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의 상징 판문점.
판문점이 있는 경기 파주시는 여타의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시 경계로 들어서면 ‘미래를 여는 도시’ ‘통일한국의 중심도시’라는 선전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GP(Guard Post·경계초소) 간 거리가 500m밖에 안 될 정도로 긴장감이 높지만, 한편으로는 개성공단으로 대표되는 남북경제협력과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지역보다 충만한 곳이다.
탁자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
30도가 넘는 무더위로 폭염주의보가 내린 8월 7일 오전 9시 반. 통일대교에서 한미연합사령부(연합사) 공보팀과 만났다. 이들이 취재 안내를 맡은 건 통일대교 이북에 있는 도라전망대, 제3땅굴, 판문점 등이 연합사 관할이기 때문이다.
파주시 문산읍에서 군내면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통일대교는 이 지역 민통선 구실을 한다. 사전에 당국 허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다리를 넘어갈 수 없다. 남방한계선 철책을 지나 비무장지대로 접어들자 도로 왼편으로 태극기가 보인다. 대성동 자유의 마을 한가운데서 휘날리는 이 태극기는 100m 높이에 게양돼 있다. 잠시 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게양대에 걸려 있다는 새빨간 인공기가 눈에 들어온다. 높이가 자그마치 160m. 태극기 크기는 아파트 231㎡(70평), 인공기 크기는 아파트 445㎡(135평)에 해당한다고 한다.
오전 10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으로 들어갔다. 자유의 집을 지나자 낯익은 광경이 펼쳐진다. 과거 남북회담이 열리던 하늘색 단층 건물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서서 마네킹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한국군 경비병들. 모두 5명이 배치돼 북측을 노려본다. 반면 맞은편 판문각 쪽 북한군 경비병은 한 명뿐이다. 연신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대고 우리 일행을 살펴본다. 경비병들만 놓고 보면 한국군이 북한군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느낌을 준다. 양측 경비병의 대조적인 근무 자세와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쁜 방문객들의 천편일률적인 행동이 한 편의 부조리극 같다.
회담장 건물에 들어서면 탁자 여러 개가 놓여 있는데, 한가운데 있는 탁자가 군사분계선에 해당한다. 하지만 회담장 안에서는 양측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남측 관광객은 자유의 집을 향한 남쪽 문으로, 북측 관광객은 판문각을 향한 북쪽 문으로 드나든다는 점이다. 북한은 정전협정 폐기 선언 후 이 회담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판문점 내 양측 초소 간 거리는 25m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의 원지명은 널문리다. 6·25전쟁 전엔 경기 장단군 진서면에 속했다. 마을에 널문이 많다고 해서 널문리로 불렀다고 한다. 널문의 한자가 바로 판문(板門)이고, 판문점은 널문리의 주막을 뜻한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정전협상을 시작했는데 북한군의 무력시위로 회담장소의 중립성이 문제가 됐다. 그에 따라 그해 10월 널문리로 장소를 옮겼고, 이곳 지리에 어두운 중공군 대표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인근 주막에 ‘판문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것이 판문점의 유래다.
판문점은 전남 목포에서 평북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국도 1호선의 남한 종착점이기도 하다. 판문점을 지나 승용차로 10분쯤 달리면 개성에 닿는다. 그토록 가까운 곳을 갈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난다. 사실 군사분계선(MDL)은 별것도 아니다. 철조망도 담도 아닌, 일정 간격으로 세워진 작은 말뚝일 뿐이다. 그런데 민간인이 이곳에 얼씬거리면 총알세례를 받는다. 이것이 한반도의 현실이고, 우리 민족의 현실이다.
판문점 내 회담장.(왼쪽) 도라전망대에서 본 북한 지역.(오른쪽)
망원경으로 북한 쪽을 관찰하는 외국인 관광객들.
정전협정 당사자는 유엔군과 북한군, 중공군이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한군 측 대표 남일 조선인민군 대장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이어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과 중공군 총사령관 평더화이가 평양에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미 육군 대장이 문산에서 최종 서명했다. 교전 당사자이자 최대 피해국인 한국군 지휘관은 배제됐다. 이것이 ‘한반도 제2 분단’의 실상이다.
JSA경비대대에서 나와 도라전망대에 올랐다. 바로 앞에 녹음이 우거진 비무장지대가 펼쳐져 있다. 그 너머로 사천강이 흐르고 개성공단이 희미하게 보인다. 파주와 개성공단을 잇는 신1번 도로는 한적하기 짝이 없다. 남북관계가 좋았을 때는 차량행렬이 끊이지 않던 도로다. 전방 군부대에 있는 전망대 가운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도라전망대는 늘 관광객으로 북적거린다. 외국인 관광객도 많다. 이날도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가 사방에서 들렸다.
통일촌 부녀회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1사단 공보팀과 만났다. 정훈참모 김이호 중령과 공보장교 김주오 중위 등이 마중을 나왔다. 11연대 정훈과장 박한나 대위도 합류했다. 이날 취재할 철책지역이 11연대 관할이기 때문이다. 6월 초 강원 고성에서 철책 취재를 시작한 이래 여군 장교가 동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 중령은 이곳 지형에 대해 “남북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곳이자 유사시 (북한군이) 최단 남침로로 이용할 수 있는 위험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1사단 장병은 목숨을 걸고 경계근무에 임한다. 적 도발 시 우리가 막아내는 동안 후방부대가 전투준비를 갖추게 된다. 초기 30분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전쟁의) 승패가 달렸다.”
‘천하제일 전진부대’ 1사단은 육군 최초의 사단이다. 1947년 12월 창설한 조선경비대 제1여단이 모체. 이 부대 장병들은 육탄 10용사, 다부동 전투, 평양 입성 선봉 등 선배들이 만들어낸 신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철책 구간에 들어설 즈음 개성공단 관련 긴급 뉴스가 전해졌다. 정부가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에 경협보험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었다. 사실상 공단 폐쇄 방침을 밝힌 것이다.
오후 2시 반, 1사단에서 가장 험하다는 철책 구간을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3개 소초가 관할하는 구간. 걸은 지 10분도 안 지나 땀이 비 오듯 흐른다. 눈에 땀이 들어가 따갑다. 이곳 철책은 동부전선이나 중부전선 철책보다 훨씬 탄탄하고 빈틈이 없어 보인다. 남방한계선은 2중 혹은 3중 철책인데, 이 지역은 2중 철책이다. 안쪽 철책 곳곳에 ‘월남자에게 명령함’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팻말엔 귀순자의 행동수칙이 적혀 있다.
박성언(육사 69기) 소위는 3월 임관한 신참 장교다. 6월 이곳에 배치돼 소초장을 맡고 있다. GOP(일반 전방초소) 근무가 적성에 잘 맞는다는 그는 “병사들이 힘들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판문점 관문인 ○○통문 인근 초소.(왼쪽) 경계근무 중인 초병.(오른쪽)
경의선 열차의 남한 종착역인 도라산역.
이 부대 장병의 군복 상의엔 ‘육탄부대’라는 마크가 새겨져 있다. 육탄 10용사의 후예임을 뜻하는 표시다. 1949년 5월 북한군은 38선 이남인 개성 송악산 고지를 무력으로 점령했다. 국군 1사단 11연대가 이 고지를 탈환하려고 반격에 나섰으나 토치카(특화점) 10곳에서 내뿜는 북한군의 강력한 화력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서부덕 상사를 비롯한 특공대원 9명이 박격포탄과 폭약을 안고 토치카 안으로 뛰어들어 장렬히 산화했다. 이들의 희생 덕에 11연대는 송악산 고지를 탈환했다. 그에 앞서 박창근 하사가 수류탄 7개를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전사했다. 이들을 합해 육탄 10용사라고 부른다. 육군은 ‘육탄 10용사상’을 제정해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있다.
1사단 신화의 상징인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2~25일 낙동강 전선에서 벌어졌다. 8월 5일 낙동강을 넘은 북한군은 다부동(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근처 협곡에 1개 군단을 투입하고 대구 공략에 나섰다. 당시 적 병력은 2만1500명, 아군은 학도병 500명을 포함해 7600명이었다. 1사단은 7차례 공방전 끝에 적 3개 사단을 격퇴함으로써 대구를 방어했다.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됐고, 1사단이 평양 공격의 선봉에 서는 계기가 됐다.
30분쯤 걷자 ‘맥도널드 고지’라고 부르는 M자 모양의 지형이 나타났다. 비슷한 폭의 오르막과 내리막 구간이 두 번 연이어 있다. 병사들은 M자의 두 번째 꼭짓점에 해당하는 높은 지대를 ‘바람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바람의 언덕에 오르자 실제로 청량한 바람이 땀방울을 식혀준다.
초소에는 쿨토시, 얼음 물통, 선글라스, 아이스 스카프 등 피서 물품을 갖춰놓았다. 2월 GOP에 투입된 김홍인 일병은 대학 2학년 재학 중 입대했다. 김 일병은 “군에 들어와 북한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맥도널드 고지’라고 부르는 철책 구간은 굴곡이 심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방북 시 이용했던 신1번 도로.
김 일병은 대화 중에도 망원경을 눈에서 떼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강민기 상병은 가장 힘든 점을 묻자 “야간엔 잠이 부족하고 주간엔 너무 더워 피곤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군복무 자체가 힘드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오후 5시가 다 돼 세 번째 소초에 도착했다. 속옷, 티셔츠는 말할 것도 없고 바지 윗부분까지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사진기자와 함께 병사용 샤워장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생활관 복도에 ‘7월 칭찬왕’에 선정된 유탄수, 김기완 일병의 사진이 게시돼 있다. 김 일병이 쓴 ‘여자친구에게 헌신, 나라에도 헌신!’이라는 글이 재미있다. 칭찬왕은 매달 1회 모든 소대원의 투표로 뽑는다.
생활관 침상에 앉아 사단 소개 영상을 봤다.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 병사가 많았다. 지난해 55명, 올해 90명이 ‘전진고’를 졸업했다. 전진고는 사단 명칭인 전진부대를 학교에 비유한 표현이다. 병사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집단 댄스를 하는 신세대식 신병 수료식도 눈길을 끈다. 역사교육을 유난히 강조한 사단장의 영상편지를 보면서 민족과 조상, 국가의 의미를 새삼 되새겼다. 사단장은 “역사를 가르치는 건 부모 세대의 책임”이라며 “결코 침묵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소초를 출발하는데, 북한이 개성공단 관련 7차 실무회담을 제안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 정부의 강경 방침에 유화적 자세를 보인 것이다. 들녘에 빨갛게 익은 고추가 탐스럽다. 이 싱그럽고 푸르른 산천을 옥죄는 전쟁 기운이 언제나 사라질지….
남북출입국사무소엔 적막감
차단된 경의선 철로 위에 풀이 수북하게 자라 있다.
이곳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방북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엔 ‘평화를 다지는 길 번영으로 가는 길,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 노무현’이라고 적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도로를 이용해 북한으로 들어갔다. 당시 정상회담을 했던 남북 두 지도자는 모두 타계했지만 그들이 남긴 말은 생생히 살아 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숨소리가 담긴 협상 내용이 6년 뒤 이른바 대화록 파동으로 만천하에 공개될 줄을 꿈에서라도 생각했을까.
남북의 유일한 통로가 차단된 현장은 폐허처럼 을씨년스럽다. 도로 오른쪽으로 수십m 떨어진 곳에 놓인 철로는 2007년 이후 사용한 적이 없다. 철로 변에 수풀이 무성하다. 뒤쪽 남북출입국사무소(CIQ)는 유령 건물처럼 적막하다. 이곳에 살아 있는 존재라고는 사납게 울어대는 매미밖에 없다. 해조차 기운을 잃었는지 하얗게 변색돼 구름 속에서 느릿느릿 움직인다.
제3땅굴을 둘러본 후 도라산역으로 이동했다. ○○통문 앞에서 본 철로가 바로 도라산역에서 뻗어 나온 것이다. 남북 간 철로가 다시 개통하면 도라산역을 통과한 기차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역, 손하역을 거쳐 개성역으로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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