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7호선 온수역 5번 출구를 나와 5분 남짓 걸으면 서울 유일의 기계공업전문단지인 온수산단이 나온다. 1970년 영등포공업인협회가 주도해 ‘영등포기계공업공단’으로 문을 연 첫 민간공업단지이기도 하다. 총면적 15만7560㎡ 중 서울 구로구 지역이 10만7012㎡, 경기 부천시 지역이 5만548㎡이며, 현재 기준 219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바쁜데 시간 재면서 일할 수 있나”
지난해 2월 국회에서 주당 최대 근로시간을 기존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을 골자로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주52시간 근무제)이 통과됐다. 같은 해 7월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는 실시됐고, 2020년 1월 50인 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 이듬해 7월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될 예정이다.중소기업들은 내년이나 내후년까지 근로시간을 조정해야 하는데도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5월 10일 인터넷 취업포털사이트 인크루트가 273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6%가 ‘주52시간 근무제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온수산단의 경우 입주 업체 대부분이 근로자 수가 50명이 채 안 되는 영세한 규모다. 당장은 아니지만 내년 혹은 내후년으로 예정된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두고 입주 업체들의 표정도 제각각이었다.
온수산단에 입주한 한 동력전달장치 부품 생산업체는 지난해부터 근로시간 조정에 나섰다. 오전 8시 30분 출근, 오후 6시 30분 정시 퇴근을 권장하고 생산직 근로자의 토요일 격주 근무도 앞으로 없앨 방침이다.
업체 관계자는 “전체 직원 수가 35명으로 당장 주52시간 근무제 대상은 아니지만 근무 조건 개선 차원에서 근로시간을 줄였다”고 밝혔다. 물론 최근 불경기로 예년보다 매출액이 15%가량 줄기도 해 업체 특성상 근로시간 조정이 가능했다. “대기업과도 거래하지만 풀리, 벨트 같은 기계장치 부품이 주력 상품이라 납기 압박이 적어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근로시간 줄어 월급 반 토막 나면 누가 책임지나”
근로시간 조정을 앞둔 근로자들은 임금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하지만 온수산단 내 상당수 업체는 주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대한 대비책을 묻자 “당장 대상이 아니라 손 놓고 있을 뿐, 뾰족한 수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근로자 수 30명 규모로 2021년 7월부터 주52시간 근무제 대상이 되는 한 금속가공업체 관계자는 “내후년부터 근로시간 단축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로서는 속수무책”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내부 검토 중인 일부 공정의 자동화도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 ‘페이퍼 플랜’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그는 “올해부터 근로자의 정년퇴직으로 결원이 생겨도 추가 고용을 하지 않는 것이 대책의 전부”라고 덧붙였다. 같은 업장의 한 근로자 또한 “새 인력 없이 원래보다 짧은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하려면 결국 남은 사람들의 노동 강도가 세지는 것 아니겠느냐”며 우려를 표했다.
최근 불경기로 매출이 줄어 자금 여력 등 ‘기초체력’이 약해진 것 또한 주52시간 근무제 도입을 앞둔 온수산단 내 업체들이 우려하는 부분이다. 온수산단에서 30년째 영업 중인 한 건설자재 제조업체의 공장장은 “현재 매출액이 예년의 40%가량에 불과해 3개월째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고 밝혔다. 보통 건설공사가 많은 4~10월이 건설자재 제조업계의 성수기인데 최근 건설경기 둔화로 일감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 만약 주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다면 지금보다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서울 낮 최고기온은 27℃를 기록해 예년보다 더웠다. 대지가 한창 달궈진 오후 3시. 용접기 등 화기에서 나오는 열을 쇠붙이들이 머금어 온수산단 내 공장에서 느껴지는 더위는 벌써 한여름을 방불케 했다. 그늘 밑에 삼삼오오 모여 잠시 쉬는 근로자들에게 말을 붙여봤다. ‘주52시간 근무제’라는 단어를 꺼내기 무섭게 한 근로자가 “도대체 그런 어처구니없는 제도는 누가 만든 것인지 궁금하다”며 언성을 높인다. 플라스틱 금형사출업체에서 일하는 그는 “일반 사무직과 달리 제조업계는 특정 시기에 일감이 몰려 근로시간이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대기업들이 필요에 따라 일감을 발주하는데, 하청업체가 칼같이 퇴근하면 납기를 맞출 수 있나.”
옆에 있던 연마가공업체 직원도 말을 거든다. 그는 “쉬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 잔업이 사실상 금지되면 당장 생계가 걱정이다. 온수산단에서 10년 이상 일한 사람이 받는 월급이 보통 세전 300만 원가량인데 여기서 잔업 수당의 비중이 3분의 1 이상이다. 한 주에 52시간만 일하면 집에 들고 가는 돈이 반 토막 날 수도 있는데 누가 책임져주나”라며 한숨을 내쉰다. 근로자들은 “일찍 퇴근해 수입이 줄면 쉬는 것이 아니라 대리운전 등 투잡을 뛰는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일감 없어 주52시간도 일 못 해 … 일찍 문 닫는 공장들
5월 14일 저녁 일찌감치 문을 닫은 서울온수산업단지의 공장들 모습(왼쪽), 서울 시내 한 빈 점포에 ‘임대문의’ 현수막이 나붙었다. [김우정 기자, 뉴스1]
온수산단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주변 상권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에서 20년 가까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50대 신모 씨는 “보통 저녁시간에 30~40인분 식사를 준비했는데 요즘은 10인분 정도 판다. 매출도 20%가량 줄어서 직원을 내보내고 혼자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근처 호프집 사장인 이모 씨도 “16년째 장사하면서 최악의 수입을 내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손님의 80% 이상이 온수산단 근로자인데 요새 일감이 감소하자 당장 술값부터 줄였다는 것.
해가 지기도 전 한산해지는 온수산단 풍경을 보며 이곳에서 30년 이상 제조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70대의 노사장도 할 말이 많다. 그는 “큰 규모의 생산라인을 갖춘 대기업과 달리 이곳 제조업체들은 일감이 몰리는 성수기에 숙련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이 불가피하다”며 “수십 년째 온수산단에서 기업을 운영해온 입장에서 정부 정책이 현실성 없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한다.
이른 퇴근을 서두르는 온수산단 근로자들과 드문드문 오는 손님을 기다리는 인근 식당 주인들 사이로 저녁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이병태 KAIST(한국과학기술원) 경영대학 교수는 “근로자 수 49명 이하인 영세사업장의 경우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시 필요한 추가 고용이나 설비 자동화에 대처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며 “저소득 근로자 또한 평일 잔업이나 휴일 근로로 부족한 임금을 보충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정부가 근로시간을 규제하되 근로자가 원하면 예외를 허용하는 영국의 ‘선택적 배제 제도’처럼 대책 마련을 통해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피해를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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