오페라 ‘카르멘’의 한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생산성 지체 겪는 공연예술 분야

    보멀은 저명한 경제학자인 동시에 학생들의 논문을 꼼꼼히 고쳐주는 좋은 스승이었다. 그는 학부 학생들에게 조각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은 매우 깊은 울림을 줬다. 예술 교육은 학생의 창의적 사고와 미적 감각을 발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학생들은 조각 수업을 통해 형태와 공간을 조작하는 방법을 배웠고, 이는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보멀은 문화경제학 창시자로 유명하다. 그는 무용, 음악, 연극, 서커스, 팬터마임, 인형극 등 공연예술 장르의 비용 문제에 관해 깊이 연구했다. 이 가운데 보멀의 비용질병 이론이 특히 유명하다. 그의 이론은 1960년대 중반 예술 분야에서 시작된 현상과도 맞닿아 있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의 비용질병 이론은 공연예술업계가 마주한 생산성 문제를 다룬다. [미국 프린스턴대 제공]

    경제학자 윌리엄 보멀의 비용질병 이론은 공연예술업계가 마주한 생산성 문제를 다룬다. [미국 프린스턴대 제공]

    이 시기 미국 사회는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을 목도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말한 ‘문화 소비자’의 출현과 대중문화 산업의 발전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에서는 고급 예술, 특히 공연예술 단체가 만성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생산성 지체’라는 근본 문제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가령 자동차 산업은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발전을 거듭했지만, 공연예술 산업은 그 특성상 생산성 개선이 어렵다. 연극 한 편을 무대에 올리려면 일정 수의 배우와 스태프가 필요하다. 오케스트라 공연 역시 일정한 인원의 연주자 없이는 풍부한 소리를 낼 수 없다. 예산이 없다고 현악사중주를 3명이 할 수 없고, 연습 시간을 100시간에서 50시간으로 줄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세기에 100시간 연습이 필요했던 곡이라면 지금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공연예술 산업은 기술 발전이 가져온 생산성 향상을 누리기 어려웠고, 그 결과 소득 격차가 나타났다. 이는 공연예술 단체들이 겪는 만성적 현상으로, ‘보멀의 비용질병’ 또는 ‘보언의 저주(Bowen’s curse)’로 불린다.



    보멀은 이 현상을 경제학적 관점에서 연구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공연예술 산업은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더라도 생산성이 향상된 다른 산업과 동일한 임금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임금 상승이 이뤄지지 않으면 임금이 상승한 다른 분야로 인재를 빼앗기고 만다. 이 경우 사람들은 피아노 연주회나 무용 공연이 사라진 유령 도시에서 살게 될 것이다. 결국 공연예술 단체들은 자본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하고, 이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공연예술 분야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지원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생산성이 낮은 산업에 지원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화적 다양성과 예술의 지속가능성은 위협받는다. 예술 분야를 보호하고 촉진하는 정책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예술의 경제적 효과

    “정부 예산은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 청소년 교육, 노년층 복지 같은 곳에 우선적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적잖다. 예산의 한계편익을 비교해 사용처가 결정돼야 한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예술의 가치를 계산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예술은 예술가와 예술 소비자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다양한 문화예술이 살아 있는 도시는 창조적 공간을 조성하고, 이 창조적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효과는 측정이 어렵다. 미국 뉴욕,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을 상상해보라.

    보멀의 연구는 예술과 경제가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연구는 예술 분야에 대한 투자가 문화적 가치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창출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는 예술 교육이 고등교육기관에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일깨운다.

    리처드 플로리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에 따르면 창조계급의 활동이 활발한 도시일수록 경제적으로 번성한다. 창조계급은 예술가, 과학자, 엔지니어, 교육자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포함한다. 이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창조도시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은 대표적인 대학 도시다. 이곳 프린스턴대는 세계적인 연구 기관으로 과학·기술·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 활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 바로 프린스턴이라는 소도시의 탁월한 위치다. 뉴욕과 필라델피아 사이에 위치해 두 지역을 모두 1시간 이내에 갈 수 있다. 이것이 학생과 교수, 연구원에게 창조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기반을 제공한다.

    프린스턴 주변에는 대학 연구와 밀접하게 연결된 다양한 스타트업과 기술 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대학이 개발한 최신 연구 성과를 상용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창출된 고용과 경제 활동은 지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젊은이들이 놀기 좋은 도시가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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