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가 민주화, 산업화 과정의 진통을 톡톡히 겪고 있다. 지난 연말 70년 만의 정권교체를 이룬 연장선상에서다.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지역 농민반군 지도자들의 멕시코시티 입성은 이 과도기에 일어난 커다란 사건이다. 농민반군 지도자인 ‘부사령관 마르코스’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토착 원주민(인디언)과 빈민 등 멕시코 곳곳에서 불거져 나오는 소외계층의 불만을 대변하고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양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멕시코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세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월 300달러 이하의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형편이다. 1억 인구의 3분의 1인 토착 원주민이 빈곤층의 주류를 이룬다. 최근 들어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멕시코는 정치 사회적으로 긴장상태다.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 한복판에는 서울의 대학로나 명동성당 마당처럼 대중집회 장소 구실을 하는 광장이 하나 있다. 축구장 두 개쯤 넓이의 소칼로 광장이다. 정부 관공서와 대성당에 잇닿아 있는 이 광장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주요 행사와 축제들이 치러져왔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엔 군인들로 득실대던 곳이다. 선거 때마다 이곳은 대규모 유세장으로 쓰였다. 평소에도 이 광장은 갖가지 소규모 집회가 열려 저마다 주의주장을 펴오던 곳이다. 말하자면 멕시코 정치의 장외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다. 필자가 지난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 한 무리의 노동자들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장기농성을 하고 있었다.
3월11일 이 소칼로 광장과 그 주변이 10만 인파로 꽉 들어찼다. 멕시코 남부 끝머리의 치아파스 지역에서 올라온 인디언반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지도자 24명을 환영하기 위한 군중집회였다. 그들이 보름 동안 3000km의 행진을 거쳐 멕시코시티에 입성하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그 뜨거운 대중 열기의 한복판에는 ‘부사령관 마르코스’라고 일컬어져온 40대의 스키 복면을 한 인물이 있다. 본명이 라파엘 세바스찬 길렌(43)인 이 멕시코 지식인이 내건 주장은 “1000만 인디언의 권익을 헌법으로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를 잃은 인디언들이 지금껏 ‘2등 시민’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우리는 단지 인디언만을 위한 대변인이 아니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금껏 권위주의적이었던 멕시코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돼 왔던 많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대변한다는 얘기다.
EZLN은 지난 94년 토지개혁과 경제정의를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근거지 치아파스는 소수의 지주들이 토지를 과점해 토착민인 인디언 농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놀라운 것은 이들 멕시코 농민 반란군이 ‘신자유주의’란 이름 아래 미국이 주도해오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재편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치아파스 농민반란의 출발시점이 멕시코가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94년 1월1일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그동안 멕시코 정부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많은 원주민들을 죽인 탓에 국제적인 인권 침해 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 국무성의 97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반란이 시작된 뒤 3년 동안 비전투원인 500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2000명이 정부군의 횡포를 피해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96년엔 치아파스에 맞붙은 오악사카 지역에서 대중혁명군(EPR)이란 이름의 또 다른 반정부 게릴라조직이 생겨나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멕시코반군들은 미국의 거대한 무기시장을 통해 무기를 밀반입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즉결처형과 고문을 저질렀고, 많은 실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런 멕시코가 지난해 큰 정치변혁을 경험했다. 1929년 이래 70년 동안 집권해왔던 제도혁명당(PRI)의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후보가 대선에서 우파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후보에게 패배한 것이다. 가톨릭계와 상공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취임한 폭스 대통령은 “이제 변화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인디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법안을 의회로 보낸 것도 변화의 한 가닥이다. 치아파스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폐쇄하고 그 지역 인디언들의 요구조건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마르코스의 멕시코시티 입성일은 폭스 대통령의 취임 99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체제개혁을 시작한 상황인 폭스정권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폭스 대통령은 내심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EZLN 지도자들의 멕시코 입성을 환영했다. EZLN의 놀라울 정도의 높은 대중적 지지도를 감안하면 당연한 정치적 반응이었다.
지난 96년 당시 EZLN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정권과 평화협상을 가진 바 있다. 그때의 협상으로 생겨난 게 ‘인디언 권리 및 문화법안’이다. 법안 초안에 따르면, 지방자치를 위한 부족위원회 선거 등 원주민에게 제한된 형태나마 자치권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 의회에 인디언을 위한 의석을 일정하게 보장하고 토착민들이 지방관리를 자율적으로 뽑는, 일종의 지방자치법안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세디요정권의 반대로 지금껏 서랍 속에 잠자고 있었다. 멕시코 의회에는 지금도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멕시코를 발칸반도처럼 쪼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법안에 비판적이다. 정원 500명의 하원과 128명의 상원으로 구성된 멕시코 의회는 지난해 정권교체 이전까지만 해도 여당이었던 제도혁명당(PRI)이 다수당(하원 211, 상원 60)이고, 폭스 대통령의 국민행동당(PAN)은 제2당이다(하원 206, 상원 46). 폭스가 토착 원주민들의 손을 들어주려 해도 PRI가 반대하면 성사가 어렵다. 마르코스 일행은 법안 가결까지 멕시코시티를 떠나지 않을 태세다.
한때는 마야 아스테크문명을 꽃피웠던 멕시코 토착 원주민들의 삶은 대부분 비참하다. 필자는 지난 겨울 멕시코의 중부지역 조그만 도시인 생 미구엘 드 아옌데에 간 적이 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에 형성된, 역사가 오랜 이 도시는 사실상 미국인의 식민도시다. 은퇴한 뒤 풍광이 좋은 그곳으로 옮겨온 현지 미국인들도 식민도시(American colonial city)란 말을 별다른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곳 미국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해주는 일로 먹고사는 원주민들은 너무나 가난하게 살고 있다. 가톨릭을 믿는 이들은 산아제한 개념이 없어 7, 8명의 자녀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 가운데 상급학교에 가는 아이는 그저 한둘이다. 현지 미국인들이 위생 처리한 생수를 사먹는 반면, 그곳 원주민들은 그냥 우물물을 마신다. 석회질이 많이 포함된 우물물 때문에 원주민들은 각종 소화기관 질병으로 고생한다. 가난과 체념에 익숙해진 이들 원주민 눈에는 토지개혁과 부의 재분배를 내걸고 총을 든 치아파스의 마르코스가 전설적인 영웅 판초 빌라나 다름없다.
멕시코는 1인당 국민소득이 4942달러(1999년 기준)로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못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27%가 5인 가족 기준으로 월수입 300달러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빈곤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94년 멕시코가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NAFTA에 편입될 당시 좌파 경제학자들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멕시코 경제가 이름 그대로 미국 경제로 편입되는 것”이며 “제국주의적인 미 경제가 멕시코의 석유산업을 지배할 것”이란 우려에서였다. 7년이 지난 지금 NAFTA는 멕시코에 교역량(특히 대미 수출물량) 증가, 고용 확대 등 양적인 경제성장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지난 70, 8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한국이 체험했던 그런 현상이다. 특히 94년 멕시코 화폐인 페소화의 평가절하 이후 멕시코인들은 평균 39%의 구매력 감소를 겪어야 했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인디언들의 가난은 NAFTA 7년을 맞은 지금도 그대로다.
지난 70년 동안 장기 집권해온 제도혁명당(PRI)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멕시코 인디언들은 다른 남미국가들의 경우처럼 국가적 통합과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졌다. 멕시코에는 200개 가량의 부족이나 종족이 있고, 이들이 쓰는 언어 또는 방언만 해도 50개가 넘는다. 그래서 같은 멕시코 국적을 지녔지만 공식언어인 스페인어를 모르는 인디언들끼리 만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멕시코 중앙정부의 시각에선, 이처럼 각기 다른 언어가 낳는 사회-문화적 분열은 지역간 불신과 오해를 낳을 뿐 정치통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체 인구의 9%인 백인과 60%인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언 혼혈)의 엘리트층으로 이뤄진 멕시코 정권은 이를 ‘인디언 문제’로 불러왔다.
지금껏 멕시코 인디언들은 차별을 받아왔다. 이렇다할 정치적 지원세력이 없었던 그들은 멕시코 정권의 불평등 지배를 그냥 견뎌야 했다. 이를테면, 인디언들이 중소기업을 시작해 물건을 만들어내려 해도 은행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바랄 수가 없다.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표현대로라면, 역대 멕시코 정권은 ‘부자들을 위한 정권’이라 개혁에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치아파스 지역 원주민들이 토지개혁과 자치권 확보 투쟁에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지금의 폭스정권도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변방에서 벌여온 7년 동안의 힘겨운 반란을 멕시코 정치의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그의 멕시코 시티 나들이에 인디언이 아닌 이들도 많은 갈채를 보냈다. 그 뒤에는 멕시코 제도 정치권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이 깔려 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양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멕시코다. 그러나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세 가구 가운데 한 가구가 월 300달러 이하의 가난한 삶을 꾸려가는 형편이다. 1억 인구의 3분의 1인 토착 원주민이 빈곤층의 주류를 이룬다. 최근 들어 이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멕시코는 정치 사회적으로 긴장상태다.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 한복판에는 서울의 대학로나 명동성당 마당처럼 대중집회 장소 구실을 하는 광장이 하나 있다. 축구장 두 개쯤 넓이의 소칼로 광장이다. 정부 관공서와 대성당에 잇닿아 있는 이 광장에서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주요 행사와 축제들이 치러져왔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 때엔 군인들로 득실대던 곳이다. 선거 때마다 이곳은 대규모 유세장으로 쓰였다. 평소에도 이 광장은 갖가지 소규모 집회가 열려 저마다 주의주장을 펴오던 곳이다. 말하자면 멕시코 정치의 장외 중심지가 바로 이곳이다. 필자가 지난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 한 무리의 노동자들은 그곳에 천막을 치고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는 장기농성을 하고 있었다.
3월11일 이 소칼로 광장과 그 주변이 10만 인파로 꽉 들어찼다. 멕시코 남부 끝머리의 치아파스 지역에서 올라온 인디언반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지도자 24명을 환영하기 위한 군중집회였다. 그들이 보름 동안 3000km의 행진을 거쳐 멕시코시티에 입성하기까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 그 뜨거운 대중 열기의 한복판에는 ‘부사령관 마르코스’라고 일컬어져온 40대의 스키 복면을 한 인물이 있다. 본명이 라파엘 세바스찬 길렌(43)인 이 멕시코 지식인이 내건 주장은 “1000만 인디언의 권익을 헌법으로 보장하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가난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을 기회를 잃은 인디언들이 지금껏 ‘2등 시민’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왔다. “우리는 단지 인디언만을 위한 대변인이 아니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금껏 권위주의적이었던 멕시코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돼 왔던 많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대변한다는 얘기다.
EZLN은 지난 94년 토지개혁과 경제정의를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근거지 치아파스는 소수의 지주들이 토지를 과점해 토착민인 인디언 농민들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삶을 살아왔다. 놀라운 것은 이들 멕시코 농민 반란군이 ‘신자유주의’란 이름 아래 미국이 주도해오던 전지구적 자본주의 재편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치아파스 농민반란의 출발시점이 멕시코가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된 94년 1월1일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을 갖는다.
그동안 멕시코 정부는 압도적인 군사력을 동원해 많은 원주민들을 죽인 탓에 국제적인 인권 침해 시비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미 국무성의 97년도 보고서에 따르면, 반란이 시작된 뒤 3년 동안 비전투원인 500명의 농민들이 죽임을 당하고 2000명이 정부군의 횡포를 피해 살던 집을 떠나야 했다. 96년엔 치아파스에 맞붙은 오악사카 지역에서 대중혁명군(EPR)이란 이름의 또 다른 반정부 게릴라조직이 생겨나 정부군을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멕시코반군들은 미국의 거대한 무기시장을 통해 무기를 밀반입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은 즉결처형과 고문을 저질렀고, 많은 실종자들이 생겨났다.
그런 멕시코가 지난해 큰 정치변혁을 경험했다. 1929년 이래 70년 동안 집권해왔던 제도혁명당(PRI)의 프란시스코 라바스티다 후보가 대선에서 우파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후보에게 패배한 것이다. 가톨릭계와 상공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해 12월 취임한 폭스 대통령은 “이제 변화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인디언들의 권익신장을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법안을 의회로 보낸 것도 변화의 한 가닥이다. 치아파스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폐쇄하고 그 지역 인디언들의 요구조건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을 밝혔다.
마르코스의 멕시코시티 입성일은 폭스 대통령의 취임 99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제 막 체제개혁을 시작한 상황인 폭스정권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폭스 대통령은 내심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 EZLN 지도자들의 멕시코 입성을 환영했다. EZLN의 놀라울 정도의 높은 대중적 지지도를 감안하면 당연한 정치적 반응이었다.
지난 96년 당시 EZLN은 에르네스토 세디요 정권과 평화협상을 가진 바 있다. 그때의 협상으로 생겨난 게 ‘인디언 권리 및 문화법안’이다. 법안 초안에 따르면, 지방자치를 위한 부족위원회 선거 등 원주민에게 제한된 형태나마 자치권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멕시코 의회에 인디언을 위한 의석을 일정하게 보장하고 토착민들이 지방관리를 자율적으로 뽑는, 일종의 지방자치법안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세디요정권의 반대로 지금껏 서랍 속에 잠자고 있었다. 멕시코 의회에는 지금도 이에 대한 반대의견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멕시코를 발칸반도처럼 쪼개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법안에 비판적이다. 정원 500명의 하원과 128명의 상원으로 구성된 멕시코 의회는 지난해 정권교체 이전까지만 해도 여당이었던 제도혁명당(PRI)이 다수당(하원 211, 상원 60)이고, 폭스 대통령의 국민행동당(PAN)은 제2당이다(하원 206, 상원 46). 폭스가 토착 원주민들의 손을 들어주려 해도 PRI가 반대하면 성사가 어렵다. 마르코스 일행은 법안 가결까지 멕시코시티를 떠나지 않을 태세다.
한때는 마야 아스테크문명을 꽃피웠던 멕시코 토착 원주민들의 삶은 대부분 비참하다. 필자는 지난 겨울 멕시코의 중부지역 조그만 도시인 생 미구엘 드 아옌데에 간 적이 있다. 스페인 식민통치 시절에 형성된, 역사가 오랜 이 도시는 사실상 미국인의 식민도시다. 은퇴한 뒤 풍광이 좋은 그곳으로 옮겨온 현지 미국인들도 식민도시(American colonial city)란 말을 별다른 거리낌없이 말한다.
그곳 미국인들을 위해 허드렛일을 해주는 일로 먹고사는 원주민들은 너무나 가난하게 살고 있다. 가톨릭을 믿는 이들은 산아제한 개념이 없어 7, 8명의 자녀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그 가운데 상급학교에 가는 아이는 그저 한둘이다. 현지 미국인들이 위생 처리한 생수를 사먹는 반면, 그곳 원주민들은 그냥 우물물을 마신다. 석회질이 많이 포함된 우물물 때문에 원주민들은 각종 소화기관 질병으로 고생한다. 가난과 체념에 익숙해진 이들 원주민 눈에는 토지개혁과 부의 재분배를 내걸고 총을 든 치아파스의 마르코스가 전설적인 영웅 판초 빌라나 다름없다.
멕시코는 1인당 국민소득이 4942달러(1999년 기준)로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못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의 27%가 5인 가족 기준으로 월수입 300달러에 못 미치는 빈곤층이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빈곤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94년 멕시코가 미국, 캐나다와 더불어 NAFTA에 편입될 당시 좌파 경제학자들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멕시코 경제가 이름 그대로 미국 경제로 편입되는 것”이며 “제국주의적인 미 경제가 멕시코의 석유산업을 지배할 것”이란 우려에서였다. 7년이 지난 지금 NAFTA는 멕시코에 교역량(특히 대미 수출물량) 증가, 고용 확대 등 양적인 경제성장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다. 지난 70, 8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한국이 체험했던 그런 현상이다. 특히 94년 멕시코 화폐인 페소화의 평가절하 이후 멕시코인들은 평균 39%의 구매력 감소를 겪어야 했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인디언들의 가난은 NAFTA 7년을 맞은 지금도 그대로다.
지난 70년 동안 장기 집권해온 제도혁명당(PRI)의 권위주의 정권 시절, 멕시코 인디언들은 다른 남미국가들의 경우처럼 국가적 통합과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여겨졌다. 멕시코에는 200개 가량의 부족이나 종족이 있고, 이들이 쓰는 언어 또는 방언만 해도 50개가 넘는다. 그래서 같은 멕시코 국적을 지녔지만 공식언어인 스페인어를 모르는 인디언들끼리 만나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멕시코 중앙정부의 시각에선, 이처럼 각기 다른 언어가 낳는 사회-문화적 분열은 지역간 불신과 오해를 낳을 뿐 정치통합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전체 인구의 9%인 백인과 60%인 메스티소(백인과 인디언 혼혈)의 엘리트층으로 이뤄진 멕시코 정권은 이를 ‘인디언 문제’로 불러왔다.
지금껏 멕시코 인디언들은 차별을 받아왔다. 이렇다할 정치적 지원세력이 없었던 그들은 멕시코 정권의 불평등 지배를 그냥 견뎌야 했다. 이를테면, 인디언들이 중소기업을 시작해 물건을 만들어내려 해도 은행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바랄 수가 없다.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표현대로라면, 역대 멕시코 정권은 ‘부자들을 위한 정권’이라 개혁에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치아파스 지역 원주민들이 토지개혁과 자치권 확보 투쟁에 나선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지금의 폭스정권도 보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변방에서 벌여온 7년 동안의 힘겨운 반란을 멕시코 정치의 한복판으로 옮겨왔다. 그의 멕시코 시티 나들이에 인디언이 아닌 이들도 많은 갈채를 보냈다. 그 뒤에는 멕시코 제도 정치권에 대한 뿌리 깊은 실망이 깔려 있다.