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명이는 성적이 아주 뛰어나진 않았지만 상위권이었고 ‘애향단’ 리더 격으로 열심히 활동했다. 친구들과 잘 지내는 개구쟁이였다. 황순원 소설 ‘소나기’ 속 소년처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동심을 가진 학생으로 기억한다.”(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삼계국민학교 은사 박병기 씨)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문수는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했다. 덩치 큰 ‘노는’ 애들이 약한 친구를 괴롭히면 소심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우리와 달리 ‘그만두라’며 앞장서서 막았다.”(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의 경북중·고, 서울대 동창 이원덕 전 대통령사회정책수석)
“고교 시절 준석이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논리정연한 학생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도 수학·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과 리더십을 겸비해 눈에 띄었다. 워낙 출중한 학생이었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의 서울과학고 은사 박완규 한국에너지공대 교수)
6·3 대선에 출마한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후보의 은사와 동기동창들은 그들의 학창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인격 형성기인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정치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주간동아는 세 후보의 초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취재했다. 이들이 전한 일화를 바탕으로 ‘재명이’와 ‘문수’ ‘준석이’의 학창 시절을 살펴본다.
이재명(이하 후보 호칭 생략)이 1964년 태어나 초등생 때까지 산 곳은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을이다. 고향 마을 삼계국민학교(현 월곡초 삼계분교)에 다니던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이재명의 초교 6학년 담임이던 박병기 씨(74)는 5월 20일 전화 통화에서 소년 이재명의 학창 시절에 대해 “친구들과 잘 지내고 활달했다”며 몇 가지 일화를 들려줬다.
“시골이다 보니 집집마다 책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학교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후보가 그 책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재명이가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그 친구에게 돈을 조금 빌렸다고 하더라. 빌려준 친구도 그걸 잊고 군대에 갔는데, 재명이가 그 돈을 봉투에 넣어서 편지로 보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스승으로서 ‘대단히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초교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경기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으로 이주한 이재명은 ‘소년공’으로 고생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틈틈이 공부해 중졸·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데 이어 중앙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중앙대 82학번 이재명에 대해 대학 시절 은사인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20대 국회의원)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특별장학생 조건으로 들어온 이재명은 이미 유명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재명은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워 학교 고시반 기숙사에서 지내며 끼니를 해결하고 학교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고 한다. “사시 응시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모의시험을 쳐보면 이재명이 발군의 성적을 내 교수들의 기대감이 컸다”는 게 이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이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재명은 대학생 시절 후배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이 시위 움직임을 보이자 학장이 조교를 불러 “이재명한테 애들 좀 다독여 보라고 해라”고 했을 정도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후배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리더였던 것이다. 이 명예교수는 “운동권으로 활동하던 중앙대 법대 학생회장 출신 후배들이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고생하자 당시 성남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이재명이 남몰래 자기 사무실에 취직시켜줬다고 한다”며 그의 ‘후배 사랑’ 일화도 전했다.
1951년 경북 영천 임고면 황강리에서 태어난 김문수는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초교 4학년 때 부친이 빚보증을 섰다가 재산을 날려 가세가 기운 탓이었다. 하지만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김문수는 명문 경북중·고에 진학했다. 10대 중후반 소년 김문수의 인품은 이미 지금처럼 “꼿꼿하고 강직했다”는 게 학창 시절 친구들의 설명이다. 김문수와 경북중·고, 서울대 경영학과 동창인 이원덕 전 대통령사회정책수석은 5월 20일 기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서울에서 김문수 지지 유세를 마친 참이었다. “친구로서 김문수에게 굉장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입을 연 그는 학창 시절 김문수를 “유학자 선비 집안 출신에 부모의 엄한 가르침 덕분인지 중학생 어린 나이에도 상당히 기개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친구들이 고교생 시절 김문수를 기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데모’였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시위 당시 김문수는 경북고에서 일어난 데모 주동자로 지목돼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전 수석은 “김문수가 있던 3학년 4반에 유독 데모 참가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며 “겉으로 보면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던 김문수가 데모에 앞장설지 몰랐다”고 말했다. 김문수의 경북중·고 동창이자 서울대에 함께 진학한 강영욱 전 계명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꼿꼿문수’를 보고 55년 전 18세 나이의 김문수 모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강 전 교수의 회고다.
“데모를 마치고 돌아오니 학교에선 징계를 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듣기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음의 고향’ 대구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고 책상을 두드리며 격분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데모 참가자들에게 모두 반성문을 쓰라고 했는데, 김문수 혼자 쓰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계속 반성문을 쓰라고 하자 김문수가 ‘선생님들이 우리더러 정의롭게 살라고 해놓고 어떻게 그걸 굽히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더라. 결국 혼자 무기정학을 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겉과 속이 같고 정직한 성품인 것이다.”
이준석은 1985년 서울 성동구에서 태어나 이듬해 노원구 상계동으로 이사해 학창 시절 대부분을 보낸 ‘서울 키드’다. 서울과학고와 미국 하버드대를 나온 이준석의 학창 시절에는 ‘영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이준석의 서울과학고 시절 은사로 물리 과목을 가르친 박완규 한국에너지공대 교수는 5월 21일 전화 통화에서 “수많은 영재를 가르쳤지만 준석이는 워낙 특출나 지금도 기억에 남는 제자”라며 “문이과 소양을 두루 겸비한 데다, 2학년 때 학생 부회장을 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리더십도 뛰어났다”고 말했다.
학창 시절 스승과 친구들은 이준석의 ‘나눔’에 대한 기억도 전했다. 박 교수는 “준석이는 하버드대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 꼭 모교에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학교에 물품을 기증했다”며 미국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도 후배들을 잊지 않은 제자 이준석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이준석의 한 서울과학고 13기 동창은 ‘학생회 부회장’ 이준석과 관련해 삼성전자로부터 컴퓨터를 기증받은 일화를 떠올렸다. 이준석과 동기들이 재학 시절 서울과학고에서 쓰던 컴퓨터는 이미 낡아 쓰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쓰인 삼성전자 컴퓨터들이 폐기 처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준석은 회사 홍보팀에 연락해 “우리 학교에 기부해달라”고 요청했고, 삼성전자 측은 실제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이준석 자신도 해당 사례를 학창 시절 추억이자 하버드대 입시 성공의 한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
“중3 때 같은 반이었던 문수는 의협심과 정의감이 강했다. 덩치 큰 ‘노는’ 애들이 약한 친구를 괴롭히면 소심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우리와 달리 ‘그만두라’며 앞장서서 막았다.”(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의 경북중·고, 서울대 동창 이원덕 전 대통령사회정책수석)
“고교 시절 준석이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논리정연한 학생이었다. 우수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도 수학·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과 리더십을 겸비해 눈에 띄었다. 워낙 출중한 학생이었어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의 서울과학고 은사 박완규 한국에너지공대 교수)
6·3 대선에 출마한 이재명, 김문수, 이준석 후보의 은사와 동기동창들은 그들의 학창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인격 형성기인 학창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정치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주간동아는 세 후보의 초교부터 대학 시절까지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을 취재했다. 이들이 전한 일화를 바탕으로 ‘재명이’와 ‘문수’ ‘준석이’의 학창 시절을 살펴본다.
“빌린 돈 잊지 않고 갚은 정직한 친구”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의 10대 ‘소년공’ 시절. 이재명 후보 캠프 제공
“시골이다 보니 집집마다 책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그래도 학교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 후보가 그 책들을 아주 열심히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재명이가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고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그 친구에게 돈을 조금 빌렸다고 하더라. 빌려준 친구도 그걸 잊고 군대에 갔는데, 재명이가 그 돈을 봉투에 넣어서 편지로 보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고 스승으로서 ‘대단히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초교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경기 성남 중원구 상대원동으로 이주한 이재명은 ‘소년공’으로 고생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틈틈이 공부해 중졸·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데 이어 중앙대 법대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중앙대 82학번 이재명에 대해 대학 시절 은사인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20대 국회의원)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특별장학생 조건으로 들어온 이재명은 이미 유명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이재명은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워 학교 고시반 기숙사에서 지내며 끼니를 해결하고 학교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고 한다. “사시 응시를 독려하는 차원에서 모의시험을 쳐보면 이재명이 발군의 성적을 내 교수들의 기대감이 컸다”는 게 이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이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재명은 대학생 시절 후배들 사이에서도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당시 학생들이 시위 움직임을 보이자 학장이 조교를 불러 “이재명한테 애들 좀 다독여 보라고 해라”고 했을 정도다.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후배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종의 리더였던 것이다. 이 명예교수는 “운동권으로 활동하던 중앙대 법대 학생회장 출신 후배들이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고생하자 당시 성남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이재명이 남몰래 자기 사무실에 취직시켜줬다고 한다”며 그의 ‘후배 사랑’ 일화도 전했다.
“18세 때나 지금이나 꼿꼿한 사람”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의 경북고 졸업 앨범 사진. 김문수 후보 캠프 제공
친구들이 고교생 시절 김문수를 기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데모’였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 3선 개헌 반대 시위 당시 김문수는 경북고에서 일어난 데모 주동자로 지목돼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이 전 수석은 “김문수가 있던 3학년 4반에 유독 데모 참가자가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며 “겉으로 보면 얌전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던 김문수가 데모에 앞장설지 몰랐다”고 말했다. 김문수의 경북중·고 동창이자 서울대에 함께 진학한 강영욱 전 계명대 석좌교수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꼿꼿문수’를 보고 55년 전 18세 나이의 김문수 모습이 떠올랐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강 전 교수의 회고다.
“데모를 마치고 돌아오니 학교에선 징계를 해야 한다고 난리였다. 듣기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마음의 고향’ 대구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났다고 책상을 두드리며 격분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데모 참가자들에게 모두 반성문을 쓰라고 했는데, 김문수 혼자 쓰지 않았다. 선생님들이 계속 반성문을 쓰라고 하자 김문수가 ‘선생님들이 우리더러 정의롭게 살라고 해놓고 어떻게 그걸 굽히라고 하느냐’고 반문했다더라. 결국 혼자 무기정학을 당했다. 예나 지금이나 겉과 속이 같고 정직한 성품인 것이다.”
“하버드대 유학 시절 방학이면 모교 찾아 후배 격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의 미국 하버드대 재학 시절. 동아DB
학창 시절 스승과 친구들은 이준석의 ‘나눔’에 대한 기억도 전했다. 박 교수는 “준석이는 하버드대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귀국하면 꼭 모교에 와서 후배들을 격려하고 학교에 물품을 기증했다”며 미국 유학 시절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도 후배들을 잊지 않은 제자 이준석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이준석의 한 서울과학고 13기 동창은 ‘학생회 부회장’ 이준석과 관련해 삼성전자로부터 컴퓨터를 기증받은 일화를 떠올렸다. 이준석과 동기들이 재학 시절 서울과학고에서 쓰던 컴퓨터는 이미 낡아 쓰기가 불편했다고 한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쓰인 삼성전자 컴퓨터들이 폐기 처분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준석은 회사 홍보팀에 연락해 “우리 학교에 기부해달라”고 요청했고, 삼성전자 측은 실제로 학교에 컴퓨터 12대를 기증했다. 이준석 자신도 해당 사례를 학창 시절 추억이자 하버드대 입시 성공의 한 요인으로 꼽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